한국의 ‘체사레 아톨리니’는 머지 않았다

“요즘은 70대가 예전의 50대라는 말도 있지만 내 정년은 아직 멀었어요. 올해 예순 넷인데 지난 10년간 감기 한 번 든 적이 없어요. 뭐, 내일 당장 들지도 모르겠지만요(웃음). 늘 긴장하고 사니까 아플 수가 없어요. 이 일은 절대 남에게 뒤처져선 안 되는 사업이에요. 2등은 존재 가치가 없기 때문이지요.”꼬박 40년이다. 사회로 첫발을 디딘 순간부터 단 한 순간도 ‘다른 길’을 생각해 본 적이 없는 ‘세기테일러’ 윤인중 연구원장. 대한민국 일등 수제양복을 너머 세계 3대 명품 슈트와 어깨를 나란히 할 ‘세기’를 향한 그의 바느질은 지금 이 순간도 계속되고 있다.서울 소공동 롯데호텔 지하. 조금 이르다 싶은 아침 시간에 ‘세기테일러’ 양복점을 찾았다. 다소 구닥다리 같은 상호가 되레 오래된 사진처럼 정겹다. 그런데 오늘의 ‘주인공’이 보이지 않는다. 하루도 거르지 않고 아침마다 공장을 찾는 윤인중 원장은 약속 시간보다 조금 늦게 도착했다.“사람 몸은 입체적이잖아요. 그런데 재단지는 평면이란 말예요. 양복은 22군데에 이르는 입체적인 신체 치수를 평면으로 옮긴 후, 그 평면으로 잘려진 150조각이 하나로 합쳤을 때 비로소 완성됩니다. 150조각을 붙여 나갈 때 어느 한 곳도 중요하지 않은 곳이 없지요. 그러니 슈트는 고객 한 사람 한 사람의 마음과 체형을 담은 조형예술인 셈이지요.”숨을 돌릴 겨를도 없이 그는 수제 양복에 대한 이야기를 꺼낸다. 그저 옷만 맞추러갔다면 듣기 힘들었을 얘기에는 옷본과 자, 캔버스(양복속 심지)까지 ‘추임새’로 총동원된다. 2년 전 장남인 윤일석 씨가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경영 전반을 책임지는 대표로 가업 잇기에 나선 뒤 아버지는 ‘연구원장’으로 타이틀을 바꿨다. 하지만 고객의 신체 치수를 재고(채촌), 남성 양복 기술의 핵심이랄 수 있는 어깨 견봉점(움직이는 어깨뼈)의 설계와 재단, 바느질, 5겹에 이르는 심지 바늘땀을 뜨는 일까지 윤 원장은 아직도 어느 하나 남의 손에 맡길 수가 없다.“남자 슈트 상의는 무게가 보통 650g 정도 됩니다. 무게 중심을 어깨 폭의 안쪽(목 방향)에 둬야지 견봉점 쪽에 두게 되면 옷이 무겁고 불편해지죠. 이 모든 것이 채촌 후 패턴을 그릴 때 이미 계산되어야 해요.”슈트의 기초공사랄 수 있는 패턴은 그래서 중요하다. 윤 원장은 더 정확한 패턴을 위해 보통 18곳에 그치는 채촌 포인트에 4군데를 추가, 22군데의 사이즈를 잰다. 가슴과 어깨가 심하게 앞으로 쏠린 체형, 어깨가 뒤로 넘어간 체형 등 40년간 그가 줄자를 들고 채촌한 고객 수는 이루 헤아릴 수 없다. 마음이 까다로운 고객보다는 체형이 남달라 ‘몸이 까다로운’ 고객이 훨씬 어려운 상대. 보통은 가슴둘레와 허리둘레가 14cm 정도 차이가 나는 것이 정상이지만 사람의 몸은 얼굴 생김새만큼이나 다양하고 제각각이다. 하지만 보통을 벗어난 ‘까다로운’ 고객의 체형은 그에게 좋은 시험의 기회가 되었고, 그렇게 축적된 데이터베이스와 경험치는 ‘살아 움직이는’ 패턴 기술로 윤 원장을 ‘장인’이라 불리게 하는 근간이 됐다.“서울에 올라와 무슨 일을 하면 돈을 벌까 신문을 뒤적이던 차에 대한복장학원 모집광고를 보게 됐어요. 이거다 싶어서 양복 만드는 일을 배우기 시작했는데 손재주가 있었는지 수석으로 졸업을 했어요. 하숙집 방바닥에 엎드려 바느질을 하면서 ‘이건 운명이다’ 싶었죠. 그때 그 학원 원장이 ‘자네는 신(神)적인 존재’라고 하더라고요.”1970년대 초반 ‘옷 좀 입는다’는 남자들이 북적거렸던 서울 광교. 수제 양복점이 즐비했던 ‘양복의 메카’에서 재단사로 자그마한 양복점 몇 군데를 거친 뒤 ‘세기테일러’의 전신인 ‘세기양복점’에 취직했다. 그런데 그곳에서 양복사로서 평생에 남을 ‘인연’을 만난다.“(재단사 시절) 박정희 대통령이 원래 세기양복점 고객이셨는데 잠깐 다른 양복점으로 옮기신 적이 있어요. 그런데 어느 날 청와대에서 저를 찾아왔어요. 대통령께서 양복이 불편하다고 하시니 저더러 그 양복을 뜯어보고 문제가 무엇인지 분석해보라는 겁니다. 뜯어보고 잘못된 점을 종이에 적어서 청와대로 보냈더니 한참을 지나 느닷없이 청와대에서 또 저를 찾더라고요.”30대 초반, ‘양복사’ 윤인중이 청와대를 출입하게 된 ‘사건’이다. ‘대통령의 양복사’로 TV로만 보던 대통령을 만나고, 그의 몸에 손을 대는 엄청난 경험을 하게 된 것이다.“물론 부담스러웠죠. 하지만 옷 만드는 사람에게 고객은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똑같아요. ‘고객이다’라고 생각해야지 ‘대통령이다’고 생각하면 떨려서 치수도 못 재죠. 그러니까 아예 무시하는 거지. 마음이 떨리면 100의 60밖에 못 볼 거 아니겠어요. 30대 초반에 경험도 적고 떨렸던 건 사실이지만 순서를 정해놓고 하나하나씩 채촌을 했죠. 박 대통령은 마음이 까다로운 고객이었던 것 같아요. 어느 날 TV를 보는데 키가 좀 작아보이셔서 그 다음 양복을 만들 때 일부러 바지 길이를 1cm 길게 했더니 바로 알아보시고 고쳐오라고 하시더라고요. 하하하…”싸고 구김도 덜 가는 폴리에스테르 혼방원단을 좋아했던 박 대통령과의 인연은 대통령이 세상을 떠나기까지 이어졌다. 이후 전두환 전 대통령이 예복을 맞췄고, 취임 이전부터 고객이었던 노태우 전 대통령도 윤 원장에게 양복을 맞췄다. 정·재계 인사들의 발걸음이 잦아지면서 솜씨 좋은 양복사라는 소문이 났다.“대통령께서 입는 양복이 불편하면 비서관들이 아주 고생을 하더라고요. 노 대통령도 저희 집 옷을 입고 나서는 청와대에서 아주 좋아했죠. 양복을 들고 자주 찾아오지 않아도 되니까요. 노 전 대통령은 가슴은 크고, 뒷품이 좁고, 어깨가 내려간 까다로운 체형이었어요. 체형 까다로운 고객 중엔 (삼성의) 이건희 회장도 계셨죠. 그룹 총수가 된 뒤에도 몇 번 오셨는데 고객들이 옷에 만족스러워할 때 가장 흐뭇해요. 고객 마음까지 느껴서 옷을 만들어 드려야 우리 집이 종착역이 될 수 있거든요.”‘세기양복점’을 ‘종착역’으로 삼았던 VIP 고객들의 옷본은 윤 원장의 ‘역사’로 양복점에 고스란히 보관돼 있다.“사람의 체형은 보통 대여섯 가지로 나뉘는데, 소득수준이 높아질수록 체형이 반듯해집니다. 잘 먹고 잘 살게 될 수록 자세도 반듯해져서 넥 포인트(Neck Point)가 점점 올라가고 있어요. 30년 쯤 수도 없이 양복을 만들어보니 모든 것이 보이기 시작하더군요.”‘까다로운’ 고객들과 함께 발전해 온 세기테일러에 최근 젊은 피가 수혈됐다. 윤 원장의 장남인 윤일석 씨가 합류한 것. 아날로그와 디지털의 만남이랄 수 있는 부자의 결합이다. ‘장인’인 아버지의 기술력에 현대적인 고객 관리와 마케팅이 더해져 세계적인 명품 슈트와 어깨를 겨누기 위한 경쟁력 강화에 피치를 올리고 있다.“우리나라에는 명장에 대한 잣대가 없어요. 우리나라 양복 기술이 영국에서 일본을 거쳐 온 것이니 그 뿌리가 사실은 영국에 있다고 볼 수 있어요. 그런데 일본에서는 아직도 메이지유신 때 쓰던 매뉴얼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양복점들이 많아요. 3대를 거쳐 100년 이상 가업을 지켜온 명장들인데 영국보다 오히려 더 영국적인 전통을 고수하고 있지요. 그들의 옷을 뜯어보면 명품이 명품인 이유를 알 수 있어요. 어느 한 곳도 쉽게 만들려고 했던 흔적이 없거든요.”세계적인 명품 슈트와 경쟁할 ‘명장의 양복점’이 되기 위한 노력은 윤 원장의 체계화된 매뉴얼 정립과 손맛 넘치는 전통 기술을 유지, 발전시키려는 ‘고집’에서 멈추지 않는다. 클래식 맞춤 수트의 ‘정수’랄 수 있는 ‘비스포크(Bespoke: been spoken for의 줄임말로 고객이 말한 대로 만든다는 뜻)’ 양복의 최고가 되기 위한 아낌없는 투자도 뒤따른다.“‘브리오니’, ‘키톤’, ‘체사레 아톨리니’가 세계 3대 명품 슈트예요. 모두 이탈리아 브랜드죠. 가업을 잇겠다고 결심한 뒤 잡지 광고를 보다 체사레 아톨리니 옷에 반한 적이 있어요. 그때 아톨리니 형제가 직접 한국으로 와서 채촌을 하고 이탈리아 현지에서 옷을 만들어 보내는 이벤트에 신청을 했죠. 당시 환율로 550만 원짜리 슈트였는데 중간에 가봉 한 번 하지 않았는데도 정말 놀랍도록 완벽하더라고요. 한 달 정도 입었을까요? 바로 뜯었죠.”1년 전부터는 본격적으로 드로잉과 바느질 기술을 익히고 있다는 윤일석 대표는 30대 젊은 CEO답게 투자에도 과감하다. ‘체사레 아톨리니’를 비롯해 그가 뜯어본 세계적 명품 양복도 이미 여러 벌. 직원 100여 명에 불과한 작은 회사이지만 전 세계 클래식 슈트 시장에서 최고로 인정받는 명가 ‘체사레 아톨리니’가 세기테일러 100년 즈음 윤 대표의 목표다. 지금도 재봉틀 한 대 없이 옷을 만드는 아톨리니 형제의 고집을 배우고 싶다. 그래선지 ‘아저씨 옷’으로 여겨졌던 맞춤 양복은 대변신을 했다. ‘세기테일러’는 의사, 변호사, 금융인 등 20~30대 전문직 고객들이 많이 찾는다.“800만 원짜리 브랜드와 대등한 수준이되 가격은 200만 원 안팎이라면 경쟁력이 있는 거죠. 고객의 절반 이상이 20~30대인데 ‘브리오니’, ‘키톤’, ‘아톨리니’를 입고 싶지만 너무 비싸니 그에 버금가는 수제양복을 찾는 분들이죠. 지방에서 찾아오기도 하는데, 분명 경쟁력이 있다고 봅니다. 나는 이제 나이도 있고 젊은 고객들은 아들이 상담을 하니 이야기도 잘 통하는 것 같아요. 하하.”윤 원장 부자는 또 어떤 명품 슈트를 뜯고 있을지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