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전칠예 작가 김선갑

작가 김선갑은 18세에 공방에 입문해 올해로 43년째 나전칠예만 해온 사람이다. 나전장인 고(故) 김태희 선생의 수제자였던 그는 현재 나전을 세계적인 예술로 승화시키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경주하고 있다. 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8월 초, 서울 정릉에 있는 그의 공방을 찾았다.

김 작가의 공방은 북한산 자락, 빼곡히 들어선 아파트와 빌라촌을 조금 벗어난 곳에 자리하고 있었다. 아파트 상가 지하에 자리 잡은 공방에 들어서자 나전칠기로 제작한 공예품들이 한눈에 들어왔다.

그 사이 안쪽 작업실에서 그는 작업에 열중하고 있었다. 자리를 권하는 김 작가의 뒤로 작업 중인 작품이 언뜻 보였다. 그것은 예상과 달리 나전이 아닌 회화작품이었다. 의아한 눈으로 바라보자 그는 조만간 있을 전시회를 위해 회화작업을 한다고 했다.
[Artist] 전통을 넘어 세계적인 예술작품으로 거듭나다
“나전이라고 하면 기능적인 부분만 생각하는 경향이 있어요. 하지만 공예란 게 원래 종합예술이에요. 나전으로 된 가구를 보세요. 거기에는 디자인이 있고, 목공이 있어요. 나무 위에 그려진 나전만 떼놓으면 그게 바로 회화거든요. 젊어서부터 저는 그런 나전의 종합예술적인 면에 주목했습니다. 지금의 작품이 나오기까지 긴 연습이 필요했던 거죠.”

18세 나전칠기 입문과 고 김태희 선생과의 운명적인 만남

그 시작은 43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전남 함평이 고향인 김 작가는 할아버지 손에 이끌려 자개에 첫발을 내디뎠다. 남다른 그의 손재주를 아꼈던 할아버지가 그를 나전의 길로 인도한 것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전으로 만든 공예품은 엄청나게 비싸고 귀한 대접을 받았다. 재료도 비싸거니와 작업 자체가 까다로워 조선 중기까지만 해도 궁에서나 쓰던 귀한 물건이었다.

나전을 다루는 장인도 그리 많지 않았다. 전남 광주에서 처음 나전칠기 분야에 입문한 그는 1976년 군대를 제대하고는 본격적으로 스승을 찾아 나섰다. 소문에 의지해 여기저기 안 다닌 곳이 없을 정도.

하지만 이름 있는 장인들에게 기능적으로 많은 가르침을 받았지만 아쉬움은 여전했다. 단순히 기능이 아닌 다른 무엇인가가 필요했다. 예술작품에서 느낄 수 있는 아우라가 공예품에는 부족했던 것이다. 그는 회화에서 그것을 찾으려고 했다.

언론사, 문화센터, 대학교를 오가며 다양한 회화기법을 공부했다. 사대부들의 격조를 배우고 싶어 수묵화를 배웠고, 현대적인 감각을 익히기 위해 유화에 손을 댔다. 그렇게 배운 것을 나전에 접목하는 시도도 계속했다.

다양한 시도와 노력 덕에 나전장인으로 이름을 얻던 그즈음 그의 작품 인생에 일생일대의 전환기가 찾아온다. 국전 초대작가이기도 한 나전장인 고 김태희 선생을 사사하게 된 것이다. 기회는 뜻하지 않게 찾아왔다. 1985년 그간의 작품을 모아 인사동에서 전시회를 열었는데 예고 없이 전시회를 찾은 선생이 즉석에서 자신의 문하에 들어오라는 제안을 한 것.

“당시 김태희 선생님은 스승으로 모신다는 사실 자체가 영광으로 여겨졌던 분이었어요. 감히 배우고 싶다는 말조차 못 붙였던 분이셨어요. 그런 분을 가까이서 모시게 됐으니까 저로선 더없이 큰 영광이었죠. 그때부터 선생님이 돌아가신 1992년까지 6년을 모셨습니다.”
[Artist] 전통을 넘어 세계적인 예술작품으로 거듭나다
피붙이 같은 정과 예술을 함께 한 사제

모든 작품은 정신의 산물이다. 그는 무엇보다 스승의 정신을 배우고 싶었다. 가르침은 새벽부터 밤까지 이어졌다. 강남에 자신의 공방을 운영하고 있었지만 일주일에 사흘은 선생을 찾았다. 행여 발걸음이 뜸해지면 선생이 직접 전화로 그를 찾았다.

옻을 사러 강원도 원주로 출타할 때도, 손님을 만날 때도 그림자처럼 스승을 보필했다. 스승은 가르치는 방식이 조금 남달랐는데, 절대 이래라 저래라 하는 법이 없었다. 방향만 잡아줄 뿐 스스로 깨달을 때까지 참고 기다려주었다. 디자인을 가르칠 때도 그랬다.

주제를 주고 도안을 내면, 당신 마음에 들 때까지 수십 번 퇴짜를 놓았다. 지금 생각하면 가르치는 이도, 배우는 이도 인내심이 없고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6년을 그렇게 지극한 정성으로 스승을 모셨고, 스승은 아낌없는 가르침을 베풀었다.

그 6년 동안 그는 스승에게 공예가 무엇인지, 예술이 무엇인지를 배웠다. 생전에 스승은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됐는데, 처음에는 안 받겠다고 우겼다고 한다. 그가 나서서 스승의 고집을 꺾고 겨우 받게 했다.

스승은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되고 1년 6개월 만에 세상을 등졌다. 스승은 꼭 60년을 나전칠기만 하다 저 세상으로 떠났다. 세상을 등지기 전 스승은 60년 동안 쓰셨던 도구와 도안을 모두 그에게 물려주었다. 그것만도 작은 트럭 몇 대 분이었다.

“선생님은 신라 시대부터 근대까지 이어진 나전칠기의 완성을 보신 분이십니다. 다시는 그런 분 나오기 어려울 겁니다. 작품이나 업적에 비해 국내에서는 덜 알려졌지만, 외국에서는 많은 분들이 선생님 작품의 가치를 인정합니다.”

[Artist] 전통을 넘어 세계적인 예술작품으로 거듭나다
가장 한국적인 소재로 세계를 그리다


문제는 남겨진 그였다. 스승이 보여주지 못한 작품세계를 보여주는 게 그에게 남겨진 몫이었다. 그는 그 해답을 다시 회화에서 찾으려 했다. 수묵화와 현대미술을 열심히 파고들었다.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열성을 다하다 보니 도안 없이도 자개작업이 가능해졌다. 마치 난을 치듯 자개작업을 하는 자신을 발견하게 됐다.

본격적으로 도안 없이 자개작업을 하게 된 것은 1998년경부터다. 상업화된 도안 없이 자개로 그림을 그리게 된 것이다. 나무판이 그에게는 캔버스인 셈이다. 자연스레 작품에 격조와 품격이 갖춰졌다. 그는 자신이 만든 공예품은 세상 어떤 것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다고 자신한다.

“나전은 전 세계에서 한국이 최곱니다. 달리 말해 한국에서 제일 잘 하면 세계 최고라는 말이죠. 그런데 7, 8년 전부터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글로벌한 사회에서 한국 최고만으로는 부족하다는 생각이 든 거죠. 어디든 통하는 최고가 돼보고 싶다는 욕심이 생긴 거죠. 그래서 택한 게 회화입니다.”

세계로 나가겠다는 생각에 그는 서울시에서 인간문화재 제의도 거절했다. 함께 공예를 한 친구들은 명장이 되고, 인간문화재로 지정되기도 했지만 그는 그런 데 관심이 없다. 인간문화재 제의를 거절한 것은 ‘더 노력해서 한국 최고를 넘어서겠다’는 그의 의지 표현이기도 하다.

그때부터 나전과 회화를 병행했다. 몇 해 전부터 그는 소반 위에 삼베를 덧대고, 그 위에 자개 작업을 한다. 소반 자체가 캔버스로 미적 가치가 있을 뿐 아니라, 덧댄 삼베는 특유의 질감이 마티에르를 살려주기 때문이다. 그 위에 그는 서양화와 동양화, 그리고 민화적 요소를 혼합해 자개로 그림을 그린다.

최종 작업은 옻칠이다. 예술작품은 얼마나 오랫동안 보관이 가능한지도 중요하다. 서양화에서 쓰는 유화가 500년을 간다지만, 옻칠은 3000년 이상을 간다. 뿐만 아니라 옻만으로 다양한 색깔을 표현할 수 있다. 많은 이들이 옻으로 색을 낸 그의 그림을 보고 놀란다. 하지만 그에게는 그리 새로울 게 없다. 이미 오래전 스승에게 옻으로 색을 내는 법을 배웠기 때문이다.

“제가 아크릴부터 수묵화, 유화까지 다 합니다. 그래서 그 특성을 잘 압니다. 유화는 얹히고, 수묵화는 스며들지만 옻칠은 스미면서 얹힙니다. 여기서 저만의 새로운 작품이 탄생하게 되는 거죠. 선생님이 나전의 궁극을 보여주셨다면, 저는 그걸 뛰어넘어 세계인이 공감할 수 있는 예술작품을 보여줄 겁니다.”

글 신규섭·사진 이승재 기자 wawo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