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7월에 공포된 개정 근로자퇴직급여보장법(이하 근퇴법)에는 제도의 선진화를 위한 많은 내용들이 포함돼 있다. 그중에서도 특히 눈에 띄는 것은 개인형 퇴직연금 (Individual Retirement Pension·IRP)이다.

IRP 계좌 도입의 의의
[Retirement Pension] 개인형 퇴직연금, 3단 기어를 장착하다
IRP는 기존 개인퇴직계좌(Indi-vidual Retirement Account·IRA)의 통산 기능을 유지하면서 퇴직급여 일시금을 수령한 자, 확정급여형(DB형)·확정기여형(DC형) 가입자, 자영업자들이 자율적으로 설정하고 기여금을 납부할 수 있는 새로운 퇴직연금을 말한다.

기존 근퇴법에서는 이직 시 퇴직급여 일시금을 일단 근로자에게 지급하고, 그 근로자가 자발적으로 IRA로 옮겨갈 수 있도록 했다. 그러던 것이 개정 근퇴법에서는 무조건 IRP로 옮기고, 필요한 경우 찾아 쓸 수 있도록 했다. 한 기업에서의 평균 근속 기간이 6년이 채 되지 않는 노동 시장의 현실을 감안하면, 평균적으로 5~6년 정도만 지나면 모든 퇴직연금 가입자들이 IRP 계좌를 소유하게 된다. IRP 시대가 도래할 수밖에 없는 기본적인 이유다.

또한 DC형 가입자는 물론 DB형 가입자들도 재직 중에 IRP 계좌를 개설해 추가 납입을 할 수 있게 됐다. 상당수의 근로자들이 직장을 옮기기 전부터 IRP 계좌를 개설할 가능성이 높다. 2008년 미래에셋 퇴직연금연구소에서 퇴직연금 가입자를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앞으로 추가 납입 의사가 있는 근로자가 11.4%에 달했다. 2011년 5월 말 현재 DB형이나 DC형에 가입한 근로자가 264만 명임을 감안하면, 잠재적인 IRP 계좌 개설자는 약 30만 명인 것으로 추정된다. 이는 개인형 IRA 가입자의 약 9배에 달하는 규모다. IRP 시장의 급성장을 예상케 하는 대목이다.

게다가 2017년 7월부터는 자영업자도 IRP를 통해 퇴직연금에 가입할 수 있게 됐다. 이는 그동안 원천적으로 가입이 불가능했던 3층 사회보장제도 중 2층인 퇴직연금의 문호를 자영업자에게 개방하는 것을 의미한다. 2011년 6월 말 현재 우리나라의 자영업자 수는 전체 취업자의 22.9%인 567만 명이나 된다. 보험연구원의 조사에 의하면, 자영업자 중 IRP 가입 의사가 있는 사람은 56.6%나 된다. 이는 약 320만 명의 자영업자들이 잠재적인 IRP 가입자임을 의미한다. IRP 시장의 적용 범위가 확대되는 5년 뒤에는 IRP 시장이 더욱 급속한 성장세를 기록할 것으로 보는 이유다.

IRP의 성장은 DB형에서 DC형으로 이동을 의미

IRP가 퇴직금 중간 정산 요건 설정, DB 및 DC형 가입자에의 추가 납입 허용, 자영업자 가입 허용이라는 3단 기어를 장착함으로써 퇴직연금 시장에도 많은 변화가 예상된다.

우선은 퇴직연금 시장의 속성에 큰 변화를 몰고 올 것으로 보인다. 지금까지의 퇴직연금 시장은 DB형 지향적이라 할 수 있다. 이는 퇴직연금을 통한 은퇴자금 축적이 근로자보다는 사용자 측에 더 많이 좌우됨을 의미한다. 물론 DB형에 가입한 근로자라도 자기 몸값을 올리면 그만큼 DB형에 축적되는 근로자 몫도 올라간다. DB형에 축적되는 근로자 몫은 임금과 근로 기간의 함수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임금은 근로자 개개인의 노력으로 올라가는 부분도 있겠지만, 전반적인 경영 성과에 더 많은 영향을 받는다. 그만큼 임금에 미치는 근로자 개인의 영향력은 약한 것이다.

반면에 DC형의 적립금 규모는 임금과 운용수익률의 함수라 할 수 있다. 운용수익률에 따라 더 많은 적립금을 쌓을 수 있다는 의미다. 운용 성과가 사용자에게 귀속되는 DB형과 달리 DC형의 운용 성과는 근로자에게 귀속되기 때문이다.

IRP의 급속한 성장은 퇴직연금 시장의 중심축이 DB형에서 DC형으로 이동함을 의미한다. 적립금 운용에 대한 책임이 가입자에게 있다는 점에서 IRP와 DC형은 동일한 속성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흔히 DC형을 자조 노력 연금이라 하는 것도 운용책임이 근로자에게 있기 때문이다. IRP가 급속하게 성장하면 퇴직연금 시장의 성과는 자조 노력에 크게 좌우된다. 이런 자조 노력이 내실 있는 성과를 거두기 위해서는 IRP 가입자에 대한 보호책이 필요하다. 사업장 단위로 가입하는 DB형이나 DC형과 달리 IRP는 개인 단위로 가입이 이뤄진다. 이 때문에 IRP 가입자들은 정보의 사각지대에 놓일 위험이 크다. IRP 가입자에 대한 제반 정보를 효율적으로 제공할 수 있는 시스템이 구축돼야 하는 이유다.

둘째는 퇴직연금 시장의 핵심 경쟁력 변화다. 기업과 사업자의 관계가 큰 영향을 미치는 DB·DC형과 달리 IRP에서는 근로자 개개인이 직접 사업자를 선택한다. 그렇다고 기존의 핵심 경쟁력 요소가 단기간에 공중 분해되는 것은 아니다. 당분간은 여전히 시장을 지배하는 강력한 도구로 남겠지만, IRP가 서서히 확산되고 자조 노력에 대한 근로자의 의식이 깨어나면서 자연스레 도태할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이들을 대신할 새로운 경쟁력 요소는 무엇일까. 아무래도 기업과의 관계보다는 가입자 개개인과의 관계가 중요한 역할을 할 것으로 보인다. 사업자와 가입자 개개인과의 관계는 브랜드와 서비스에 좌우될 가능성이 크다. 결국 IRP 시장에서는 신뢰할 만한 브랜드를 구축하고 가입자 개개인에게 설득력 있는 서비스를 제공하는 사업자가 진정한 승자로 남게 될 것이다.

지금까지 퇴직연금이 본궤도를 이탈한 주요 원인

셋째는 IRP가 퇴직연금 자산 배분을 바로잡는 데 크게 기여할 것이라는 점이다. 지난 5년 반 동안 퇴직연금 적립금의 원리금 보장 상품에 대한 편중은 심화돼 왔다. 2011년 6월 말 기준으로는 91.1%의 적립금이 원리금 보장 상품으로 운용되고 있다. 이는 자산 운용이라기보다는 보관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이래서는 퇴직연금 본연의 취지를 살리기가 쉽지 않다. 퇴직연금 본연의 목적은 적립금을 합리적으로 운용해 기업과 근로자가 처한 리스크를 잘 통제하는 데 있기 때문이다. 퇴직연금을 퇴직금에 비해 선진적 제도라고 하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지금까지의 퇴직연금 적립금 운용이 본궤도에서 많이 이탈하게 된 데에는 이유가 있다. 무엇보다도 합리적인 자산 배분을 통해 기업과 근로자가 처한 위험을 헤지하고 기대수익률을 높여야 한다는 퇴직연금 본래의 취지는 망각한 채 고금리를 미끼로 자사의 원리금 보장 상품의 판매에 열을 올린 사업자의 행태를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또한 퇴직 급여는 노후의 경제적 불안을 잠재우는 중요한 수단임에도 불구하고 오직 재직 중 원금의 안전함에만 관심을 갖는, 이른바 ‘퇴직급여 안전신화’에 사로잡힌 가입자들의 단기적 시각도 한몫 단단히 거들었다고 하겠다. 가입자들이 이런 시각을 갖게 된 데에는 제도적 후진성이 자리 잡고 있었다. 기존의 근퇴법에서는 IRA로 적립금을 옮길 때 운용 중인 상품을 일단 현금화한 뒤 이전하도록 했기 때문이다. 이런 제도로는 보다 많은 은퇴자금을 만들기 위해 적립금의 일정 비율을 위험 상품으로 운용하다가는 이직할 때 자칫 큰 손해를 볼 수 있다는 불안 심리를 잠재울 수 없다. 재직 중엔 높은 수익률을 기록하다가도 이직할 때 자본시장의 여건이 악화되면 결국 손해를 보게 된다는 심리적 부담을 가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개정 근퇴법에서는 IRP로의 이전을 의무화하면서 전에 운용하고 있던 상품을 해지하지 않고 그대로 옮겨갈 수 있도록 했다. 이른바 현물이전이다. 이는 이직이 잦아지고 있는 요즘의 노동시장에서 그동안 가져왔던 불안 심리를 잠재우는데 효과적인 수단이 될 것이다.

고금리 원리금 보장 상품에 대한 규제가 강화되고, 금융시장이 요동치는 요즘이야말로 합리적인 자산 배분이 빛을 발할 때다. 투자의 세계에서는 성공적인 자산 운용의 90% 이상은 자산 배분에 좌우된다는 지혜가 있다. IRP로의 현물 이전은 퇴직연금 적립금의 자산 배분을 바로 세우는 데 든든한 디딤돌이 될 것이다.

손성동 미래에셋 퇴직연금연구소 연구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