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은 고도의 정치 행위다.” 19세기 프로이센의 장군이었던 카를 클라우제비츠(Karl Clausewitz)는 <전쟁론>에서 전쟁을 이렇게 간단히 정의했다. 물론 그는 인도주의 차원에서 전쟁을 이야기한 게 아니고, 국가 간의 복잡한 이해관계와 정치적 입장, 때로는 국내의 사회경제적 모순을 해결하는 방책으로써 전쟁을 말한 것이다. 어쨌든 전쟁을 고도의 정치 행위라고 말할 수 있다면 적어도 전쟁은 치밀한 계획으로 진행되는 목적의식적 활동인 게 분명하다.
십자군 원정과 몽골군의 원정은 동서양 문화의 차이를 보여준다. 계약에 기초한 십자군은 분방하고 무질서한 반면 명령에 근거한 몽골군은 조직적이고 일사분란했다. 훗날의 역사는 전자가 더 우월한 구조였음을 보여준다.
십자군 원정과 몽골군의 원정은 동서양 문화의 차이를 보여준다. 계약에 기초한 십자군은 분방하고 무질서한 반면 명령에 근거한 몽골군은 조직적이고 일사분란했다. 훗날의 역사는 전자가 더 우월한 구조였음을 보여준다.
클라우제비츠의 시대는 유럽 대륙이 수십 개의 국민국가로 나뉘어 치열한 다툼을 벌이던 시절이었기에 그런 말을 할 수 있었지만, 실제로 근대 이전에 유럽의 전쟁은 그렇지 않았다. 고도의 정치 행위이기는커녕 대단히 비조직적이고 우발적 사건인 경우도 많았다. 그 한 예가 십자군전쟁이다.

우선 그 배경과 동기를 봐도 그렇다. 서양 역사에서 중세 초반, 즉 로마제국이 무너진 5세기부터 10세기까지의 500년간은 흔히 암흑시대라고 말하지만, 문헌 기록이 많지 않다는 데서 그런 명칭이 붙었을 뿐 실제로 암흑과 야만이 지배한 시대는 아니었다. 오히려 대규모의 정치적 분쟁이 없었고(정치적으로는 분열돼 있었지만 종교적으로는 교회를 중심으로 통합됐던 덕분이다), 안정된 기조에서 사회·경제·문화의 지속적인 발전이 이루어지던 때였다. 이런 발전의 여파로 유럽 세계는 우물 안 개구리 신세에서 벗어나 바깥 세계에 대한 호기심이 팽배해졌다. 이교도가 기독교의 성지인 예루살렘을 점유한 게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닌데 새삼 1095년 교황 우르바누스가 성지를 되찾자고 십자군 원정을 제기한 게 먹힌 이유는 그 때문이다.

게다가 게르만 전통에 따르면 맏아들이 아버지의 지위와 재산을 물려받게 돼 있었으므로 차남 이하의 아들들은 재산도 없을뿐더러 딱히 할 일도 없었다. 그래서 다른 도시의 궁정으로 가서 식객 노릇을 하다가 정 심심하면 게임성 군사 훈련을 하기도 했다(여기서 나온 말이 바로 토너먼트, 즉 마상시합이다). 이 남아도는 물리력이 곧 십자군의 군사력을 이루었다.

교황의 선동으로 시작된 건 사실이지만 교황이나 교회가 십자군을 직접 지휘한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십자군은 처음부터 지리멸렬했다. 예를 들어 은둔자 피에르가 조직해 맨 먼저 출발한 민중 십자군은 병력이 무려 4만 명이나 됐지만 군대라기보다는 도둑떼에 가까웠다. 이들은 엉뚱하게도 예루살렘으로 가기는커녕 헝가리로 쳐들어가 무고한 주민 4000명을 살해했다.

십자군의 무질서와 자유분방함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례는 13세기의 제4차 십자군이다. 3차까지의 십자군원정에서 별다른 성과를 얻지 못하자 초조해진 서유럽의 군주들은 해로를 이용해 이집트를 먼저 정복하기로 결정한다. 그러자면 군대를 수송할 선박들이 필요한데, 그 정도의 많은 배를 보유한 곳은 서유럽에서 베네치아 공화국밖에 없었다. 당시 베네치아는 제노바, 피사 등과 더불어 지중해 무역을 장악하고 있었다. 아무도 예기치 못한 드라마가 벌어진 것은 이때부터다.

1201년 나이가 이미 아흔넷이었던 베네치아의 맹인 도제(doge: 베네치아의 총독을 가리키는 명칭인데, 종신직이지만 세습되지는 않았다는 점에서 왕과 다르다) 엔리코 단돌로(Enrico Dandolo)는 병력 수송비로 8만4000마르크의 돈을 받는 조건으로 서유럽 군주들의 제의를 수락한다. 아울러 그는 원정이 성공할 경우 정복지의 절반을 받는다는 조건으로 50척의 무장 갤리선을 무상으로 제공한다. 말하자면 베네치아는 십자군과 병력 수송 계약을 맺는 동시에 직접 투자도 한 셈이다.

문제는 1년이 지나 1202년 6월 24일 출발 날짜가 됐을 때다. 3만 명 이상이 모일 것이라는 서유럽 군주들의 호언장담과는 달리 원정에 참여하기 위해 베네치아에 모여든 병력은 1만 명도 채 되지 않았다. 따라서 십자군 측은 처음에 약정한 금액을 베네치아 측에 지급할 수 없는 사정이었다.

분노한 단돌로는 십자군을 부두에서 나오지 못하게 하고 식량 공급마저 끊겠다고 으름장을 놓는다. 그래도 빚을 받아내기가 어려워지자 노회한 단돌로는 십자군에 묘한 제안을 한다. 연전에 헝가리에 함락된 베네치아의 도시 차라를 수복해 달라는 것이다. 십자군은 졸지에 빚쟁이 베네치아의 용병이자 해결사가 돼버린다.

해프닝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마침 콘스탄티노플에서 반란을 일으킨 세력이 단돌로에게 십자군의 경비를 대납하겠다면서 비잔티움 제국을 정복해 달라고 주문하자 단돌로는 즉각 환영한다. 묵은 빚도 받아낼 수 있을 뿐 아니라 제국을 손에 넣으면 지중해 무역의 경쟁자인 제노바와 피사를 멀리 따돌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리하여 십자군을 태운 베네치아 함대는 이집트도, 팔레스타인도 아닌 비잔티움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에 쳐들어가 60년 동안 동로마를 지배하게 된다.

예루살렘 근처에는 한 발자국도 딛지 못하고 엉뚱한 곳에서 눈부시게 활약한 제4차 십자군은 역사적으로 십자군원정 중에서도 가장 수치스런 원정이라는 오명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다른 각도에서 보면 제4차 십자군원정은 당시 서유럽 세계의 특징을 가장 잘 보여주는 사건이기도 하다. 제4차 십자군이 구성되고 활동한 경위는 동양 사회에서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과정이었다.

우선 무계획의 절정이다. 3만 명의 병력이 예정됐는데 실제로 모인 병력이 1만 명에 그쳤다는 사실은 원정이 얼마나 주먹구구식으로 계획됐는지 짐작하게 한다. 더구나 그들은 성지 탈환이라는 단일 목적으로 구성됐으면서도 전혀 일사불란한 행동을 보이지 못했다. 헝가리를 공략한 것도, 동방제국을 멸망시킨 것도 애초에 일정표에는 없었다. 그저 되는 대로 행동한 것뿐이다.

베네치아의 처신도 이해하기 어렵다. 베네치아 역시 그리스도교권의 공화국인데도 왜 십자군은 베네치아에 돈을 주기로 하면서 배를 계약해야 했을까. 또 단돌로는 왜 그것을 당연히 여겼을까. 더욱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베네치아에 모인 십자군의 행동이다.

왜 1만 명이나 되는 대규모 병력이면서도 무력으로 도시를 짓밟아버리지 않고 스스로 인질처럼 부두에 갇혀 지냈을까. 약정된 금액을 다 주지는 못했지만 어쨌든 절반 이상이나 지급했는데도 왜 십자군은 이후 명분과 실리를 모두 팽개치고 빚쟁이 베네치아의 요구에 고분고분 따라야 했을까.

동양적 관점에서 보면 그런 군대를 원정군이라 부를 수 있을까 싶을 정도다. 과연 제4차 십자군과 비슷한 시기에 출발한 동양식 원정은 전혀 다르게 진행됐다. 도대체 군사 원정에 무슨 계약이 따르고 돈을 주고받는 절차가 필요하단 말인가. 그냥 황제의 명령만으로 충분하다!

몽골의 서방 원정은 십자군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강력한 규율과 탁월한 스피드를 보여준다. 1235년 몽골제국의 황제 오고타이 칸(窩闊臺)은 유럽 원정을 결정한다. 중앙아시아를 정복한 데 이어 오고타이는 더 서쪽의 ‘땅 끝’까지 가보려 한다. 대칸의 명령이 떨어지자 20만의 몽골 대군은 유목민족 특유의 뛰어난 기동력을 바탕으로 일사불란하게 전진한다.

1236년에 몽골군은 볼가 강 상류의 킵차크를 접수하고 이어서 랴잔, 블라디미르, 로스토프 등 남러시아 일대를 손에 넣는다. 그 다음 중앙아시아 방면으로 방향을 바꿔 카프카스를 정복하고 다시 서쪽으로 가서 우크라이나의 키예프를 공략한다.

좌충우돌이요 무인지경이다. 어디 한 군데 흠잡을 수 없는 완벽한 원정이다. 1241년 오고타이가 예기치 않게 사망하는 바람에 서유럽 세계는 무사했지만(총사령관인 바투는 오고타이의 조카로 제위 계승에 발언권이 있었으므로 급히 철군할 수밖에 없었다), 그때까지 정복한 남러시아에는 킵차크한국이 세워진다.

같은 군사 원정이라 해도 분방한 십자군과 조직적인 몽골군의 차이는 너무도 분명하다. 몽골군은 원정의 목적지가 정해지면 단숨에 달려가 신속히 임무를 완수한 반면, 십자군은 원정 도중에도 걸핏하면 샛길로 빠져들었다. 물론 십자군은 연합군의 성격이었고 몽골군은 단일 국적의 군대였다. 그러나 그 사실만으로 차이를 완전히 설명할 수는 없다. 더 근본적인 차이는 명령으로 출발한 동양식 원정군과 약속으로 출발한 서양식 원정군의 차이다.

강력한 정치적 구심점이 없었던 중세 유럽은 모든 국제적 행동을 군주들 간의 약속으로 집행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고대부터 정치적으로 통합된 역사를 지녀왔던 동양에서는 애초에 ‘국제적 행동’이라는 게 없었고 중앙 권력의 일방적인 명령으로 모든 중대사가 결정됐다. 만약 13세기에 십자군과 몽골군이 맞붙었더라면 승부는 뻔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후의 역사는 약속이라는 느슨한 결정구조가 명령이라는 강력한 결정구조보다 더 힘센 것이었음을 말해준다.

남경태 인문학 저술가 및 번역가 dimeola@empal.com
일러스트·추덕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