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원근 ‘죽염 명가’ 인산가 대표

역사가 오래된 가족기업일수록 혁신에 어려움을 겪는 경우가 많다. 기존의 가치관을 고수하면서 변화를 꾀하는 일이 쉽지 않기 때문이다. 160년 된 죽염 명가 인산가의 5세 경영인인 김원근(37) 대표의 고민과 남다른 도전은 그래서 눈여겨볼 만하다.
[Successor] “5년만에 매출 5배 늘리고 ‘사장님’ 타이틀 달았죠”
‘죽염 명가’ 인산가는 160년의 역사를 자랑한다. 조상 대대로 가내수공업으로 만들어 오던 구운 소금을 독립 운동가이자 한의학자였던 고(故) 인산 김일훈 선생이 의학적 효능을 밝히며 집대성했다. 그의 아들인 김윤세 회장이 1987년 김일훈 선생의 정신을 받들어 기업 인산가를 창업했다. 국내 최초로 죽염 시장을 개척한 것이다. 김원근 대표는 김윤세 회장의 장남으로, 2009년부터 인산가의 공동 대표이자 인산메디컬의 대표이사를 맡아 가족기업을 이끌고 있다.


5대에 걸친 ‘죽염 명가’ 인산가를 세우다
“어릴 적 할아버님과 같이 살았던 경상남도 함양의 저희 집에는 1년 365일 환자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수많은 환자들이 ‘살려 달라’고 읍소하던 모습은 어린 제 눈에도 굉장히 신기한 광경이었습니다.”

김 대표의 할아버지 김일훈 선생은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이자 의학자였는데, 의술이 뛰어나다는 소문을 듣고 전국에서 암, 중풍, 백혈병 등 난치병 중증 환자들이 찾아왔다. 할아버지는 환자들에게 뜸이나 침을 놓고 마늘, 홍화씨, 유황오리와 같은 건강식품을 약으로 처방을 해 주는 경우가 많았다. ‘약소금’으로 불리던 죽염도 그 가운데 하나였다. 천일염을 대나무 통 속에 넣어 구우면 소금의 독성이 제거되는데, 김씨 가문의 선조들은 일찍이 그것을 알았다.

오늘날 우리가 아는 죽염의 원리를 개발한 것은 김일훈 선생이었다. “증조할아버지는 두 번을 구워 사용했던 죽염을 할아버지는 아홉 번을 구웠습니다. 그래야 죽염의 약성이 더 살아난다는 게 할아버지의 통찰이었죠.”

인산의 의술 세계와 죽염의 효능은 당시 불교신문사 기자로 재직 중이었던 아버지 김윤세 회장에 의해 2001년 저서 ‘신약’으로 출간됐다. ‘신약’은 엄청나게 팔려 나가 곧 베스트셀러가 됐다. 죽염이 유명해지면서 집 으로 많은 사람들이 찾아왔다. 김씨 부자는 아프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무료로 죽염을 나눠줬다. 집안은 늘 가난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했다. 결국, 김윤세 회장이 아버지의 호를 따 ‘인산가’를 창업했다. 김일훈 선생의 아버지와 할아버지 역시 한의사로 활동한 기록과 약소금에 대해 연구한 내역이 문헌에 남아 있었고, 가내수공업으로 죽염을 만들었던 것을 정부로부터 인정받아 인산가는 5대에 걸친 죽염 명가가 될 수 있었다. 죽염의 효능을 체험한 소비자들 사이에서 입소문이 나면서 인산가는 문을 연 지 5년 만에 연 매출이 10억 원을 넘어섰다.


김일훈 선생은 김원근 대표가 초등학교
6학년이었던 1992년에 타계하면서 “병원을 하지 마라”는 유언을 남겼다. 김 대표는 “할아버지께서는 ‘의사는 사람을 살릴 수도 있지만 잘못된 판단으로 죽일 수도 있는데, 거기에 따른 고통이 너무 크다’고 늘 말씀하셨다”며 “자기의 병은 자기가 고칠 수 있으면 가장 좋다는 생각을 가지고 계셨기 때문에 먹는 음식의 중요성을 늘 강조하셨다”고 말했다.

김 대표는 할아버지의 유언대로 한의사가 되는 대신 경영학 석사 학위를 따기 위해 독일로 유학을 떠났다. 반드시 가업을 이어야 한다는 부담은 없었지만, 집안 대대로 내려오는 가치나 정신을 후대로 이어가고 싶은 꿈이 마음속에 뭉게뭉게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러던 중 인산가에 비상사태가 벌어졌다. 죽염이 대중적인 인기를 얻으면서 이익에 눈이 멀어 제대로 된 죽염을 만들지 않는 업체들이 우후죽순으로 늘어난 것이다. 시장이 난립하면서 죽염에서 다이옥신이 나오는 파동이 일어 부지불식간에 사업이 휘청했다. 인산가의 죽염에도 다이옥신이 들어 있다는 비난이 쏟아졌다.

“당시 아버님께서는 저희 죽염 제조 과정을 모두 공개하고 2002년 인산가 기업부설연구소인 인산생명과학연구소를 설립해 천일염 속 유해물질을 완벽하게 제거하는 등 재기를 위해 열심히 노력하셨습니다. 저도 아버지에게 힘이 돼 드리고자 독일에서 귀국해 2008년 인산생명과학연구소에 팀장으로 입사했죠.”
[Successor] “5년만에 매출 5배 늘리고 ‘사장님’ 타이틀 달았죠”
한 번 꺾인 매출은 회복이 쉽지 않았다. 오래된 가족기업의 오너와 임원진들은 관습에 젖어 있었다. 내부적으로 혁신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있었지만 경영진들은 그런 충고를 귀 담아 듣지 않았다. 그는 2009년 자신이 신임하던 마케팅 최고경영자(CEO)와 함께 일을 벌여 나가기 시작했다. 먼저, 고객의 입장이 됐을 때 어떤 점이 불편한지를 발견해 개선해 나갔다.

“콜센터를 구축했어요. 회사에 와 보니 고객센터에 16명의 직원이 걸려 오는 전화에 응대하는 일만 하고 있더군요. 전화가 안 오면 일을 안 하는 겁니다. 고객에게 전화를 걸어서 인사하고 친절하게 무엇이 필요한지, 어떤 도움을 줄 수 있는지 먼저 물어야 한다고 생각했죠. 당시 고객들은 배송에도 불만이 많았어요. 어떻게 하면 고객이 상품을 뜯었을 때 기분 좋게 만들 수 있을까를 고민했습니다. 배송사가 바뀐 후 고객의 반응은 훨씬 좋았죠.”

또 회사에서 고추장과 된장은 잘 팔리는 반면 간장은 판매가 되지 않고 있었다. 재고가 많은 간장을 털어 낼 수 있는 법을 고민하던 중 간장을 항아리째 판매하는 아이디어를 냈다. 지리산자락 해발 700m 고지, 오염되지 않은 자연환경에 고객 개인의 이름 라벨을 붙인 간장독을 보관해 주고 고객이 필요할 때마다 500ml, 900ml씩 신선한 간장을 배송해 줬다. 소비자들은 자기만의 간장을 가질 수 있어 만족했고, 회사에는 더 이상 재고가 남지 않아 고민이 해결됐다. 제자리걸음을 하던 연매출이 어느 순간 수직 상승했다. 2008년까지 38억 원을 밑돌던 것이 2009년 70억 원, 2010년 150억 원으로 뛰었다. 2011년에는 200억 원 매출을 달성했다. 김 대표가 인산가에 합류한 지 3년 안에 매출이 5배 늘어난 셈. 그는 “머물러 있으려고 하는 조직에 조그마한 아이디어로 활력을 불어넣었을 뿐”이라며 “오래된 전통 기업에서 젊은 2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이처럼 작은 혁신이 아닐까”라고 말했다.


젊은 2세 경영인, 작은 혁신으로 3년 만에 매출 5배 늘어
기업의 체질을 개선하는 과정에서 창업주인 아버지와의 마찰은 없었을까. 김 대표는 “늘 갈등의 정점에 서 있다”며 “아버지와의 의견 조율이 어려울 때마다 고전 서적을 펼친다”고 말했다.

“대개 창업주와 2세 경영인들의 사고방식은 무척 다릅니다. 반대 의견을 한두 번은 낼 수 있지만 결국 회장님의 뜻에 맞추게 되죠. 현명한 2세들은 아집을 내려놓습니다. 자신의 뜻을 관철시키려 하기 전에 오너, 그리고 오너와 오래 함께 일해 온 임원들은 왜 그런 생각을 하는지 헤아려야 합니다. 그 질문을 자신에게 던지고 답을 찾기 위해 노력하는 편인데, 고전 속에서 지혜를 얻고 있습니다.”

김원근 대표가 생각하는 인산가의 미래 먹을거리는 저염식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유기농 식을 추구하면서 정작 조미료에는 둔감한 편이라는 게 김 대표의 얘기다. 실제 소금, 간장 등 염분 섭취율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보다 높은 편이다. 그는 인산가의 정신처럼 건강한 소금을 만들고, 저염식 문화를 널리 전파해 소비자들이 스스로 건강을 지킬 수 있도록 하고자 한다.

또한 소비자의 눈높이가 높아진 만큼 음식별로 어울리는 맞춤 소금을 개발한다는 계획이다.
“우리는 김치를 담글 때도 생선을 구울 때도 똑같은 천일염을 넣습니다. 고기를 구워 먹을 때 기름기를 제거해 주고 특유의 풍미를 느낄 수 있는 소금, 생선을 구울 때 비린 맛을 없애고 원재료의 맛과 향을 강조해 주는 소금을 개발하고 있습니다. 조금은 ‘헤비(heavy)’한 느낌의 죽염을 보다 트렌디하게 바꿔 나가는 노력을 계속할 거예요.”


이윤경 기자│사진 이승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