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세경 작가는 일명 ‘머리카락 작가’로 통한다. 신체의 일부인 머리카락이 작품의 재료가 된다는 것도 놀랍지만, 그 이중적 속성과 의미를 알고 나면 흥미는 배가된다. 잘려나가고 바닥에 떨어진 머리카락이 완벽한 아름다움이 돼 누군가의 기억과 역사를 재현해내고 있다. 바로 이 작가의 손끝에서.
[ARTIST] 이세경 작가, 시간과 세월의 축적, 머리카락의 승화
이세경 작가는…
1973년생. 성신여대와 동 대학원에서 도예를 전공했으며 독일 쿤스트 아카데미 뮌스터 마이스터슐러 및 아카데미브리프(석사)를 취득했다. 독일 뮌스터 베베르카 파빌리온, 뒤셀도르프 갤러리 슈멜라, 서울 갤러리2, 송은아트스페이스 등에서 여섯 번의 개인전을 했으며 그 외 다수의 그룹전에 참여했다.


어린 시절, 미용실 의자에 앉은 소녀는 거울 앞에서 대성통곡을 하고 있었다. 2cm만 잘라달라고 했는데 야속하게도 미용실 아줌마가 조금 더 잘라버린 탓이다. 돌이켜 생각하면 뭐 그리 큰일이라고 그랬을까 싶은데, 그런 기억이 한두 번이 아닌 걸 보면 소녀에게 머리카락은 애착을 넘어 집착의 대상이 아니었을까 싶다. 매일 바닥에 떨어져 있는 긴 머리카락 때문에 어머니에게 혼이 나면서도 늘 긴 머리를 고수했던 소녀는 그때 짐작이나 했을까. 머리카락이 훗날 자신의 손끝에서 새로운 의미를 부여받고 사람들에게 ‘반전의 매력’으로 남게 될 거란 사실을.

짐작대로 이 소녀는 이세경 작가다. 머리카락을 재료 삼아 완벽한 아름다움에서부터 역사와 전통, 그리고 기억과 회상이라는 지점까지 와 닿는 동안 이 작가의 작품은 머리카락에 대해 이중적 태도를 갖고 있던 수많은 대중의 시선을 바꿔놓았다. 처음 머리카락을 재료로 ‘발견’한 순간 마음에 담았던 생각들이 대중과 교감을 통해 더 많은 의미를 부여받게 된 것이다.
머리카락으로 작업한 작품을 유리 진열장 안에 전시해 마치 박물관에서 유물을 보고 있는 것처럼 느끼도록 하는 것도 이세경 작가가 의도한 바다.
머리카락으로 작업한 작품을 유리 진열장 안에 전시해 마치 박물관에서 유물을 보고 있는 것처럼 느끼도록 하는 것도 이세경 작가가 의도한 바다.
‘Hair on the China Set’ , 2005년,머리카락·도자기 가변 설치
‘Hair on the China Set’ , 2005년,머리카락·도자기 가변 설치
머리카락의 재발견이 이뤄지던 순간

머리카락의 발견은 이랬다. 국내에서 도예를 전공하며 학사와 석사를 마친 이 작가는 독일로 유학을 떠나면서 비로소 진짜 자신의 작업을 시작하게 됐다. 아이러니하게도 몇 년에 걸쳐 전공을 마친 후 ‘왜 굳이 흙으로 작업해야 하나’라는 아주 원초적인 질문과 마주하게 된 다음이었다. 독일에서의 유학 생활은 수업 시간 자체가 곧 작업의 연속이니, 그때부터 고민이 시작됐다. 무엇을 할 것인가. 고민의 화살은 자연스레 자신에게로 향했고, 이 작가로부터 비롯된 여러 시도가 계속됐지만 흥미가 지속되질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문득 자신의 주변에서 매일 발견되는 머리카락에 시선이 꽂혔다. 어린 시절부터 한번도 짧은 머리를 해본 적이 없는 그에게 늘 숙제와도 같았던 머리카락이 재탄생을 준비하는 순간이었다.

“처음엔 드로잉부터 시작했는데, 평면의 종이 위에서 머리카락이 물성(物性)을 잃고 직선이 되고 곡선이 되고 원이 돼가는 것만 봐도 희열이 느껴지더군요. ‘이렇게도 될 수 있구나’라는 재미를 발견하면서 더 흥미로워졌어요. 그다음 숙제는 머리카락이 어떤 오브제와 만났을 때 더 큰 의미를 가질 수 있을까 하는 것이었어요. 고민 끝에 찾은 게 접시였죠. 생각해보세요, 접시 위 머리카락. 누구나 눈을 찡그릴 수밖에 없는 조합이니 그야말로 반전인 거죠. 그래서 더 완벽하게 붙이기로 했어요. 지저분하다는 생각을 전혀 못할 만큼 완벽한 무늬 말입니다.”

사실 이 작가가 머리카락에 주목한 건 그 이중성 때문이었다. 머리카락이 신체의 일부일 때는 아름다움의 상징이자 정성스레 가꿔야 할 대상으로 여겨지지만 바닥에 떨어지면 본인의 것조차도 싫은 더러움의 상징이 돼버린다는 점이 흥미로웠던 것. 그런 점에서 접시라는 오브제에 머리카락으로 문양을 만들어내는 작업은 더 정교해야만 했다. 접시뿐만 아니라 도자 세트나 카펫, 타일, 세면대 등 흔히 우리 일상에서 머리카락을 발견할 수 있는 오브제들도 사용됐는데 그것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실제로 그가 이러한 오브제에 머리카락으로 작업한 문양들은 독일 마이센 자기 문양, 러시아 구성주의의 기하학적 도형, 네덜란드나 포르투갈의 전통 타일 무늬 등을 차용한 것으로, 작품을 유리 진열장 안에 전시해 마치 박물관에서 유물을 보고 있는 것 같은 착각을 느끼게 하는 것도 철저히 의도된 바다. 버려진 머리카락이 유물처럼 인식되는 순간이라니 엄청난 반전이 아닐 수 없다. 그걸 깨달은 관객들의 반응도 마찬가지였을 터.

“처음 독일에서 전시를 했을 때 다들 보고도 믿지 못했어요. 머리카락으로 작업을 한다고 하니 그저 머리카락으로 붓을 만들어 작업하는 정도로만 생각했던 거예요. 제 작품을 처음 보는 분들의 반응은 비슷해요. ‘이게 뭐지? 대단한 의미가 있나 보다’ 했다가 머리카락이 재료라는 설명을 들으면 놀라기도 하고 인상을 찌푸리기도 하고 반응들이 다양하죠. 그렇게 사람들의 인식 변화가 이뤄지는 찰나를 보는 게 너무 즐거워요.”
‘Transfer_Portrai t’ , 2013년, C-print,각75×26cm
‘Transfer_Portrai t’ , 2013년, C-print,각75×26cm
대중 참여 프로젝트, 추억을 재현하다

다만 10년 넘게 살았던 독일의 관객들과 우리나라 관객 사이에는 관점의 차이가 있긴 했다. 독일에서는 머리카락을 그저 순수하게 재료로만 바라봐준 덕분에 작품 판매도 순조로웠지만,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머리카락은 낯설고 어려운 재료로 받아들여졌다. 신기하기는 해도, 머리카락 작품을 소장한다는 것은 또 별개의 문제였던 것. 그러나 최근 송은아트스페이스에서 세 번째 국내 개인전을 마친 이 작가는 국내 관객들 사이에도 시선의 변화가 있음을 느낀다고 했다.

거기에는 최근 전시에서 선보인 신작 ‘리컬렉션(Recollection)’ 프로젝트도 한몫했다. 대중이 직접 프로젝트에 참여하면서 머리카락이 갖고 있는 기억과 회상, 추억과 역사라는 의미를 되새기는 기회가 된 것이다. 일반인 35명이 참여한 이번 프로젝트는 참여자들이 각자에게 소중한 이미지와 머리카락, 그에 관한 스토리와 문구를 이 작가에게 제출하고 이를 바탕으로 그가 개개인의 기억을 머리카락으로 작품화하는 과정을 거쳐 탄생했다.
‘Transfer_IP’, 2012년, 머리카락·파티클보드·에폭시 코팅, 30×40cm
‘Transfer_IP’, 2012년, 머리카락·파티클보드·에폭시 코팅, 30×40cm
인간사가 그러하듯 각각의 이야기는 다양했다. 누군가는 군대 입대를 하면서 어쩔 수 없이 밀어야 했던 하늘색 머리카락을 보내왔고, 또 누군가는 초등학교를 졸업하면서 자른 머리카락을 지금껏 간직해오다가 이야기와 함께 보내오기도 했으며, 누군가는 부모님 앞에서 나이든 모습 보이지 말라며 아내가 뽑아준 흰머리를 보내오기도 했다. 그렇듯 누구나 머리카락에 관한 기억과 추억 하나쯤은 있는 법. 길었거나 짧았거나 혹은 인생의 어느 시기에는 염색을 했거나 나이 들어 희어졌거나, 머리카락은 그 자체로 개인의 역사이자 흔적임을 깨닫게 하는 매개체임을 새삼 느끼게 하는 기회였음이 분명했다.

“그만큼 저는 작업을 하기가 정말 힘이 들었어요. 참여하신 분들이 제게 머리카락을 보내오기까지 정성이 필요한 것도 있지만, 그분들의 소중한 추억과 스토리를 재현하는 작업인 만큼 더욱 숙연해지고 임하는 태도가 달라지더라고요. 이번 프로젝트를 본 분들 중에 참여하고 싶다는 분들이 많아져 앞으로도 대중과 함께하는 프로젝트를 하게 될 것 같아요.”

이 작가가 대중과 함께하는 프로젝트를 생각하게 된 결정적 계기는 지난해 한 중년 여성의 뜻밖의 인사로부터였다.

“처음엔 제 머리카락으로 작업을 시작했다가 나중에는 구입하는 단계에 이르렀는데, 그 후에 많은 사람들이 제게 와서 머리카락에 대한 이야기들을 들려주더라고요. 그런데 어느 날 어떤 중년 여성이 제게 와서 하는 말이 너무 감사하다고 하는 겁니다. 사연을 들어보니 그분이 돌아가신 어머니의 머리카락을 간직해왔는데 그분에겐 늘 가슴 아픈 대상물이었다고 해요. 그러다 제 작품을 보면서 치유가 됐고, 그때부터 슬픔의 대상이 아닌 웃을 수 있는 대상이 됐다며 고맙다는 것이었어요.”
‘Hair on the Carpet’, 2013년, 머리카락·붉은색 카펫, 300×700cm
‘Hair on the Carpet’, 2013년, 머리카락·붉은색 카펫, 300×700cm
머리카락에 담긴 역사, 작품으로 역사가 되다

시대와 지역을 막론하고 머리카락이 갖는 상징성은 비슷하지만, 서양보다는 동양에서의 의미가 분명 남다른 점은 있다. 이 작가가 지난해 선보인 ‘트랜스퍼(Transfer)’ 시리즈 중 금발을 한 인도 여인의 머리카락이 다시 흑발로 물들어가는 과정을 사진으로 보여준 ‘포트레이트(Portrait)’와 카펫 설치 작업이 그 대표적인 예다.

“독일에서 작업을 위해 금발의 인모를 구입해야 했는데, 그때 유럽에서 유통되는 인모의 대부분이 인도에서 수출된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놀랐어요. 인도 여성들이 남편의 건강을 빌거나 아들을 낳게 해달라고 기도하면서 힌두교 사원에 바친 머리카락이 전 세계에 수출되고 있다는 점이 충격적이었죠. 동양에서는 신성시 되고 종교적 의미가 있는 대상이었던 머리카락이 국제화된 자본주의에선 상업주의의 목적으로 변형돼 결국 제 손에 들어온 걸 보면서 막연하지만 다시 동양의 의미로 바꿔봐야겠다고 생각하게 됐던 겁니다. 카펫 설치작업에 그린 문양도 힌두교 여성들이 매일 아침 기도하는 마음으로 흙바닥에 그리는 문양에서 착안했어요. 설치작업을 하면서도 간접적으로나마 그 여인들의 마음을 체험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전 세계적으로는 물론이고 국내에도 머리카락을 작업의 소재로 삼는 작가들이 적지 않다. 그러나 이 작가가 차별화되는 지점이 바로 여기에 있다. 단지 완벽한 아름다움, 반전의 아름다움을 위한 재료로서만이 아닌 시간과 세월이 켜켜이 쌓이면서 만들어낸 기억 혹은 추억의 재현이라는 점에서 그의 작품 역시 그 자체로 역사성을 띠게 되는 것이다.

“사실 제가 언제까지 머리카락으로 작업을 하게 될지는 알 수 없죠. 처음 시작할 때도 이렇게 오래 하게 될 줄 몰랐던 것처럼 말입니다. 머리카락으로 작업하는 분들이 유럽에도 꽤 많이 있고, 국내에도 잠깐씩 선보인 분들이 있지만 저는 저만의 해석으로 접근했던 게 주효했던 것 같아요. 머리카락 속성상 작업하는 과정이 너무 까다롭고 시간이 오래 걸린다는 단점이 있지만, 특히 이번 작업처럼 많은 분과 함께 하고 그 안에서 더 큰 의미를 찾아가면서 에너지를 얻은 것 같습니다.”

이 작가는 오는 9월 초, 광주시립미술관에서 그룹전을 통해 다시 한 번 작품을 선보일 예정이다. 독일에서 귀국한 지 2년 만에 쉴 틈 없이 전시가 이뤄지는 것만 봐도 우리가 지금 그를 주목해야 하는 이유는 충분할 듯하다.


박진영 기자 bluepjy@hankyung.com 사진 서범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