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현실적 풍경화에 많은 관심을 보인 작가 토머스 콜. 그의 작품은 당대 기계 문명에 대한 비판에서 출발했다.
‘타이탄의 술잔’, 1833년, 캔버스에 유채. 49×41cm,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타이탄의 술잔’, 1833년, 캔버스에 유채. 49×41cm,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아무리 봐도 이것은 현실이 아니다. 그림 뒤쪽에는 연이은 산맥과 구름이 하늘을 절반쯤 뒤덮고 앞쪽에는 푸른 평원이 전개되고 있다. 그 평원은 오랜 세월 바다와 맞부딪치면서 해변에 깎아지른 절벽을 만들어냈다. 절벽 아래에는 자그마한 항구 도시가 바다에 면해 있어 대지가 낳은 인간 문명의 초라함을 드러내고 있다. 여기까지는 납득할 수 있지만 그림을 바라보는 이들을 당혹스럽게 만드는 것은 평원과 바위가 만나는 지점에 우뚝 선 거대한 컵 모양의 구조물이다. 그 뒤로 태양이 밤에게 자리를 내주기 위해 대지 위에 불그레한 기운을 남기며 퇴장하는 중이다.

이 그림은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작가인 토머스 콜(Thomas Cole·1801~1848)이 붙인 제목처럼 과연 거인 ‘타이탄의 술잔’일까? 1904년에 발간된 한 경매 도록에는 이것이 스칸디나비아 우주론에 등장하는 세상의 중심에 서 있는 세계수(樹)라는 설명이 붙어 있다. 세계수는 수많은 가지를 뻗어 세상에 생명을 불어넣는다는 전설적인 나무다. 그러나 대체 술잔이랑 나무랑 무슨 유사성이 있단 말인가. 더구나 화가가 이런 개념을 알고 있었다는 증거도 없다.
‘제국의 단계-완성기’, 1836년, 캔버스에 유채, 뉴욕미술관.
‘제국의 단계-완성기’, 1836년, 캔버스에 유채, 뉴욕미술관.
그러나 분명한 것은 거대한 술잔 속의 물이 문명의 근원을 상징한다는 점이다. 컵의 가장자리는 물을 머금고 자라난 나무와 풀들이 무성하고 그 사이사이에는 신전을 비롯한 건축물들이 자리하고 있다. 그 문명을 건설한 이들은 원형의 호수 위에 배를 띄우며 창조주의 혜택을 마음껏 누리고 있다. 그곳은 낙원임에 틀림없다. 그런데 그 잔 속의 물은 갇혀 있는 것이 아니라 대지 위에 마치 폭포수처럼 떨어지고 있다. 세상에 문명의 기운을 불어넣는 영감의 물처럼 말이다. 실제로 그 아래에는 잔 속의 세계로부터 문명의 씨앗을 받은 듯 또 다른 인간 문명이 꽃을 피우고 있다. 작가는 아마도 잔 속의 세계를 서구 문명의 기원인 그리스 로마 문명과 그 무대가 된 지중해를 상징한 것이 아닐까. 그리고 그 아래 꽃을 피우고 있는 새로운 문명을 그로부터 영향을 받은 당대의 문명에서 착안한 것은 아닐까.

그러나 콜은 현재의 문명 세계를 그리 낙관적으로 바라본 것 같지는 않다. 문명의 빛은 이제 구름 저편으로 사라지기 일보직전이다. 새로운 문명 위에는 벌써 어둠이 내려앉았다. 거대한 잔 속의 세계에 밝은 빛이 깃들어 있는 것과 명확하게 비교된다. 그가 살던 시대에 대한 시각적인 경고가 아니고 무엇이랴.

콜은 원래 영국 랭커셔에서 태어났는데 17세 때 가족이 미국 오하이오로 이주하면서 미국 시민이 됐다. 필라델피아의 펜실베이니아 미술학교에서 공부한 후 화가가 된 그는 풍경화에 재능을 보여 부유한 컬렉터들의 후원을 받아 비교적 이른 나이에 1급 화가로 자리 잡는다. 그는 단순한 사실적 풍경화만 그린 것이 아니라 상징성을 담은 초현실적 풍경화에도 많은 관심을 쏟았다. 그는 당대 기계문명에 대해 회의적 입장을 표명했는데 ‘타이탄의 술잔’에는 그러한 콜의 입장이 반영돼 있다.
‘제국의 단계-파괴’, 1836년, 캔버스에 유채, 뉴욕미술관.
‘제국의 단계-파괴’, 1836년, 캔버스에 유채, 뉴욕미술관.
이와 같은 콜의 문명 비판적 태도는 연작 ‘제국의 단계’에서도 뚜렷하게 드러난다. ‘야만기’, ‘전원기’, ‘완성기’, ‘파괴’, ‘황폐’ 등 5점으로 구성된 이 대작은 1833년부터 1836년까지 3년여에 걸쳐 제작된 것으로 여기에는 한창 번영을 구가하던 당대 미국인들의 과도한 발전에 대한 우려와 그 대안으로서 전원주의에 대한 염원이 담겨 있다. ‘야만기’는 울창한 들판에서 사냥에 열중하는 야만인들을 묘사했고, ‘전원기’는 마치 그리스 초기 신화의 세계를 연상케 하는 목가적인 아름다움으로 장식했다. ‘완성기’는 문명이 극치에 다다라 번영을 누리는 모습을 묘사한 것으로 로마제국의 한창 때를 암시한다. ‘파괴’는 외부의 침입으로 도시가 불길에 휩싸여 혼란에 빠진 모습으로 455년 반달족에 의해 자행된 로마의 파괴와 약탈에서 영감을 얻은 것으로 보인다. 마지막 작품인 ‘황폐’는 전성기를 구가하던 문명이 인적이 끊겨 폐허로 변해버린 현실을 달빛 아래 묘사, 적막감을 강조하고 있다. 한창 때 그 위용을 자랑하던 화려한 건축물들은 간데없이 사라지고 주춧돌과 기둥만이 흘러간 옛 시절의 영화(榮華)를 떠올리게 한다.

그래서일까. 1840년에 제작된 ‘건축가의 꿈’은 건축가의 원대한 야망을 찬양하기보다는 그것이 부질없는 꿈이라는 점을 강조하는 것처럼 보인다. 오른쪽 전면에는 그리스 양식의 신전과 돔 양식의 거대한 건물이 보이고 그 뒤에는 유(U)자형 아치를 연이은 구조로 보아 도시에 물을 공급하는 수로로 추정된다. 그 뒤편에는 아랍의 고대 건축과 이집트의 거대한 피라미드가 마치 알프스처럼 우뚝 서있다. 피라미드는 어찌나 높던지 중간에 구름이 걸려 있을 정도다. 이 모든 건축물들 앞에는 배들이 오가고 있어 이 낯선 문명이 강가(또는 바닷가)에서 꽃피우고 있음을 암시한다. 강의 건너편에는 고딕양식의 성당이 마치 하늘을 찌를 듯한 기세로 자리하고 있다. 겹겹이 드리워진 그 건축물들은 인류가 오랜 시간 동안 쌓아올린 문명의 나이테다. 뒤로 갈수록 희미하고 앞으로 올수록 선명한 것은 시간의 경과를 나타낸다.
‘건축가의 꿈’, 1840년, 캔버스에 유채, 136×214cm, 오하이오 톨레도미술관.
‘건축가의 꿈’, 1840년, 캔버스에 유채, 136×214cm, 오하이오 톨레도미술관.
그러나 이 모든 건축물들은 현실이라기보다 화가가 꿈꾸는 허상이다. 그 점은 좌우의 커다란 기둥에 드리워진 커튼이 말해주고 있다. 엄청나게 큰 기둥 위에서 도면을 앞에 놓은 커튼 저편을 바라보는 이는 두말할 것 없이 건축가다. 그는 자칫하면 기둥 아래로 떨어질 것처럼 위태위태한데 이는 그의 꿈이 그만큼 위험천만하고 부질없는 것이라는 점을 암시하는 것이다. 콜의 작품들은 내실을 다지는 데는 무관심한 채 화려하고 웅장한 외양을 가꾸는 데만 여념이 없었던 근대인의 과도한 욕망을 경계하고 부질없는 환상에서 깨어나기를 촉구하는 날카로운 각성의 메스였다.



정석범 한국경제신문 문화전문기자. 프랑스 파리1대학에서 미술사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고려대, 홍익대, 명지대 등에서 강의했고 저서로 ‘어느 미술사가의 낭만적인 유럽문화기행’, ‘아버지의 정원’, ‘유럽예술기행록’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