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COLLECTOR

컬렉터들의 삶을 따라가면 일관되게 ‘운명’이라는 단어와 맞닥뜨리게 된다. 어려웠던 시절, 모험심으로 독일 광부의 길을 택한 순간부터 어쩌면 김희일 관장의 인생도 예정된 수순이었을지 모른다. 예술을 접하기에 더없이 좋았던 유럽의 환경도 그렇지만, 관심을 갖고 본격적으로 공부하고 컬렉션을 하도록 그 모든 과정이 물 흐르듯 자연스레 이뤄졌다.
서독 광부와 예술. 이렇게만 놓고 보면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두 단어지만 김희일 서울 홍산문화 중국도자박물관장의 삶을 통해 보면 이보다 절묘한 조합이 없다. 40년 가까운 그의 컬렉션 스토리를 한마디로 정의하면 ‘일상이 곧 예술이고, 예술이 곧 일상’이었다.

현재 홍산문화 옥기와 중국 도자기가 전시된 서울 홍산문화 중국도자박물관장을 비롯해 갤러리카페 아델라베일리 관장, 한독미술가협회 고문 등 수많은 타이틀을 달고 있는 그이지만, 우리나라는 물론 독일 미술계에 그가 끼친 영향력은 그 이상이다.

그의 삶을 들여다보면 이렇다. 1970년, 당시 28세였던 김 관장은 독일 광부 모집 공고를 보고 자원, 설레는 맘으로 독일행 비행기에 오른다. 3년간의 계약이 끝나자 그는 귀국하지 않고 보쿰대 법대에 진학한다. 독일 노동자들의 자부심과 직업에 귀천이 없는 현실이 법에 기인한다는 것을 알고는 노동법을 공부하고 싶어서였다.

전공은 법이었지만 서양미술사를 부전공하게 된 데는 또 다른 사연이 있다. 독일어 실력을 밑천 삼아 학비를 벌기 위해 한국에서 온 광부들과 간호사들을 상대로 여행업을 하다 보니 제대로 된 가이드 역할을 위해 미술사 공부가 필요했던 것. 공부를 하고 유럽 곳곳을 다니며 예술 작품들을 직접 눈으로 보다 보니 열정은 더해만 갔고 ‘보는 눈’까지 생겨 컬렉션에도 취미를 붙였다. 여행업으로 돈을 벌어 여유가 생기면 그림을 사는 식이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컬렉션이 취미였지만 미술 시장의 엄청난 가능성을 본 그는 본격적으로 컬렉터의 길을 걷게 된다. 당시 17~18세기 미술에 관심이 많았던 그가 우연한 기회에 ‘푸른 눈 소년의 초상화’를 구입한 게 결정적 계기. 알고 보니 디에고 벨라스케스의 귀한 초기 작품이었다.

이 초상화를 산 가격의 60배로 되판 경험을 한 후 미술 시장의 가능성과 매력에 눈을 뜨게 된 것이다. 그 일 이후 그는 본격적인 컬렉션을 시작하며 독일에서 ‘큰손’으로 영향력 있는 인물이 된다. 이후 본격적으로 갤러리를 운영하는가 하면 규모가 큰 출판사를 하며 미술 관련 서적이나 도록을 만드는 등 예술과는 떼려야 뗄 수 없는 삶으로 이어졌다.
옥기도 그렇고 도자기도 그렇고 당시 구입했던 가격과는 비교할 수 없죠. 사실 사람들이 잘 믿지 않을 정도로 좋은 물건들이 많아요. 특히 도자기는 어떤 물건인지가 중요한데 저는 송, 원, 명, 청 등 사대왕조 시대의 도자기를 집중적으로 모았어요.
옥기도 그렇고 도자기도 그렇고 당시 구입했던 가격과는 비교할 수 없죠. 사실 사람들이 잘 믿지 않을 정도로 좋은 물건들이 많아요. 특히 도자기는 어떤 물건인지가 중요한데 저는 송, 원, 명, 청 등 사대왕조 시대의 도자기를 집중적으로 모았어요.
독일 미술계 ‘큰손’에서 작은 개인 박물관장으로

지난 2002년, 고국에서의 미술관 건립이라는 꿈을 안고 그는 독일 생활을 접고 귀국했다. 갤러리아트뱅크를 세우고 오랜 현장 경험과 미술사적 지식을 살려 국내 미술계에서 활동하던 그는 4년 전 지금의 서울 홍산문화 중국도자박물관을 오픈했다. 아직은 국내에서 홍산문화 자체가 생소하고 전문성을 띠는 분야라 일반 관람객보다는 관련 분야를 연구하는 이들이 더 많이 찾고 있지만, 우리 민족의 뿌리와 닿아 있는 홍산문화를 널리 알려야 한다는 사명감은 변함이 없다.

아닌 게 아니라 작은 갤러리들이 즐비한 경운동 골목에 위치한 박물관은 작은 공간에 홍산 옥기 200여 점과 500여 점이 넘는 중국 도자기들이 진열돼 있어, 제대로 빛을 보지 못하고 있는 듯한 안타까움이 들었다. 김 관장은 “30여 점 들어설 공간에 수 백점이 전시돼 있어 사실상 창고 같은 개념”이라며 “전문가들은 한번에 수많은 작품을 볼 수 있어 좋아하지만 빨리 제자리를 찾아주고 싶다”고 했다.
김희일 관장은 주로 송, 원, 명, 청 사대왕조의 도자기를 수집했다.
김희일 관장은 주로 송, 원, 명, 청 사대왕조의 도자기를 수집했다.
현대미술로 시작했는데 지금은 홍산문화와 중국 도자기에 집중하고 계시네요. 어떻게 접하게 됐나요.

“처음엔 유럽의 그림이나 고미술품을 좋아했는데, 제가 한국 사람이라 자연스레 아시아 문화에 관심을 갖게 된 거죠. 그 계기는 이래요. 여행업을 하던 당시에 유럽의 어느 성을 갔는데 한국 도자기가 하나 있는 겁니다. 너무나 반가웠죠.

그 후 유럽에서 한국 도자기를 찾으러 다니면서 중국 도자기에 대해서도 공부하게 됐죠. 왜냐하면 당시 유럽에 있는 아시아권 도자기는 99%가 중국 것이었거든요. 당시 중국 도자기는 그게 없으면 부자 행세를 하지 못할 정도로 유럽 부호들의 기호품이었어요. 역사적으로도 유럽에 오랫동안 수출돼 거래가 상당히 활발했죠.”

홍산문화에 대한 사명감이 남다르신 걸로 아는데, 사실 일반인에겐 생소합니다.

“홍산문화는 중국 만리장성 북동부에 존재했던 신석기 시대의 문화로 내몽골 지역에 해당합니다. 사실 유럽에서 홍산 옥기를 접했을 때 별로 관심이 없었어요. 유럽에서도 그저 신석기 시대의 출토품 정도로만 여기고 특별히 관심 갖는 사람이 없었죠. 그런데 홍산 옥기가 내몽골 지역의 출토품이란 걸 알고는 달라졌어요. 내몽골이면 우리 민족의 근거지이고 그런 점에서 결국 홍산문화는 우리 선조들의 유물인 셈이니까요. 그땐 가치를 알아주는 사람이 없어 미미한 가격에 살 수 있었죠.”

지금의 가치는 어떤가요.

“옥기도 그렇고 도자기도 그렇고 당시 구입했던 가격과는 비교할 수 없죠. 하지만 경제적인 가치 때문이 아니라 너무 좋아서 가지고 있는 거예요. 금액으로는 환산할 수가 없죠. 사실 사람들이 잘 믿지 않을 정도로 좋은 물건들이 많아요. 특히 도자기는 어떤 물건인지가 중요한데 저는 송, 원, 명, 청 등 사대왕조 시대의 도자기를 집중적으로 모았어요.”

독일에서도 갤러리 운영 등 활발한 활동을 하셨는데 귀국하신 이유가 있나요.

“젊은 시절부터 제 나이 60이 되면 한국으로 돌아가 미술관도 하고 컬렉션 작품들로 박물관을 만들어 후세에 남기고 싶다는 생각을 했어요. 스물여덟 살에 독일에 건너가 32년을 살고 정확히 육십이 되던 해에 한국으로 돌아왔죠.”
원나라 시대, 해마이지화문매병.
원나라 시대, 해마이지화문매병.
그래도 그곳 생활을 정리하고 오기가 쉽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누구나 나이 들면 고향에 가고 싶잖아요. 저 역시 그랬어요. 막상 한국에 와보니 쉴 수 있는 여건이 안 돼 갤러리에서 전시 관련 일도 하고, 30여 년 전 제가 독일에서 만들었던 한독미술가협회 일도 하면서 지냈죠. 1980년에 만든 한독미술가협회는 회원이 100여 명 되는데 지금은 세계미술교류협회로 발전해 1년에 한두 번씩 국제 전시를 하고 있어요. 지금은 고문을 맡고 있고요.”

한국 미술계에 기여를 많이 하셨네요.

“그랬죠. 제가 독일에서 갤러리를 할 때 한국 작가들의 작품 전시를 많이 했고 합동전도 하면서 교류의 장으로서 역할을 했죠. 한국 작가들을 데리고 유럽 각국, 러시아까지 전시를 하러 다니기도 했고요. 지금은 김연아 같은 세계적인 선수도 나오는 등 우리나라 사람들의 DNA가 정말 뛰어나다고 생각해요. 거슬러 올라가 보면 6000년 전에 아시아에서 세계 최초로 옥기 등 예술품을 만든 민족이 아니면 그런 DNA가 나올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송나라 시대, 용천요삼족청화화로.
송나라 시대, 용천요삼족청화화로.
지금도 컬렉션을 계속 하고 계신가요.

“지금은 하고 있진 않아요. 그간 컬렉션한 작품들 감상하는 게 일이죠. 홍산 옥기나 도자기뿐만 아니라 현대미술 작품들도 되판 것이 많지만, 지금도 소장하고 있는 작품들이 제법 있거든요.”

최근에 개인 소장품 경매가 열리기도 했었는데, 그런 계획은 없습니까.

“한 3년 전에 중국 사람들이 경매를 요청해 와서 제주도에서 일부 컬렉션을 경매한 적이 있어요. 중국인을 400명 정도 초청해 큰 규모로 했었는데, 중국 사람들이 낙찰 받고도 나중에 딴소리 하는 등 혼란이 있어 결국 성과는 없었죠. 그 후에도 여기저기서 요청은 있는데 따로 하지 않고 있어요. 하지만 언젠가 한번은 해야 하지 않을까 싶은 생각은 하고 있어요.”
명나라 시대, 성화화조문고족배.
명나라 시대, 성화화조문고족배.
청건륭법랑채보상팔각화문호.
청건륭법랑채보상팔각화문호.
미술품 공유의 꿈, 갤러리 카페로 현실화

김 관장의 또 다른 직함은 갤러리 아델라베일리의 관장이다. 서울 홍산문화 중국도자박물관이 대중성이 떨어진다면 레스토랑을 겸하고 있는 아델라베일리는 지극히 대중성을 겨냥해 세워졌다. 북악스카이웨이 초입에 세워진 아델라베일리에는 그의 소장품뿐만 아니라 작가들의 전시 공간도 마련돼 있어 작은 갤러리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갤러리 카페를 내신 이유가 있나요.

“한국에 와서 느낀 게 우리나라 사람들이 교육열은 굉장히 높은데 정서적으로 너무 메말라 있다는 것이었어요. 갤러리를 차려놓으면 뭐해요. 사람들이 박물관이나 갤러리에 다니지 않는데 말이죠. 외국은 아주 작은 도시라고 해도 오페라하우스나 박물관, 미술관 등이 수두룩한데, 우리나라는 서울과 수도권을 제외하고는 거의 없는 게 현실이잖아요. 있다고 해도 사람들이 잘 가지도 않죠. 갤러리 카페를 생각한 건 그래서예요. 사람들이 커피도 마시고 식사도 하면서 미술품을 감상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죠. 운영적인 측면에서도 갤러리만 해서는 타산이 안 맞으니, 현실적인 대안을 찾은 셈이죠. 지금은 오픈한 지 얼마 안됐지만 향후 작은 음악회를 하는 등 이벤트도 계획하고 있어요.”

그럼 제대로 된 박물관의 꿈은 현실적으로 어떻게 되는 건가요.

“2, 3년 안에 만들어야죠. 지금도 준비는 하고 있어요. 앞에서도 말했지만 홍산문화는 상당히 중요하기 때문에 우리가 당연히 소장하고 있어야 하고, 또 우리가 그들의 후손이라는 것을 당당히 알려나가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러려면 본격적으로 전시도 하고, 학생들이 와서 보고 배우도록 해야 해요. 그 일은 바로 제가 할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컬렉션이 관장님 삶에 어떤 의미인가요.

“일이고 취미고 또 인생이죠. 우연히 시작한 일이 본업이 됐고 직업과 동일시됐으니까요. 출판과 같은 다른 일을 하고 있을 때도 결국은 더욱 미술에 빠지게 되는 계기가 됐으니 그냥 제 길이 아니었나 싶어요. 이제는 공적으로 나누는 과정에 있는 것 같아요. 제가 모은 작품들로 박물관을 하겠다는 건 결국 사회에 환원하는 것과 같은 겁니다. 판매나 영업적 이득을 목적으로 하는 게 아니니까요. 제가 죽기 전에 박물관을 제대로 잘 정립시키는 게 지금의 제 목표입니다.”



박진영 기자 bluepjy@kbizweek.com
사진 이승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