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자 컬렉터 셜리 천 (주)샤뽀 디자인실장

셜리 천 (주)샤뽀 디자인실장은 아시아인으로는 최초로 프랑스 파리에서 모자 디자인을 전공한 모디스트(modiste·모자 제작인)다. 프랑스와 영국 유학에서 시작된 모자에 대한 관심은 한국의 전통 모자로까지 이어졌다. 최근 그녀는 그동안의 컬렉션을 모아 모자 박물관을 열었다. 전주 모자 박물관에서 그녀를 만났다.
[The Collector] 힘과 권위의 상징에서 패션의 대명사가 된 모자 변천사
프랑스어로 ‘모자’를 뜻하는 샤뽀는 디자이너 패션 모자를 만드는 업체다. 2002년 대표 브랜드 ‘루이엘(luielle)’을 시작으로 모디스트, 그랑블루,섬 등의 브랜드를 론칭했다. 지금까지 선보인 디자인만 1000여 종에 이른다. 대표 브랜드 루이엘은 독특한 디자인과 100% 국내 수작업으로 국내뿐 아니라 해외서도 마니아층이 형성돼 있다.

셜리 천 (주)샤뽀 디자인실장은 남편인 조현종 사장과 함께 (주)샤뽀를 만들고, 디자인을 총괄하고 있다. 국내 모자업계에서 대모로 통하는 그녀는 아시아인으로는 최초로 프랑스 파리 모자학교를 졸업했고, 국내 모자업체에서 오랫동안 디자인실장으로 일했다. 최근 그녀는 고향인 전주에 모자 박물관을 짓고, 모자의 아름다움을 알리는 데 소매를 걷어붙였다.

프랑스 유학시절 시작된 모자 컬렉션

모자 박물관 2층에 마련된 전시장에 들어서자 최근 복원한 한국의 전통 갓과 관 등이 눈에 들어왔다. 그녀는 서울의 한 대학과 오랫동안 연구한 결과 최근에 복원한 것들이라고 설명했다. 모퉁이를 돌아서자 이번에는 패랭이와 오래된 갓, 그리고 갓을 보관하던 함이 전시돼 있었다.

“갓통은 제가 가장 아끼는 컬렉션 중 하나예요. 서울 인사동 고가구점에서 우연히 찾았는데, 조르다시피 해서 받아냈죠. 대나무와 한지로 만든 건데, 정말 대단하지 않아요. 갓도 아니고 갓을 보관하는 통까지 만든 걸 보면, 우리 선조들이 모자를 얼마나 소중하게 생각했는지 알 수 있어요.

실제로 조선시대에는 남자들이 갓에 대한 사치가 심해서 나라에서 절제를 명령한 적도 있거든요. 그때만 해도 모자는 권위와 힘의 상징이자, 신분을 나타내는 수단이었어요.”

최근까지 그녀는 한국 전통의 모자를 연구해왔다. 한국 전통의 모자를 모으기 시작한 것은 모자를 연구하면서부터였다. 제주도에서 비올 때 쓰던 방립이며, 오래된 갓 등은 모두 그때 모은 것들이다. 아쉬운 점은 점점 갓을 구하기 어렵다는 점. 그녀는 전통 갓을 만드는 장인이 세 명밖에 없다는 사실이 서글프다고 했다.

“사실 제 모자 컬렉션은 프랑스 유학시절부터 시작한 거라, 유럽의 모자가 많아요. 프랑스로 유학을 떠난 게 1989년인데, 그때까지만 해도 모자와 인연이 닿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어요.

처음엔 불문학을 공부할 예정이었는데, 우연찮게 미싱을 다루게 됐어요. 제 손으로 옷도 만들고 가방도 만들면서 창조에 눈뜨게 됐어요. 그게 결국은 모자학교까지 이어진 거죠.”

유학 초기 얼마간 낮에는 소르본대에서 불문학을, 저녁에는 모자학교에서 청강을 했다. 그러다 아예 불문학 공부를 접고 모자학교에 적을 두었다. 프랑스 모자학교 시절 그녀는 유독 19세기 유럽에서 유행한, 깃털과 베일을 재료로 만든 모자를 좋아했다. 당시의 경험이 지금도 모자 디자인에 많은 영감을 준다.

1993년 모자학교를 나온 그녀는 그해, 국내 대표적인 모자 업체의 디자인실을 맡게 됐다. 하지만 유럽 스타일에 기반한 그녀의 디자인이 번번이 소비자들의 외면을 당했다. 데리고 있던 디자이너들의 모자가 인기를 끌면서 스트레스를 받기도 했다.

어느 때보다 고민이 깊던 그 시절, 그녀는 “모자는 진열장에 있을 때가 아니라 사람의 머리 위에 있을 때가 진짜 가치가 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다. 그때부터 그녀는 한국인이 선호하는 모자, 한국인에게 어울리는 모자 디자인을 연구했다. 이런 과정을 통해 그녀는 ‘소비자를 너무 앞서가도 안 된다’는 깨우침도 얻었다.

“제가 디자인한 작품은 1, 2년 후가 되면 팔리더라고요. 그래서 반 발짝만 앞서 가자고 생각한 거죠. 지금도 디자이너들한테 그 점을 강조합니다. 그래야 소비자가 따라올 수 있거든요. 루이엘은 이런 시행착오를 거쳐 탄생한 브랜드예요. 루이엘의 모토가 ‘쓸 수 있으면서 아름다운 모자’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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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십만 원에서 수천만 원을 호가하는 모자 컬렉션

이야기가 잠시 끊어진 틈을 비집고 진열장의 영국 왕실 근위병 모자가 눈에 들어왔다. 그 옆으로는 베이브 루스 시절에나 썼을 법한 오래된 야구모자가 진열돼 있었다. 시선이 모자에 머물자 그녀의 설명이 이어졌다.

“근위병 모자는 2004년 영국 런던에 연수 갔을 때 벼룩시장에서 산 거예요. 100년도 더 된 제품이라는데, 멋지죠. 야구모자는 고미술품점에서 빼앗다시피 컬렉션한 거고요. 대부분의 컬렉션은 프랑스와 영국의 벼룩시장에서 산 것들이에요. 제가 만든 것 중에서 팔기 아까워서 모아둔 것도 많아요.”

대표적인 것이 ‘갈채’라고 이름 붙인 작품이다. 매월 탄생석(다이아몬드가 탄생석인 4월은 제외)을 재료로 12개 세트로 제작된 이 작품은 원단부터 손수 만들었기 때문에 제작 기간만 6개월이 걸렸다.

첫 작품은 1800만 원에 팔렸고, 지금 전시된 것은 다음에 만든 작품이다. 개인적으로 의미가 있어 애착이 가는 작품은 ‘마이 소잉 머신(My Sewing-Machine)’. 미싱 모양의 이 작품은 사람이 아닌 미싱을 위해 만든 작품이다.

가격은 180만 원 정도지만 미싱에 대한 그녀의 오마주를 표현해 애정이 가는 작품이다. 모자는 햇빛을 가리는 도구이기도 하지만 아름다움을 완성하는 패션소품으로서의 역할도 크다. ‘마이 소잉 머신’은 그런 면에서 미적인 가치에 많은 무게를 두고 제작한 작품이다.

“제가 털 장식을 좋아하는데, 이건 닭털이에요. 한국은 모자에 꿩털만 썼지만 유럽은 닭털, 오리털 등 다양한 털을 소재로 활용했거든요. 그걸 염색하고 가공해서 뛰어난 장식품으로 활용한 거죠.”

올 가을 샤뽀는 삼청동에 또 다른 숍을 오픈한다. 그녀는 오픈을 기념해 미싱을 주제로 한 작품을 선보일 예정이다. 12월에는 ‘달과 나비’를 주제로 컬렉션을 선보일 예정이다.


모자에 대해 알고 싶은 몇 가지

톱 해트(Top Hat)

토퍼(Topper), 실크 해트(Silk hat), 침니포트(Chimneypots). 모두 톱 해트의 다른 이름이다. 18세기 후반 프랑스에서 톱 해트가 처음 등장했을 때, ‘이상한 구조물’이라는 반감을 샀지만 19세기가 되자 신사들의 상징이 됐다.

초기 톱 해트는 바비(담비)털로 만들어졌으나 지금은 펠트로 만든다. 톱 해트 중 파리에서는‘샤포 클랙(Chapeaux claque)’라는 톱 해트가 유행했는데, 경쾌하고 날렵한 소리 ‘클랙’과 함께 크라운이 튀어나오는 모자였다.

페도라(Fedo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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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절모라고 총칭되는 이 모자는 영원한 남성의 상징이다. 남성성의 상징인 이 모자는 아이러니하게도 1882년 파리에서 공연된 빅토리안 사르두의 연극에서 여주인공이 처음 쓰고 나왔다.

더비(Derby)

보어(Bower), 멜론(Melon). 모두 더비의 다른 이름이다. 19~20세기를 걸쳐 톱 해트가 상류 젠틀맨의 상징이었다면 더비는 중산층을 대표했다. 1850년 런던의 모자상이 윌리엄 보어(William Bower)라는 손님으로부터 요청받아 만든 것이 효시다. 처음에는 시골의 사냥꾼들이 머리를 보호하기 위해 딱딱하고 달리는 말에서 낮은 나뭇가지에 걸리지 않도록 고안했다.

베레(Beret)

남녀노소 구분 없이 쓰는 베레의 효시인 ‘바스크 베레(Basque Beret)’는 피레네 산맥의 바스크 지방 사람들에 의해 양의 털을 축융해 납작하게 만든 것이 시초이며, 당시는 곤색 또는 붉은색으로 만들었다. 이후 모험가, 군인, 여행가, 어부, 화가들의 모자가 됐다.

보닛(Bonnet)

하트 모양의 커다란 크라운과 끈으로 묶어 고정하며 챙이 높이 들려있어 햇빛을 가리기보다 모양새에 치중한 모자다. <피아노>, <엠마>, <순수의 시대>, <제인 에어> 등 18, 19세기를 배경으로 한 영화에 긴 드레스와 매치돼 자주 등장한다.

캐플린(Capeline)

둥글고 딱 맞는 머리산과 물결치는 듯한 넓은 챙을 가진 모자. 여름에는 주로 밀집, 라피아, 파나마 등의 천연소재를, 겨울에는 펠트를 이용해 만들며 야외용으로 애용된다.

클로슈(Cloche)

깊고 둥근 산 모양으로 약간 좁은 듯해 머리에 꼭 맞으면서 이마, 눈까지 깊게 내려쓰는 게 특징이다. 해트류의 기본형으로 이름처럼 ‘종’ 모양을 하고 있으며 특히 1920년대 유행하던 복고 스타일의 대표 격이다.

글 신규섭·사진 이승재 기자 wawo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