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화랑가에는 빈티지 가구 전시회 소식이 자주 들린다. 대부분 무료 관람인 그림 전시회와 달리 아르데코 컬렉션 같은 빈티지 가구 전시회는 유료 입장인 경우가 많다.

유료 전시회뿐 아니라 옥션에서도 빈티지 가구 경매가 성황이라고 한다. 레스토랑, 카페, 화랑 등에서 유명 디자이너들의 빈티지 가구가 각광받은 것은 제법 오래된 이야기다.

화랑가를 중심으로 작은 파장을 일으키고 있는 빈티지 가구에는 자주 쓰는 용어들이 있다. 모던 가구, 20세기 중반 가구(Mid 20th century Furniture), 스칸디나비안, 대니시, 레트로, 임스 스타일 등이 빈티지 가구를 말할 때 자주 쓰는 용어다.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면 바우하우스(Bauhaus), 아르데코(Art Deco)까지 포함한다. 이런 가구들은 수십 년 전부터 유럽이나 미국에서 그림이나 사진처럼 인기를 누려왔다.
1. 데스틸파의 리트펠트가 만든 적청의자. 몬드리안의 그림을 연상시키는 오브제로 의자이면서 전시용 작품이 된다. 2. 오스트리아 가구 장인이었던 미하일 토넷의 벽장식 캐비닛
1. 데스틸파의 리트펠트가 만든 적청의자. 몬드리안의 그림을 연상시키는 오브제로 의자이면서 전시용 작품이 된다. 2. 오스트리아 가구 장인이었던 미하일 토넷의 벽장식 캐비닛
런던, 1851년 하이드 파크의 전시회 (Great Exhibition)로부터

크리스털 팰리스(the Crystal Palace)는 조지프 팩스턴(Joseph Paxton)에 의해 강철과 유리로만 지어졌다. 공장에서 제조된 판유리와 강철 목재들을 현장에서 조립한 길이 1850피트의 건물이 불과 6개월 만에 전모를 드러냈을 때 그 아름다움은 사람들의 혼을 빼앗아가기에 충분했다.

“신이 계시는 창공 저편에서, 신의 평화로운 햇빛은 넘쳐흐르네.”

시인 W. M. 새커리(W. M. Thakerray)는 크리스털 팰리스를 보고 이렇게 노래했다. 비스마르크의 오른팔인 L. 뷔허(L. Bucher)는 “그 장관이 비길 데 없는 요정 같다는 표현으로는 충분치 않다. 그것은 한낮의 눈부신 빛 속에서 보는 ‘한여름밤의 꿈’이다”라고 찬탄했다.

당시 프로이센 정부는 ‘무테지우스(Muthesius)’를 6년 동안 영국에 파견했다. 독일 디자인의 미래가 결정되는 순간이었다. 훗날 귀국한 무테지우스는 독일공작연맹(werkbund)과 바우하우스 탄생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런데 이 전시회에 대해서는 상반된 시선도 존재했다. 부정적 시선의 선두에는 존 러스킨(John Ruskin)이 있다. 당대 최고의 문화평론가인 러스킨은 기계로 인해 인간은 불행해질 것이라는 시각을 갖고 있었다.
3. 파리 아르데코 디자이너 앙드레 그루의 사이드 체어로 분리주의의 색조를 엿볼 수 있다. 4. 르 코르뷔지에가 제작한 의자로 현재도 제작돼 팔린다.
3. 파리 아르데코 디자이너 앙드레 그루의 사이드 체어로 분리주의의 색조를 엿볼 수 있다. 4. 르 코르뷔지에가 제작한 의자로 현재도 제작돼 팔린다.
러스킨의 생각에 동조하는 기계증오 그룹의 대표적 인물로 윌리엄 모리스(William Morris)가 있다. 18세기 산업혁명으로 인해 사회 전 분야가 변하고 공업과 기계생산에 의해 제품들은 대량 생산됐다.

모리스는 기계 만능주의가 결국 생활 속의 전통적인 미를 파괴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 일환으로 그는 옷감, 가구, 인쇄 등 응용미술의 여러 분야에서 수공업이 지니는 아름다움을 회복시키고자 하는 미술공예운동을 촉발시켰다.

이로부터 시작된 미술공예운동은 예술 활동에서의 중요한 부분과 19세기 후반의 사회주의적 사고를 지배했으며 유럽과 미국 전역에 걸쳐서 장식예술(art of decorative)에 대한 새로운 이해의 출발점이 되기도 했다.

형태와 모양은 단순하고 평범하며 선적이거나 유기적인 형태로 제작됐다. 양식의 가장 순수한 형태라는 측면에서 볼 때 장식은 제작과정에서 주어진 것이다. 자연의 식물, 새, 동물의 형태들은 강력한 영감의 원천이며 대가 모리스는 직물·벽지 디자인에서 나타나고 있는 본질적으로 평평하고 이차원적이며 양식화된 패턴에 형태를 사용했다.

모리스는 공예를 수준 높은 예술로 여기고 사회개혁운동을 전개시켰으며 이후 독일공작연맹이나 바우하우스의 조형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는 점은 눈여겨볼 가치가 있다.

요즘 명품으로 추앙받는 브랜드들이 대부분 수공예에서 시작됐다는 사실을 내세우고 있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그들은 디자인이라고도 하지만 수공예라고도 한다. 이제 두 가지 상반된 시각이 21세기에 융합이라는 과정을 거쳐 매력적인 결정체로 바뀌는 과정 또한 흥미롭다.
5. 최고의 차 부가티 제작자의 부친이자 가구 디자이너였던 부가티의 파이어 스크린. 모로코를 모티브로 작업했다. 6. 비엔나 공방의 호프만 의자로 매킨토시의 영향을 받았다. 7. 매킨토시의 사다리 의자
5. 최고의 차 부가티 제작자의 부친이자 가구 디자이너였던 부가티의 파이어 스크린. 모로코를 모티브로 작업했다. 6. 비엔나 공방의 호프만 의자로 매킨토시의 영향을 받았다. 7. 매킨토시의 사다리 의자
아름다운 디자이너 분리파 매킨토시

찰스 레니 매킨토시(Charles Rennie Mackintosh)는 스코틀랜드 글래스고에서 태어났다. 글래스고의 미술학교에 다녔으며, 재학 중에 맥도널드 자매(언니인 마거리트와 1900년에 결혼), 맥네어 등과 4인조를 결성해 건축디자인에 식물을 모티브로 한 곡선양식을 개척했다.

이것은 본국인 영국보다 유럽 대륙에서 더 환영을 받았다. 특히 비엔나 분리운동과 호응해 근대 건축의 선구적 역할을 했다. 그가 100년 전에 디자인한 의자들은 지금도 전 세계 수많은 레스토랑에서 실제로 사용되고 있을 뿐 아니라 인테리어 소품으로 벽에 장식되거나 그림으로 그려져 판매되고 있다. 매킨토시는 미래적인 디자이너였지만 칩거 후 수채화가로서 조용히 생을 마감했다.

분리파(Secession)와 바우하우스
[김재규의 앤티크 살롱] 건축의 거장들이 남긴 빈티지 가구들
“Der Zeit ihre Kunst, Der Kunst ihre Freiheit (그 시대에는 그 시대의 예술을, 예술에는 자유를).”

아르누보(Nouveau) 전성기에 독일어권 오스트리아에서는 건축이나 가구 디자인에 합리적인 사고방식을 도입하는 실험이 진행되고 있었다. 오스트리아 건축가인 요세프 호프만(Joseph Hoffman)은 1897년 비엔나에서 분리파 운동을 주도하고 1903년에는 ‘비엔나 공방’을 설립한다.

비엔나 공방은 직선을 주조로 한 수평과 수직에 의한 단순한 기하학적 구성의 인테리어와 가구의 제작 생산을 꾀했다. 2O세기 모던 디자인의 과제는 형태의 기능성, 구조의 단순성, 작품의 양산화 등 세 가지로 요약된다. 이와 같은 과제를 적극적으로 추구한 것은 l907년 독일 쾰른에서 결성된 ‘독일공작연맹’이다.

여기서는 가구의 양산화를 위한 규격화를 연구하고 월터 그로피우스(Walter Gropius)가 이를 계승했다. 그는 1919년 바우하우스를 설립하고 재료 연구와 합리적인 조형 연구를 통해 기능주의(functionalism)라는 모던 디자인의 이론을 확립하기에 이른다.

이곳에서는 오늘날까지도 인기를 끌고 있는 마르셀 브로이어(Marcel Breuer)의 강관의자(鋼管椅子), 조립가구, 성형합판 가구나 L. 미스 반 데어 로에(L. Mies Van der Rolle)의 바르셀로나 체어, 그리고 그로피우스의 유니트 가구 등 훌륭한 작품들이 출현했다.
[김재규의 앤티크 살롱] 건축의 거장들이 남긴 빈티지 가구들
네델란드 로테르담에서는 데스틸파의 G. T. 리트펠트(G. T. Rietveld)가 수평과 수직의 부재와 원색을 사용해 입체파 이론에 근거한 추상적인 가구인 적청(赤靑)의자를 제작한다. 그는 장부맞춤이라고 하는 과거의 접합법을 거부하고 볼트와 너트에 의한 접합을 채용해 가구 양산의 규격화를 도모했다. 1917년에 제작된 그의 ‘적청의자’는 모던 디자인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다.

또 한 명의 거장, 프랑스의 르 코르뷔지에(Le Corbusier)는 ‘집에 비치하는 도구’를 의미하는 ‘가구(mobilier)’ 라는 개념을 부정하고 대신에 ‘장비(equipment)’라는 말을 사용한다. 그는 가구를 실내 공간 구성의 설비 요소로 생각해 유니트 구성의 가구 디자인을 전개했다.

당시 건축가이며 화가인 예술가들은 장르에 얽매이지 않고 다양한 혁신을 이루고자 했다. 르 코르뷔지에를 필두로 많은 건축가들이 가구 디자인에 혼신의 힘을 쏟았다.

<건축십서>의 저자로 유명한 로마시대의 비루리비우스는 건축가의 교양이라는 17개 항목에서 천문학, 철학, 역사, 음악, 문학 등 교양을 갖추어야 한다고 했다. 과연 그러하다. 건축가는 디자이너이자 최고의 인문학자이자 철학자라는 사실은 이 시대가 낳은 별 같은 건축가들을 통해 알 수 있다. 그들이 남긴 가구들은 오늘도 빛을 발하고 있다.


[김재규의 앤티크 살롱] 건축의 거장들이 남긴 빈티지 가구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