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상화의 대가 하종현 & 서양화가 박승범

하종현은 이우환, 박서보 등과 함께 한국 추상미술계를 대표하는 원로 작가다. 미협 이사장과 홍대 미대 학장을 지낸 작가는 서울시립미술관장을 마지막으로 공직을 떠나 현재 작품 활동에 매진하고 있다. 사제지간으로 만나 지척에서 살가운 정을 나누는 작가 박승범이 더위를 피해 그의 집을 찾았다.
하종현 홍익대 미대 명예교수(왼쪽)와 고양시 원로 작가회 박승범 회장
하종현 홍익대 미대 명예교수(왼쪽)와 고양시 원로 작가회 박승범 회장
하종현 화백의 집은 경기도 일산 끝자락에 있다. 아파트촌을 헤치고 찾아간 그의 집은 한 울타리 안에 네 동의 창고가 함께 있었다. 두 동은 전시장으로, 나머지 두 동은 각각 작업실과 수장고로 쓰고 있었다. 네 동의 창고는 이를테면 작가 하종현의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을 한데 담고 있는 특별한 공간인 셈이다.

거실에서 담소를 나누는 사이 약속한 박승범 선생이 모습을 드러냈다. 잠시 후에는 그의 아내와 노(老)화백의 아내도 합석했다. 두 내외가 이렇게 자주 만난다고 했다. 며칠 전에는 부부동반으로 여행을 다녀왔노라고 했다.
[Friends] “스승에게 배운 건 그림이 아닌 진실한 작가로서의 삶”
미대생과 강사로 만나 46년을 이어온 사제지정

박승범(이하 박) : 저로선 선생님과 함께 하는 이런 자리가 영광이죠. 벌써 선생님을 모신 지 45년이 됐네요. 1964년 제가 홍대 미대에 들어가면서 뵈었으니까요. 그때 선생님께서 미대 강사로 계셨거든요.

하종현(이하 하) : 스승과 제자라지만 나이 차이는 크게 안 납니다. 제가 33세에 최연소 강사가 됐으니까요. 대학원 다니다 전임이 됐어요. 남들보다 조금씩 빨랐죠.

박 : 그때도 선생님은 무척 선구적이 작가셨어요. 한국 아방가르드협회(이하 AG) 창립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셨죠.

하 : AG는 젊은 작가들뿐 아니라 오광수, 김인환 등 평론가들도 대거 참여했었어요. 당시만 해도 현대미술이 일반인에게는 낯선 존재여서, 현대미술에 계몽적인 역할도 담당했던 미술 운동의 하나였습니다.

박 : 저도 AG에 참여하고 싶었지만 입대를 하면서 참여할 기회가 없었습니다. 당시 AG의 작품을 보면 전위적인 작품들이 많았습니다.

하 : 이 친구가 제법 그림을 잘 그렸어요. 학교 다니면서 상도 받고 그랬지. 그때는 학생이나 선생이나 가족처럼 지냈어요.

박 : 아마 홍대 캠퍼스가 작아서 그랬을 겁니다. 미대라도 1학년에서 4학년까지 다 알았으니까요. 누구네 집에 숟가락이 몇 갠지도 알던 시절이었으니까요. 그땐 학생도 선생들도 다들 열심히 그림을 그렸어요. 서울대 미대가 아카데믹한 경향이 있었다면, 홍대는 선생님 같은 분의 영향으로 전위적인 작업들을 많이 했어요.

[Friends] “스승에게 배운 건 그림이 아닌 진실한 작가로서의 삶”
순수와 열정만으로 그림을 그렸던 젊은 시절


하 : 내가 학교를 다닐 때는 홍대 실기실이 우미관 근처에 있었거든. 점심 때 거기서 막걸리 한 잔 하고는 밤새 그림을 그렸어요. 괴짜들도 참 많았는데, 요즘은 그런 학생들이 별로 없어요. 요즘 미대생들은 너무 세련됐다고나 할까. 분칠부터 하려고 들고, 손재주만 너무 부리는 거 같아요. 유행에는 민감한데 개성이 없어.

박 : 그렇죠, 선생님. 저희가 학교를 다니던 1960년대 말만 해도 작업실에서 밤새는 게 예사였는데요. 술도 많이 마셨어요. 선생님은 강사 중에서도 학생들에게 유독 술을 잘 사주시는 분이셨죠.

하 : 요즘 작가들은 상을 받으면 자기가 최고인줄 알아. 그럼 작가로서는 끝이야. 그런 작가한테 상은 약이 아니라 독인 겁니다. 청탁도 받아가면서 적당히 작업하는 거지. 저는 젊었을 때도 단 한 번도 청탁받고 작업한 적이 없어요.

박 : 지금 생각하면 선생님한테 그림을 배웠다기보다는 작가로서 살아가는 방식을 배운 것 같습니다.

하 : 이상하게 들릴지는 모르지만, 사실 미술은 너무 가르치려 들면 안돼요. 개성을 잃어버릴 수 있거든. 모든 조건이 갖춰져야 작업을 할 수 있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선생의 역할은 제자가 큰길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이끌기만 하면 되는 거죠.

박 : 선생님이 저희한테 그런 존재였어요. 구상화는 테크닉이 중요하지만, 추상화는 가르치는 데 한계가 있거든요. 거기서 필요한 게 작가정신인데, 선생님께 그 작가정신을 배운 거죠.

하 : 어쩌면 학생은 안 가르치는 게 맞는지도 몰라. 이렇게 얘기하면 너무 공으로 먹고 산 것 같은데.(웃음)
[Friends] “스승에게 배운 건 그림이 아닌 진실한 작가로서의 삶”
아방가르드에서 민중 미술로, 다시 접합 시리즈로

박 : 예나 지금이나 저는 선생님이 작업하시는 모습을 좋아합니다. 1980, 90년대 걸개그림이 대중적으로 유행하면서 민중 미술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잖아요. 그런데 선생님은 이미 1970년대, 민중 미술이 태동하기 전부터 그런 작업을 하셨거든요. 저는 하 선생님 같은 분이 진정한 민중 작가라는 생각이 들어요.

하 : 1970년대에는 철조망을 재료로 작품을 제법 많이 했어요. 철조망이란 게 창살을 의미하잖아요. 당시 답답하던 시대상을 간접적으로 표현한 거죠. 제가 임옥상 같은 친구들한테 그래요. “내가 너희들보다 민중 미술을 먼저 했다”고요.(웃음)

박 : ‘접합’ 시리즈는 그 후에 나온 거죠.

하 : 그렇지. 기하학적인 추상, 다음이 철조망 같은 작업, 그 다음이 ‘접합’이었으니까. ‘접합’ 시리즈는 아방가르드 미술 운동의 소산인 셈이었습니다. 아방가르드 미술을 하며 갖은 시도를 다 해봤어요. 그러다 캔버스 배면에서 물감을 앞쪽으로 밀어내는 ‘접합’ 시리즈를 하게 된 거죠. ‘접합’ 시리즈를 시작한 게 벌써 35년이 됐네요.

박 : 모든 회화는 캔버스 앞면에 그림을 그립니다. 그런 걸 선생님께서 뒤엎으신 거죠. 모든 작가들의 상식을 완전히 뒤엎은 거예요.

하 : 내가 원래 반골기질이 다분하거든.(웃음) 제 인생을 돌아보면 세 개의 방향으로 흘러온 거 같습니다. 하나는 AG 회원이나 미협 이사장으로서 일한 미술 운동, 또 하나는 가르치는 일, 그리고 마지막이 작가로서의 삶입니다.

홍대에서 참 오래도 있었습니다. 스무 살에 홍대에 들어가 조교, 강사, 교수, 나중에는 미대 학장으로 정년퇴임을 했으니까요. 중간에 3년을 빼고는 거의 홍대에 적을 두고 있었네요.

박 : 일산 호수공원 근처 살림집과 작업실은 그때 마련하신 거죠. 그전까지는 셋방살이를 전전하셨잖아요.

하 : 그랬지. 그것도 손학규 경기도지사 시절에 한류우드를 만든다고 수용됐잖아.

박 : 수용되면서 거의 쫓겨날 지경에 이르렀잖아요. 저와 함께 고양시에 있는 작가들이 나서서 ‘하종현 선생 지킴이회’를 발족시켰습니다. 제가 지킴이회 부회장을 맡았고요.

한국 미술계의 원로를 이렇게 보내면 안 된다고 시장과 담판을 지었죠. 그래서 시립미술관에 별도로 하종현 기념관을 짓겠다는 약속을 받아냈어요. 나중에 시장, 도지사가 바뀌면서 공수표가 됐지만.
지난해 작가는 이전에 작업한 작품을 큰 캔버스 안에 넣고 망치질을 했다. 그것은 과거와의 단절이자 새로운 작업의 시작이었다.
지난해 작가는 이전에 작업한 작품을 큰 캔버스 안에 넣고 망치질을 했다. 그것은 과거와의 단절이자 새로운 작업의 시작이었다.
색을 쓰기 시작한 ‘후기 접합시대’

하 : 3년 전에 이곳에 터를 잡으면서 많은 생각을 했어요. 제가 1935년생입니다. 제 작업을 정리할 때가 된 거죠. 여기 오면서 ‘이제는 아무것도 돌아보지 말고 작업에만 몰두하자’고 마음먹었습니다.

박 : 집터도 지는 해만 바라본다는 의미로 서쪽으로 잡았어요. 여기 오셔서는 작품만 하세요.

하 : 최근에는 작업을 좀 바꿨어요. 작년에 이전에 작업한 캔버스를 큰 캔버스에 넣고 망치질을 해버렸어요. 사실 ‘접합’ 시리즈를 35년 가까이 했으니까요. ‘접합’에 관한 한 어느 정도 경지에 올랐다고 봐야죠. 그래서 망치질을 한 겁니다. 그렇게 묶어놓고 났더니 새로운 작품이 나오더구만요.

박 : 작가가 나이가 들면 대개 작품을 바꾸기 쉽지 않거든요. 그런데 선생님은 상당히 과감하게 바꾸셨어요. 보시면 아실 텐데, 지금까지 즐겨 쓰시던 모노크롬을 버리고, 색을 쓰기 시작하셨어요.

하 : 예전 작품이 면을 이야기했다면 지금은 선과 색이 주류입니다. 지금을 ‘후기 접합시대’라고 이름 붙였습니다. 세상이 제 작업을 어떻게 볼지 궁금하네요.
[Friends] “스승에게 배운 건 그림이 아닌 진실한 작가로서의 삶”
인터뷰를 마치고 작가의 안내로 작업실과 수장고, 전시장을 둘러봤다. 특히 미술관처럼 크고 어엿한 전시장에는 1960, 70년대 작품부터 최근작을 한눈에 볼 수 있었다. 미술관을 둘러보고 하 화백은 몇 개의 작품에 주목할 것을 권했다.

그중 하나가 철망 작품. 젊은 시절의 작품과 하 화백 특유의 ‘접합’ 작품을 한 개의 캔버스에 철망으로 가두었다. 노화백은 “이전까지 작품과의 단절을 뜻한다”고 설명했다.

말을 맺으며 노화백은 옆 전시장으로 일행을 안내했다. 그곳에는 이전 작품과 전혀 다른 그의 근작들이 전시돼 있었다. 작업 스타일도 달라졌지만, 무엇보다 그가 색을 사용하기 시작했다는 점. 평생 단색조를 고집한 작가가 일흔이 넘어 색깔을 쓰기란 여간해서는 어려운 일이다.

곁에서 그림을 보던 주택석 교수는 “나이 드셔서 이렇게 바꾸기 쉽지 않은데…”라며 나지막이 감탄했다. 주변의 반응이 재미있다는 듯 흐뭇한 미소를 짓던 노화백은 새로운 작품을 모아 조만간 전시회를 가질 계획이라고 밝혔다.

글 신규섭·사진 이승재 기자 wawo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