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 보석상의 아들이었던 해리 윈스턴. 아버지가 뉴욕에 보석 가게를 운영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의 어린 시절 기억 속엔 보석에 관한 것이 많았다. 그는 불과 10대 때부터 훗날 보석의 대가가 될 조짐을 보였다. 에메랄드를 한 번만 봐도 알 수 있는 날카로운 눈을 가지고 있었고, 25센트에 반지를 사서 이윤을 남기고 팔기도 했다. 열아홉 무렵 그는 원대한 꿈과 작은 자본을 가지고 본격적으로 자신의 사업에 뛰어들었고, 보석의 세계를 자기 것으로 만들고 말겠다고 다짐했다. 1932년 해리 윈스턴이라는 브랜드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사실 해리 윈스턴은 1930년대 이전부터 주얼리 업계의 거물로 널리 알려져 있었으며, 상당히 매력 있는 신사로 성장했다. 보석에 바친 그의 생애를 통해 그는 당시부터 오늘날까지도 ‘다이아몬드의 왕’으로 알려져 있다.해리 윈스턴은 사업 초기부터 놀라운 직관과 비상한 수완을 보였다. 그는 크리스마스 시즌 동안 문에 걸려 있는 크리스마스 화관을 보고 화관 모양의 세팅을 고안해냈다. 이것은 해리 윈스턴 의해 시작된 주얼리 산업의 혁명을 가져왔다. 그는 가볍고 유연한 플래티넘 세팅을 도입해 값진 보석들의 3차원 배열을 가능하게 했다. 3차원적 구성의 세팅 방식은 제품 형태를 부각, 새로운 수준의 광채를 만들어냈다.근대 가장 뛰어난 다이아몬드 권위자 중 한 사람이었던 해리 윈스턴은 1978년 세상을 떠났다. 현재는 그의 아들 로널드 윈스턴(Ronald Winston)이 회사를 맡아 새로운 시대에 발맞춘 윈스턴의 기반을 다져가고 있는 중이다. 윈스턴은 조심스럽게 단골손님들을 유지시키면서도 독점적인 엘리트 소비자 층을 확보했다. 그로 인해 권위 있는 재력가들과 로열 패밀리, 그리고 세계적으로 유명한 스타들이 윈스턴사의 고정 고객이 됐고, 이는 현재까지 계속되고 있다. 얼마 전에는 뉴욕의 ‘럭셔리 인스티튜트사’가 발표한 미국 최고 명품 주얼리 브랜드로 해리 윈스턴이 꼽히기도 했다. ‘오백만장자(penta-millionaire)’라고 이름 붙인 부유층이 선택한 것이라 더욱 의미가 있다. 조사 대상은 20만 달러 이상의 연수입과 500만 달러 이상의 순자산을 가지고 있는 부유층 중 400명의 표본 샘플을 대상으로 했다. 해리 윈스턴 사의 고객층이 어떠한지에 대해 잘 알 수 있는 대목이다.세계의 가장 중요한 303개의 다이아몬드 중 60개가 해리 윈스턴의 소유다. 이것은 어느 개인이나 혹은 정부, 왕실보다 더 많은 양이다. 해리 윈스턴은 주얼리 제작에 가장 기본이 되는 보석인 다이아몬드 외에 루비, 사파이어 에메랄드, 그리고 진주 등도 취급하고 있다. 윈스턴가(家는) 소장하고 있는 진귀한 보석들을 전시하는 오랜 전통이 있다. 수십 년 동안 아주 멋진 전시품들은 일반 대중은 물론 상류층 사람들을 만족시켜 왔다. 전시회는 1949년에 해리 윈스턴이 소장하고 있던, 역사적으로 의미 있는 주얼리들의 아름다움을 세상에 알리려는 목적으로 개최한 ‘더 코트 오브 주얼스(The Court of Jewels)’로 시작됐다. 1950년대 중반, 박물관에 기증됐던 유명한 호프 다이아몬드(Hope Diamond)가 포함된 해리 윈스턴의 보석 전시회는 미국 전역에 소개되기도 했다. 1960년에는 파리의 루브르 박물관에서, 1982년에는 뉴욕의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에서 전시회가 열렸다.로널드 윈스턴이 경영을 시작하고 10년 정도 지난 1989년, 해리 윈스턴은 시계 사업을 시작했다. 예외적이고 드문 보석과 어울리는 진정으로 특별한 제품을 만들겠다는 열망을 가지고 브랜드를 더 널리 알리기 위해서다.지금 이 시간에도 해리 윈스턴은 뉴욕 제네바 파리 베벌리힐스 도쿄 등지의 주얼리 부티크에서 아름다우면서도 값진 보석들을 제작하고 있으며 최고의 주얼리 브랜드로의 입지를 지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