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앙팡테리블’ 김지혜의 미학세계 탐험

이탈리아의 거장 루치노 비스콘티(Luchino Visconti)의 영화 ‘베니스에서의 죽음(1971)’을 보면 모네의 ‘인상:해돋이(1873)’ 작품을 떠올리게 하는 장면이 나온다. 색감이나 구도, 빛을 받아 반짝이는 수면 등이 묘사된 영상은 영락없이 인상주의 화풍을 담고 있다. 그는 이 외에도 마네의 ‘튈를리 공원의 음악(1862)’, ‘풀밭 위의 식사(1863)’ 등과 같은 작품을 차용해 연출한 장면을 중간 중간에 넣었다. 예술 분야에 있어서 이와 같은 리메이크는 시대와 장르를 넘어 흔히 일어난다. 작가 김지혜도 조선 시대 후기에 유행했던 민화를 리메이크한 작업을 선보인다.특히 그녀가 흥미롭게 느끼는 것은 책거리 그림. 이는 일반적으로 사랑방에 걸려 있던 작품으로, 그림 속에는 책 도자기 등 당시의 값나가는 물건과 모란꽃, 붓 등 일상생활에서 쓰이는 온갖 물건들이 그려져 있다.“모든 그림이 그렇기는 하지만 특히 정물화는 각 시대를 가장 많이 반영하는 장르예요. 우리나라 민화의 책거리 그림을 봐도 그 안에 청나라에서 들여온 진귀한 물건이 많이 그려져 있어요. 말하자면 자랑거리인 셈이죠. 당시 책은 구하기 힘든 귀한 것이기도 하고 또 책을 읽을 수 있다는 것은 그 만큼 학문과 신분이 높다는 것을 상징하는 것이니까요. 제 그림에는 책장 사이사이에 휴대전화, 명품 가방, 구두 등이 그려져 있습니다. 요즘 시대를 대표하는 물건들을 채워 넣음으로써 전체적으로는 민화적인 느낌을 주지만 자세히 보면 지금 시대의 그림이구나 하는 느낌이 들도록 한 것입니다.”동양화라고 하면 자연 속에서 풍류를 즐기는 선비나 계절감이 느껴지는 산수를 그린 그림을 흔히 떠올리게 된다. 한국화를 전공한 그녀 또한 그림을 공부하면서 먹을 써서 풍경이나 자연물을 그린 수묵화를 주로 접했다. 그러다가 대학 4학년이던 1997년 교환학생으로 일본 요코하마에서 1년 6개월 정도 머물렀다. 그녀는 그곳에서 지내면서 일본 사람들이 자신의 전통문화를 현대적이고 팬시(fancy)하게 재가공해 더 많은 사람들에게 다가가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고 한다. 전통이라고 하면 다소 진부하고 구태의연함을 벗어나지 못하는 우리나라와는 사뭇 다른 점이 인상적이었던 것이다.“서민들이 즐겼던 민화는 요즘에 많이 활용되는 소재이긴 합니다. 도서상품권에도 민화 호랑이 그림이 그려져 있고, 민화가 그려진 가구 제품도 많이 나오고 있지요. 그런데 주변에 ‘흔하게’ 있지만 그에 비해 우리 눈에 별로 들어오지 않는다는 생각이 듭니다. 저는 한국화를 전공했지만 원색을 좋아하는 편이라 제 그림은 오방색을 기조로 아크릴 물감을 써서 그리기 때문에 색감이 화려한 편이에요. 엄밀히 따지자면 제 작품은 채색 배열이 잘된 편은 아닙니다. 알록달록하면서도 조화로울 수 있는데, 제 그림은 색깔의 균형이 깨진 듯한 느낌이랄까요. 하지만 그런 것이 저의 감성인 것 같습니다.”민화는 한국화 중에 색감이 화려한 편에 속하지만 작가 김지혜는 그보다 더 파격적으로 색을 쓴다. 이런 까닭에 그녀의 작품은 보는 이의 시선을 사로잡고, 머릿속에 오랫동안 잔상을 남긴다.화병에 꽂힌 모란꽃, 장식 문양, 오방색의 무늬 그리고 옷걸이에 걸린 란제리, 커피잔, 안경 등 일상적인 소품. 이런 것들을 어우러지게 묘사한 그녀의 작품이 팝아트(Pop Art)적인 느낌을 주는 것은 색감뿐 아니라 기하학적인 공간 구성 때문이다. 원근법, 소실점 등을 기조로 한 서양화와 달리 민화 속에 있는 이미지는 상당히 평면적이다. 민화는 사람들이 물건을 앞에서 본 모양, 옆에서 본 모양, 뒤에서 본 모양 등을 그려서 화면에 임의로 조합하는 방식을 취해 형식이 완성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녀는 평면에서 탈출을 시도한다. 책장의 기둥, 벽, 모서리 그리고 그 속에 있는 오브제를 일부는 평면적으로, 일부는 입체적으로 표현한다. 그림을 구성하고 있는 책장의 구조를 3차원의 형태로 응용하면서 주변 공간까지 자연스럽게 넘나드는 등 2차원적인 회화 작업에서 다양하게 변용하고 있다.“구도와 형태, 그 정리되지 않은 독특한 이미지를 가지고 있는 민화의 형식적인 측면을 차용해 그림 작업을 합니다. 저는 책장이 쌓여져 있는 형태가 흥미롭게 느껴져요. 칸칸이 네모 모양으로 된 조형적인 요소에 현대 사회의 다양한 아이콘을 그려 넣어가는 것이 무척 재미있습니다.”최근에 열린 미술품 옥션에서 그녀의 작품이 예상 경매가의 3배에 달하는 가격에 낙찰됐다는 기사가 소개된 적이 있다. 이는 그녀의 그림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는 것을 방증하는 것이다. 하지만 스스로를 예술가라고 부르기에는 아직 부족하다는 그녀는 앞으로도 지금처럼 신이 나서 그림을 그릴 수 있는 작가였으면 좋겠다고 한다.“자신의 작품을 자기가 반복적으로 복제하는 그런 작업을 하고 싶지는 않아요. 당분간 책거리 그림을 더 그리겠지만 이후에는 우리나라 산을 소재로 한 작품을 구상 중이에요. 한국화의 주된 소재인 북한산 인왕산 등은 무척 선비적이고 낭만적으로 그려졌잖아요.하지만 요즘에는 산 속에 군사시설도 있고 뭔가 위장되어 있는 느낌이 들더라고요. 멀리서 보면 전경이 멋있는 산, 그 안에 숨겨져 있는 이면의 다른 모습을 패턴화해 보여주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