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석 교수 파문으로 세상이 시끄럽다. 많은 사람들도 누가 옳은지, 무엇이 이로운지 헷갈릴 수밖에 없었다. 결과적으로 이번 사건 때문에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 우울한 연말연시를 보내야 했다. 이런 일에는 후유증이 뒤따른다. 진실을 향한 우상화와 거짓말에 대한 극단적 혐오가 한동안 우리 사회에 팽배할 것이 분명하다. 이미 ‘거짓말 포비아(공포증)’가 사회 구성원들 사이에 유행처럼 퍼져나가고 있음을 여기저기서 목격할 수 있다. 그러나 거짓말은 오랜 세월 진실 못지않게 인간 사회에 나름의 역할을 수행해 왔고 또 지금도 일상에서 사라지지 않고 있다. 거침없는 인류 문명의 진보 속에서도 거짓이 사라지지 않고 있는 이유 중 하나는 진실이라는 것은 지극히 상대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상대적 진실은 결국 반대편 입장에서는 ‘거짓’일 뿐이다. 또 증류수에서 물고기가 살 수 없듯이 진실만 가득한 세상에서 편안하게 숨을 쉴 수 있는 인간 또한 드물다. 인간이 거짓말을 개발한 것은 진실이 너무 냉혹하기 때문이다. 치부를 가리기 위해 의복을 개발한 것처럼 냉혹한 진실만으로는 사회생활과 경제 활동을 도모할 수 없었다. 모든 것을 적나라하게 드러내 놓고 어떻게 품위 있는 관계에 기반을 둔 사회생활과 ‘기대치’를 토대로 움직이는 경제 활동을 꾀할 수 있겠는가. 거짓말의 목적은 ‘포장’이다. 포장의 주목적은 ‘유인’이고, 유인은 곧 ‘동인’으로 직결된다. 포장이 없으면 유인도, 동인도 발생하지 않는다. 또 동인이 발생하지 않으면 사람들의 경제 활동 또한 생존과 직결된 부분으로만 지극히 한정될 수밖에 없다. 여기서 이른바 ‘미끄러운 비탈길 논리(slippery slope)’의 오류, 즉 특정 원칙에 대한 그릇된 확대 적용을 주장하는 논리의 오류를 지적하는 독자도 있을 것 같다. 그렇다면 이렇게 되묻고 싶다. “그대는 진정 우리 인류가 오류 없는 진실만을 토대로 발전했다고 믿는가?” “정녕 무결점의 논리로 삶을 살아가는 게 최선의 결과를 가져올까?” ‘양치기 소년’의 교훈을 모르는 이는 없다. 그러나 그 교훈은 어디까지나 ‘교과서용’이다. 경제활동을 하는 성인이라면 결과적 이해득실까지 헤아려야 한다. ‘늑대가 나타났다’는 양치기 소년의 ‘거짓말’에 한 번 더 속아주지 않음으로써 마을 사람들은 무엇을 얻고 무엇을 잃었을까. 화롯가에 둘러 앉아 왁자지껄 떠들어댈 이야깃거리와 대대손손 물려줄 교훈 하나가 얻은 것이라면, 그들이 잃은 것은 막대한 재산상의 손실(그 양들이 누구의 것이었던가), 그리고 다소 과장하자면 마을의 ‘엔터테이너’로 성장할 가능성이 농후했던 인재 한 명일 것이다. 우리 사회에는 논리로 움직이는 사람이 많지만 감(感)으로 움직이는 사람도 상당히 많다. 어느 설문조사 결과에 따르면 한국인은 이성을 동인으로 삼는 사람보다 감정을 동인으로 삼는 사람들이 더 많다고 한다. 그래서 우리가 근자에 들어 종종 서구식 사고에 휘둘리고, 그래서 가끔은 어처구니없는 일을 겪고 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지금까지 크게 잘못된 길을 걸어왔고, 또 앞으로도 크게 잘못된 방향으로 나아갈 것으로 생각하지는 않는다. 우리에게는 도가 지나친 것을 피하는 ‘중용’의 미덕이 있다. 우리에게는 진실도 필요하지만 때로는 거짓말도 필요하다. 철저한 분석도 필요하지만 가슴에 밀려오는 감이 필요한 것과 마찬가지다. 황 교수의 거짓말은 물론 비난받아 마땅하다. 그러나 어느 쪽으로든 도가 지나치면 경제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바람직하지 않은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는 점도 함께 생각해봐야 할 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