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시간이 돈이라고 말합니다. 얼핏 들으면 그럴듯해 보이지만 곰곰이 음미해 보면 서글픈 말이지요. 돈이 삶의 전부가 아닌데 삶의 내용을 좌우하는 시간이 곧 돈이라는 사고는 기가 막히는 것입니다. 굳이 이렇게 표현해야 한다면 시간은 자유요, 평화요, 아름다움이요, 기쁨이어야 더 바람직하겠지요.”도법 스님의 ‘청안청락 하십니까’에 나오는 말입니다. 시간이 돈이신지요? 저도 때로는 시간이 돈입니다. 사실 잘 나갈수록 시간이 돈입니다. 그렇지만 시간이 돈일수록 시간이 돈이라는 믿음은 함정입니다. 쉼표를 찍어야 할 때 쉼표를 찍지 못하고 오히려 불안해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사람을 만나면 불안도 전염됩니다. 시간이 돈이 아니라 자유라고 믿는 사람, 그 여유의 공간에 서면 나도 여유를 배웁니다. 그런데 시간이 자유가 되는 것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습니다. 끊임없이 나 자신과 싸워야 합니다. 뭔가 더 갖고 싶다는 욕망으로부터, 남보다 더 나아야 한다는 경쟁심리로부터, 이 무거운 인생이 ‘나’를 부당하게 대접하고 있다는 자괴감으로부터, 그리고 오랫동안 익숙해져온 아집으로부터….현대를 사는 우리는 돈이 전부인 줄 알고 너무 각박하고, 너무 들떠 있고, 쫓고 쫓기느라 긴장과 불안을 품고 살고 있습니다. 그게 고통의 핵인데, 고통인 줄도 모르고 있으니 고통이 반복됩니다. 물질적으로 풍요로워지면 불행 끝, 행복 시작이라고, 우리의 현대사는 얼마나 분주하고 정신없었습니까? 우리는 가시적이고 지속적인 성장의 시대를 거치면서 자연스레 어제보다 나은 오늘, 오늘보다 나은 내일을 꿈꾸게 됐습니다. 우리에게 물질은 살기 위해 필요한 도구를 넘어 성공을 증거하는 전리품이기도 했습니다. 누구의 아파트가 넓은지, 누구의 차가 더 좋은지, 어떤 직장에 다니는지, 얼마나 버는지, 그런 설문으로 사람을 줄세웠습니다. 물질적으로 세상은 하루가 다르게 달라졌지만 그렇다고 사람이 달라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아니, 사람이 달라졌습니다. 정을 모르는 이기적인 군상으로. 자연의 위로를 잃어버린 고독한 모습으로. 선한 표정을 짓는 냉정한 동물로. 문명이 발달한다고 사람이 좋아지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모든 것이 물질로 보상되는 ‘성장’이 우리 아버지들 시대의 행운이라면 물질 만능주의는 우리 시대의 문화적 불운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면 우리 안의 물질 만능주의를 버리겠다고 결심하면 될까요?“욕심을 버리려 애쓴다고 욕심이 버려지나요! 차라리 내 안의 욕심을 응시하는 거요. 그러면 맹목적으로 달려가기만 했던 욕망의 문맥이 보입니다. 자각하는 거지요. 몸 안에서 몸을 응시하고 느낌 안에서 느낌을 응시하면서 응시하고 있는 그놈을 찾는 겁니다.”조고각하(照顧脚下), 순간순간 자신을 살피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가르쳐준 어떤 선사는 자기를 돌아보지 않으면 생은 자승자박이라고 했습니다. 스스로의 번뇌망상으로 가시밭길을 만들면서도 그게 망상인 줄 모르고 실체인 줄 알고 허우적거린다는 거지요.인생을 누리기 위해서는 ‘나’를 응시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시간이 돈인 잘 나가는 인생일수록 ‘나’를 돌아보는 계기를 적극적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나’를 잃고 화려한 가구처럼 붙박이돼 화려하게 사는 것보다 주먹밥 한 덩이로 주린 배를 채우더라도 ‘나’를 응시하며 사는 게 잘 사는 것일 겁니다. 실상사 화장실에서 보았던 말이 생각납니다.“1m의 원 안에서는 자리에 앉아 기도를 할 수 있고 명상을 할 수 있다. 3m의 집 안에서는 편히 쉴 수 있고 빗소리 또한 자장가처럼 들린다. 100m의 밭에서는 농사를 지을 수 있고 염소를 키울 수 있다. 1000m의 골짜기에서는 땔감과 물과 약초와 버섯을 구할 수 있다. 10km의 원안에서는 너구리와 찌르레기와 나비가 뛰어놀 수 있다. 100km의 산골마을에서는 한가하게 삶을 누릴 수 있다. 10만km의 원 안에서는 어디든지 걸어갈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