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과 사랑을 찬미한 그리스의 시인 ‘아나크레온’. 후세의 예술가들이 끊임없이 인용할 만큼 그 이름만으로도 위대하다. 아나크레온이 노래한 매혹의 와인은 어느덧 우리 곁에 친숙하게 다가왔다. 특히 글로벌 마인드로 비즈니스를 해야 하는 기업인에게는 필수 덕목으로 떠오른 와인 신드롬은 즐거움이자 도전일 수 있으리라. 와인은 천천히 음미하면서 대화를 즐겨야 제맛이라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진정으로 와인 마니아가 되려면 나눌 수 있는 화제가 풍부해야만 가능한 일이다. 따라서 사소한 일상의 발견은 문화를 이루는 콘텐츠이자 행복으로 이끄는 새로운 방식이다. 그런 점에서 수많은 컬렉터들을 열광시키는 아름다운 크리스털 디캔터의 매력은 와인을 즐기는 또 다른 의미의 발견이 될 수 있을 터이다.프랑스에서 발간된 ‘그녀들의 테이블’이라는 고서적 속에는 가문의 전통에 따라 와인을 어떻게 식탁에서 다뤘는지를 그리고 있다. 귀족들 놀이터인 여우 사냥터에서의 경우를 빼고는 테이블에 와인 병을 올려놓은 세팅은 없었다. 가문에서 한 세기 이상 사용해 왔을 것으로 보이는 앤티크 디캔터와 글라스들을 세팅하고 있는 것이다. 때로 가문의 문장(紋章)이나 이니셜 모노그램이 새겨 있는 스털링 실버 커트러리와 크리스털 글라스로 시중에서 흔하게 만나기 어려운 컬렉션들이었다.가문에서 주로 마시는 와인이 있으며 그 와인과 적절히 조화를 이루는 와인 액세서리들이 품격을 빚어내고 있다. 이는 우리가 장(醬)류를 종갓집 며느리로 이어 온존(溫存)하듯 가문의 종가는 그렇게 와인 문화를 가꾸어 온 것이다. 특히 아름다운 헤리티지 컬렉션(heritage collection)으로서 디캔터와 클라렛 저그는 와인을 단순한 술이 아니라 예술의 경지로 끌어올리고도 남음이 있었다.수천 년 와인 역사를 거슬러 살피자면 디캔터는 그 장황한 역사 속에서 와인을 서빙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해 왔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암포라(Amphora)에 담아 테이블로 가져온 와인은 더 작은 디캔터와 같은 용기로 옮겨 쉽게 다룰 수 있었다. 로마인들은 처음으로 유리를 소재로 사용한 디캔터 개척자들이었다. 이집션 글라스 제조 기법에서 블로운 기법을 발명했다. 녹아 있는 유리 덩어리에 대롱을 꽂아 풍선을 불듯이 형태를 만드는 기법이다. 이로써 매우 다양한 용기들을 제작할 수 있었으며 이 기법은 로마군 주둔 지역에서 널리 확산된다. 그러나 로마 제국이 멸망하자 유리 생산은 점차 사라지고 대부분의 디캔터들은 브론즈, 실버, 골드와 질그릇을 소재로 삼았다. 독일 삼림 유리 전통과 라인 지역을 빼고는 유럽인들이 유리와는 멀게 지낼 때 베네치아인들은 유리 디캔터를 르네상스 시대에 재도입해 길고 호리호리한 용기의 목 부분이 커다랗고 넓은 몸체와 이어져 와인의 표면이 공기에 더 많이 접촉할 수 있도록 디자인했다.1730년대의 영국 유리 장인들은 지속적인 공기와의 마찰을 제한할 수 있는 스토퍼(stopper)를 창안, 널리 사용했는데 지금까지 디캔터의 기본 외관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양조 기술이 바뀌어 침전물도 많이 줄어들었으니 디캔팅은 과연 필요한 것일까라는 질문이 있어 왔다. 이에 ‘와인 바이블(The Wine bible)’의 저명한 저자 캐서린 맥닐(Katherine McNeil)은 다른 많은 와인 책 저자들과 마찬가지로 디캔팅의 사용을 지지하는 이유를 에어레이션(aeration)으로 꼽고 특히 타닌성이 짙은 바롤로, 보르도, 카버네 소비뇽, 포트, 론과 같은 와인엔 유용하다고 말했다. 그러나 섬세한 키안티, 피노누아, 그리고 리오하와 같은 와인들은 디캔팅하면 오히려 해가 될 수 있다고 말했다. 한편 상당수의 와인 전문가들은 미적 가치 때문에 디캔터를 사용하길 권장한다. 우아한 크리스털 디캔터를 추천하며 디캔팅한다고 해서 와인에 손상이 오지 않는다고 말했다.중부 유럽에 비해 뒤떨어져 있던 영국의 유리 산업에서 벗어나기 위해 게오르그 레이븐즈 크로프트는 1675년께 자국에서 생산되는 재료에 산화납을 첨가해 베네치아 유리보다 단단하고, 무겁고, 내구적인 납유리(lead-oxide glass)를 만들었다. 이 납유리는 와인 잔과 디캔터에 응용됐으며 7년간의 특허 기간이 끝나자 전 유럽으로 확산돼 맑은 소리가 청아하게 들려오는 크리스털은 다양한 커팅 비법과 색을 입고 테이블의 여왕으로 등장한다. 다이아몬드 커트 기법이 도입돼 한층 아름다운 와인 글라스가 탄생된다. 브릴리언트 크리스털은 명작으로 평가받는다.대부분의 디캔터 컬랙션은 초기 잉글랜드 크리스털 디캔터를 기준으로 시작한다고 볼 수 있다. 단순한 디자인으로 별이 새겨 있거나 이니셜이 모노그램으로 새겨져 있는 디자인, 해양국가라는 점을 반영해 배가 그려졌거나 바닥이 넓은 디자인도 출현하게 된다. 브리스톨 글라스는 짙은 코발트색의 디캔터가 있으며 자수정 색유리로 만든 색유리 디캔터도 나타난다. 후기에 이르면 3개 반지 모양의 목 부분 장식이 특징적으로 디자인에 사용된다. 인디언 클럽이라고 불리는 곤봉 모양과 양파 모양 등은 후기 조지언 스타일이다. 프랑스나 보헤미안 디자인은 초기에 영국을 답습하거나 비슷했지만 점차 그들 특유의 디자인으로 다양하게 만들었는데 특히 보헤미안 컬러 디캔터와 글라스가 인기 있으며 프랑스의 바카라, 랄리크, 생루이는 여전히 최고의 품격으로 인기를 구가하고 있다. 아일랜드의 워터포드의 명성과 함께 미국의 아메리칸 브릴리언트 컷 글라스가 19세기 말에 개발돼 그 영롱한 컷으로 최고의 인기를 누리고 있으며 앤티크 시장에서 단연 돋보인다.또 다른 스타일의 디캔터, 클라렛 저그는 영국에서부터 유래했다. 클라렛(Claret)은 프랑스 보르도 스타일의 드라이 레드 와인을 영국인들이 일컫는 단어였다. 미국에서는 ‘보르도 스타일 카버네 블렌드’라고 부르지만 ‘클라렛’이라고 짧게 통칭하는 와인 평론가로 인해 클라렛이라는 경우도 많다. 브리티시 오픈 골프대회에서 우승한 선수가 상으로 받았던 컵 또한 ‘클라렛 저그(Claret Jug)’다. 18세기 세인트 앤드루 골프코스에서 시작된 클라렛 저그는 이제 다른 나라에서도 우승컵을 대신해 사용한다. 영국인들은 클라렛을 마실 때 클라렛 저그 디캔터에 담아서 마셨다.이 중 클라렛 저그는 크리스털, 혹은 유리와 은으로 만들어진 손잡이가 달린 디캔터라고 볼 수 있다. 고급 앤티크 클라렛 저그는 아이보리 손잡이에 보석을 장식한 것도 있으며 홀마크가 찍힌 스털링 실버로 크리스털을 감싼 디자인들이 아름답다. 순 유리로만 이루어진 크리스털 디캔터에 비해 가격은 비싸지만 매우 가치 있게 느껴지기 때문에 컬렉션으로서 인기를 얻고 있는데 특히 빅토리안 시대의 디자인은 매우 다양하다. 프랑스나 중부 유럽, 이탈리아, 미국 등지에서도 19세기 이후 폭넓게 제작 사용됐다. 셰리와 리큐어 디캔터는 식사 전후에 마시는 과일 와인으로 매력적인 디캔터를 사용해 서빙한다.1. 아테네 암포라(Panathenaic amphora). BC 130년께 작품으로 포도주나 기름 용기 등으로 사용됐다.2. 랄리크의 몰드 블로운 기법의 고전적 누드 여인을 모티브로 한 디캔터.3. 1890년 제작된 아메리칸 앰버 글라스의 디캔터. 경매에서 약 3000달러에 거래된 바 있다.4. 이슬람 주전자 디자인을 응용한 에나멜링 장식의 클라렛 저그로서 19세기 바카라 작품이다.5. 르네상스 후기에 이탈리아 화가 카라치의 그림. 제목은 ‘와인 마시는 소년’으로 카라페를 들고 테스팅하는 듯하다.6. 아르데코 글라스 작가로 유명한 랄리크 디자인의 디캔터.7. 보헤미안 글라스 스타일의 루비 바탕에 깊게 커팅한 이 디캔터는 3개의 링이 있는 영국의 조지언 스타일을 본떴다. 19세기 바카라 제품이다.8. 보헤미안 글라스 스타일의 루비 바탕에 깊게 커팅한 이 디캔터는 3개의 링이 있는 영국의 조지언 스타일을 본떴다. 19세기 바카라 제품이다.9. 빅토리안 시대의 전형적인 십 디캔터. 컷 크리스털로 제작됐다. 항해 중 배에서 사용해도 견고한 느낌을 주는 워터포트 디자인이다.10. 빅토리안 시대의 클라렛 저그. ‘Martin Hall & Co.’의 제품이다. 셰필드 은과 컷 크리스털로서 아트 앤드 크래프트의 영향을 받았다.11. 아라베스크 무 패턴을 인그레이빙한 바카라의 와인 디캔터 슈트. 마스터 피스에 해당하는 앤티크다.12. 아트 앤드 크래프트 디자이너로 빅토리안 시대에 유명했던 크리스토퍼가 디자인한 독특한 구조의 클라렛 저그.13. 아트 앤드 크래프트 디자인의 선이 엉켜 있는 듯한 카라페.14. 아르누보 디자인의 클라렛 저그. 프랑스 제품이다.15. 인그레이빙과 에칭 기법으로 정교하게 다듬은 루비 컬러 리큐어 디캔터. 두 개의 잔과 함께 프랑스 19세기 제품이며, 보헤미언 글라스의 영향을 받았다.김재규헤리티지 소사이어티 대표. 앤티크 문화예술 아카데미 대표. 앤티크 문화예술기행, 유럽도자기 저자.영국 엡버시 스쿨, 옥스퍼드 튜토리얼 서비스 칼리지 오브 런던 졸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