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는 흘러오고 흘러간다. 역사는 뒤안길을 기록이나 유물로 남겨 사연을 후세에 전한다. 운주사(雲住寺), 천불천탑으로 인구에 회자되는 한국 미술사의 풍운아다. 고려(918~1392)에 창건됐음을 보여주는 10~11세기의 청자 파편과 기와 금동여래입상 같은 출토 유물 몇 점, 그리고 ‘동국여지승람’ ‘능성현’ 조에 “운주사는 천불산에 있다. 절의 좌우 산마루에 석불과 석탑이 각각 천 개 있고, 또 석실이 있는데 두 석불이 서로 등을 대고 앉아 있다(雲住寺在千佛山寺之左右山背石佛塔各一千又有石室二石佛相背而坐)”라는 짤막한 기록이 전할 뿐이다. 여기에 현존하는 20여 기의 석탑과 80여 기의 석불이 전부인 운주사는 오늘도 전라남도 화순 그 잔잔한 시골 평범한 산자락 가운데 말없이 자리하고 있다.운주사는 산 전체가 거대한 암반으로 되어 있어 소나무 뿌리가 겨우 한줌 흙에 붙어 있을 정도로 수목이 척박하다. 나무가 없으니 물이 귀하고 계곡이 없다. 산수를 인체에 비유하면 바위는 뼈가 되고 흙은 살이 되며 수목은 모발, 물은 피, 연운은 정신이 된다고 했다. 이런 논리대로라면 운주사는 골기가 강해 뼈가 살 밖으로 삐죽 솟아난 형상이다. 부드럽거나 따뜻한 맛은 찾아볼 수 없는 그야말로 거친 양기만 가득한 절이다. 그래서 절 이름을 ‘운주(雲住: 구름이 머무르는 곳)’라고 하여 팍팍한 자연에 구름과 안개를 드리워 정신적으로나마 푸근하게 고양하려고 하지는 않았을까.운주사는 아무리 둘러봐도 깊은 계곡이나 높은 봉우리 하나 없다. 그저 평범한 산천이다. 근년에 신축한 대웅전 뒷산 중턱 알같이 박힌 큰 바위에 올라 내려다보면 운주사는 골짜기를 따라 물길이 거슬러 오르듯 터가 배처럼 길쭉하다. 그래서 운주사(運舟寺)라고도 한다. 그 사이 좁은 계곡과 골짜기에 석탑과 석상이 듬성듬성 자리하고 있다. 흔히 말하는 천불천탑은 수많은 불탑과 불상이 있다는 이야기이지 꼭 집어 각각 천 개씩 있다는 의미는 아니다. 마치 삼천리 방방곡곡이라 하면 나라 전체를 의미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아무리 둘러봐도 외지고 궁벽한, 평범하기조차 한 이곳에 이렇게 많은 탑과 불상을 세운 연유를 알 길이 없다.고려 당시 몽고의 침입을 팔만대장경판을 조성해 불심으로 극복하고자 했던 것처럼 ‘천불천탑을 조성해 국난을 이겨보겠다는 의미였을까’라고 추측해 보지만 아무래도 무리가 있다. 밀교에서 말하는 천불을 조성해 모시는 천불신앙과 운주사의 중심 법당처럼 보이는 보물 제 797호 석불감쌍배불좌상에 보이는 두 부처를 앞뒤로 모셔 음양을 나타내는 밀교의 영향이라고 말하기도 하지만 확실한 창건 기록과 설립 목적이 발견되지 않는 한 아무도 단언할 수 없는 영원한 미지수다.추측하건대 어떤 이유에서인지는 모르지만 국가가 지원하는 재정과 기술을 기대하지 않고 불심 가득한 지방 토호의 재원으로 불심과 순수로 뭉친 장인들과 서민들이 만들어낸 합작품이 아닐까 생각된다. 여기에는 칠성신앙 같은 토착적 샤머니즘도 일조했을 것이다. 고려 이전 통일신라시대부터 내려온 유적들의 섬세하고 화려한 미감을 계승 발전시키기보다는 자연 발생적이고 순수한 미감으로 정성스레 탑을 쌓고 무심하게 돌을 다듬어 불상과 석탑을 만들지 않았나 싶다. 그 결과 탑은 원래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높다. 기원의 의미로 7층 혹은 9층의 다층탑을 쌓고, 불상은 잘 만들기보다는 많은 형상을 통해 불심을 모으는 일종의 상징으로 조성됐던 것은 아닐까. 생각이 꼬리를 문다.단순과 생략, 고졸미의 정수운주사 석물들은 하나같이 못생기고 어설프다. 불상은 대체로 서있는 자세로 자연 기단 위에 올려 있다. 주변의 바위를 쪼개어 얇은 석재를 홀쭉하게 세우고 단순하게 조각했다. 일본 법륭사 정창원에 소장된 ‘백제목조관세음보살입상’의 유려한 자태를 보는 듯하다. 여기에 석질도 부드러워 풍화가 심하고 닳아 떨어져 나가 형체를 거의 알아볼 수 없다. 종교적 모습이라기보다는 고대 조각을 보는 듯 단순함과 생략이 가득하다. 고졸미(古拙美가) 넘친다. 불상은 모두 비바람에 씻기고 닳아서 형태는 삭았지만 어렴풋한 모습이 인간적이다. 특히 절 입구 자연 기단에 쌓은 높직한 구층석탑을 지나 오른쪽 얕은 바위 아래 서 있는 입석 불상은 현대미술의 거장을 보는 듯 새롭다. 늘씬한 몸매에 추상적인 옷자락과 수인(手印), 그리고 형태가 거의 사라지고 기다란 코만 남은 둥글고 긴 얼굴, 거친 인상을 찾아볼 수 없는 소박한 용모는 현대 조각가 콘스탄틴 부랑쿠지의 조각을 그대로 옮겨 놓은 듯하다. 아무리 보아도 느낌은 영락없이 백제 양식이다.대부분 7층이나 9층으로 이루어진 운주사 석탑은 백제 정림사지 5층석탑이나 신라 감은사지 3층석탑에서 보이는 탁월한 체감률의 비례미는 찾아볼 수 없다. 옥개석도 신라의 전탑이나 백제의 목조 양식의 전형에서 벗어나 처음 보는 둥근 모양이 낯설고 어설프다. 탑신은 X자형의 기하학적인 도상이나 꽃잎 모양의 이국적 모양이 언뜻 눈에 들지 않는다. 잘생긴 신라 석탑을 보다가 운주사 석탑의 길쭉하고 못생긴 다층 석탑을 보면 꼭 유치한 어린아이들 탑 쌓기 놀이를 보는 듯하다. 그래도 즐겁다. 보는 맛이 난다. 아이디어나 영감을 자극하는 무엇이 있다. 수수께끼 같기도 하고 보물찾기 놀이 같기도 하다. 유치해서 더 좋다. 이런 ‘유치찬란한’ 석탑들은 바위 언덕이나 평지 가운데 담담히 자연의 일부가 되어 천 년을 눈과 비 맞고 바람과 구름이 스쳐 지나갔다.고려는 불교를 통치 철학으로 귀족 정치를 펼치며 무인이 득세해 귀족적 취향의 화려함과 장식성이 돋보이는 완벽주의 미감의 시대다. 몽고항쟁의 대명사 격인 ‘팔만대장경’의 완벽에 가까운 목판 기술과 경전 내용의 완성도는 두말할 것도 없고, 고려청자의 신기에 가까운 비취색과 고려자기의 빼어난 조형미, 고려불화의 경이적인 불화 기술과 채색법, 은입사 칠함 같은 고려 금속공예술 등 조형 전반에 걸쳐 고려시대 미감의 현란한 기술과 화려한 외형을 보이고 있다. 이는 고려시대 유물의 공통적인 특징으로 시대 전체를 관통하는 무인 취향이다. 몽고의 침입과 중국 문화의 영향, 그리고 귀족 국가로서의 불교적 화려함이 반영된 자연스러운 결과물이다. 미술과 공예뿐만 아니라 건축에서도 마찬가지다. 부석사 무량수전에서 보이는 배흘림기둥 주심포 건물들의 완벽한 치목과 결구의 장엄함이라든지,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경천사지팔각구층탑’ 같이 조각에서 보이는 라마교풍의 장식적 화려함이 극에 달해 현기증이 난다. 이는 고려시대 전반을 풍미하는 시대 미감이다.이에 비하면 운주사 석물들은 너무 조촐하고 소박하다. 마치 조선 말기 퇴락한 유교의 자연주의 미술품을 보는 듯하다. 어떻게 고려시대에 저리도 장식의 미니멀과 맥시멈의 극명한 대비를 이루어 냈을까. 운주사 경내를 온종일 보고 또 보고 답사를 마치고 돌아와 곰곰이 생각해 봐도 답이 나오지 않는다.사실, 고려는 몽고의 70년 지배 하에 있는 동안 몽고 문화의 많은 영향을 받았다. 이미 언급했지만 한국 탑의 정형은 3층석탑으로 8세기 통일시대를 정점으로 미감의 완결을 보았다. 그런데 운주사 탑같이 기단이 좁고 층고가 높은 다층석탑은 통일신라의 영향이라기보다는 월정사 9층탑이나 마곡사 9층탑에서 보이는 원나라 양식의 영향이다. 그뿐만 아니라 문양도 어설프고 둥글고 평평한 형태부터 항아리를 포개놓은 것 같은 다양한 옥개석도 따지고 보면 운주사 석물을 건립하는데 미감을 감독할 고급의 감독 체제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고 장인들 스스로 일종의 자율적 의지의 소산에서 나온 자연스러운 결과물이다. 누구에게 잘 보이기 위한 욕망은 사라지고 순수함만 남은 소박한 미감의 경지다.운주사의 백미는 탑도 불감도 아닌 대웅전 서편 언덕바지에 있는 누운 부처(臥佛) 한 쌍이다. 부처라기보다는 부부 같은 ‘다정부처’다. 너럭바위를 있는 그대로 적당히 다듬어 몸통을 만들고 가운데 자연스럽게 갈라진 틈을 나누어 두 부처 얼굴을 새겼다. 얼굴은 운주사 어느 곳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긴 코에 얕게 파인 눈, 얇은 입술, 꼭 다문 입 등 어느 하나 새로울 것이 없다. 와불의 크기는 길이 20여m, 폭 6~7m에 달하지만 위엄과 기상은 찾아볼 수 없다. 아이들이 소풍 와서 배 위를 구르거나 얼굴을 쓸어내려도 말없이 천 년을 그대로 누워 있다.황지우의 시 ‘山經(산경)을 덮으면서’에서 “… 적설 20cm/ 얼음 이불 되어/ 와불 부부의 더 추운 동침을 덮어 놓았네/ 쇼크로 까무라진 듯/ 15도 경사로 누워 있는 부처님들/ 石眼(석안)에 괸, 한 됫박 녹은 눈물을/ 사람 손으로 쓸어내었네…”라는 구절처럼 ‘다정부처’의 얼굴엔 다정함이 가득 배어 있다. 부처의 고행과 종교의 신성은 그곳에 없었다. 이 불상을 조성한 고려인의 당시 성정이 이처럼 어질고 순했나 보다. 어느 고고한 예술품보다 더 멋진 걸작이다.운주사에는 칠성바위가 있다. 와불에서 아래로 내려와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면 곧 석탑 한 기와 널찍한 둥근 바위가 주사위 놀이라도 하듯 흩어져 있는 것이 보인다. 자세히 보면 원형의 잘 다듬어진 바위는 크기는 다르지만 분명히 북두칠성 형상 그대로의 칠성바위가 놓여 있다. 둥근 상판이 지면에 닿지 않고 울퉁불퉁 솟아 있는 것은 아마 나무뿌리가 바위를 들고 일으켜 세웠거나 오랜 세월 빗물에 흙이 쓸려나가 바위에 노출돼 자연스럽게 놓인 것이다.이 칠성바위는 별이 인간의 길흉화복과 수명을 지배한다는 칠성신앙과 깊은 관계가 있다. 칠성신앙은 주로 비를 내려 풍년을 이루게 하고, 수명을 연장해 주며, 재물을 준다는 현세적 기복(祈福)신앙이다. 이러한 칠성신앙이 불교와 결합하면서 음력 칠월칠일 즉, 칠석(七夕)이 우리에게는 단순히 견우성과 직녀성이 은하수에서 만나 하루 동안 못 다한 사랑을 나누는 동화적인 상상을 펼치는데 불과하지만 불교에서는 연중 큰 행사다.칠성바위의 무심한 둥근 조형이 그냥 하나의 현대 조각이다. 최첨단 건축과 공간에 고전과 현대의 조화로 아름답게 어울릴 것이다. 미감은 세월과 장소 종교와 인종을 초월한다. 반듯하게 솟은 탑과 뒹구는 원형 칠성바위가 어우러진 자연의 설치미술이 운주사의 고요를 흔든다. 구름이 운주사 앞산을 스쳐 지나 건넛산 중턱에 세워진 석탑 한 기가 언뜻 보일 듯 말듯 신비로운 풍경이 머릿속에 그려진다.운주사는 해가 쨍쨍한 가을 한낮보다 봄 안개에 버들가지 물이 촉촉이 오르는 봄 새벽이 더 정답고, 뻐꾸기 우는 유월 장맛비 내리다 잠깐 그친 앞산 마루에 구름이 걸친 여름 오후나, 혹은 종일 함박눈이라도 펄펄 내리는 따뜻한 겨울의 한낮 정취가 더 어울릴 것이다운주사 입구. 세월의 흔적을 알려주는 고목 한 그루 없이 팍팍한 가을바람만 분다. 가을 오후 해 그림자 길게 드리우고 나서야 신작로 길을 따라 천천히 걸어 절을 빠져나왔다. 아침 절에 오를 때 보았던, 아직 단청이 채 마르지 않은 일주문 옆 사시나무 한 그루가 마른 가을바람에 가늘게 이파리를 흔들고 있었다.최선호(崔善鎬) www.choisunho.com1957년 청주생. 서울대 회화과 및 동 대학원 졸업. 간송미술관 연구원.뉴욕대(NYU) 대학원 졸업. 성균관대 동양철학 박사과정 수료.현재 국립 한국전통문화학교 교수·화가 .표화랑 갤러리 현대 등 국내외 개인전 17회 및 국제전 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