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일, 중국 반도체 굴기 저지 총력전
미국과 일본이 반도체 동맹을 통해 중국의 ‘반도체 굴기’를 막아서고 나섰다. 미국의 반도체 설계와 개발, 일본의 장비와 소재 분야 강점을 살려 중국의 반도체 패권 야망을 아예 싹부터 잘라 놓겠다는 구상으로 보인다.

일본은 반도체 소재·부품·장비(소부장) 분야에서 세계 최고 수준의 기술력을 보유하고 있다. 도쿄일렉트론(TEL), 호야, 도쿄오카공업(TOK), 신에츠화학, JSR 등이 일본의 대표적인 반도체 소부장 기업들이다.

이들 중에서도 도쿄일렉트론은 글로벌 3위의 반도체 장비 업체다. 글로벌 시장조사 업체 스테이티스타(Statista)에 따르면 미국의 어플라이드 머티어리얼즈(점유율 16.4%)와 네덜란드의 ASML(15.4%) 다음으로 12.3% 점유율을 갖고 있다. 특히 반도체 장비 중에서도 코터·디벨로터 부문에선 점유율 90%로 압도적으로 세계 1위를 차지하고 있다. 또 웨이퍼 프로버(웨이퍼칩이 정상적으로 작동하는지 검사하는 장비, 세계 1위), 확산로(세계 1위), 세정 장비(세계 2위), 플라스마에칭(세계 2위) 등 반도체 공정 전 부문에 있어서 세계 최고 수준이다.

ASML 등 반도체 장비 업체들은 보통 특정 공정에 특화된 장비를 만드는데, 도쿄일렉트론은 전 세계에서 유일하게 반도체를 만드는 모든 공정에 들어가는 장비를 만든다. 따라서 도쿄일렉트론은 이 세상에 유통되는 반도체 중 자신들을 거치지 않은 반도체는 없다고 자신한다.

도쿄일렉트론은 지난 6월 오는 2027년까지 5년간 1조 엔(9조4000억 원) 이상을 연구·개발(R&D)에 투입하는 경영 계획을 발표했다. 2017~2022년 5년 투자액보다 40%나 늘어난 규모다. 글로벌 공급망 재편과 반도체 기술 혁신에 대응하면서 원천기술력을 토대로 장비 분야의 시장점유율을 공고히 하겠다는 전략이다.

가와이 도시키 최고경영자(CEO)는 “세계 반도체 시장 규모는 2030년에 1조3500억 달러(1700조 원)로 지난해의 배가 될 것”이라며 “한국의 삼성전자와 대만의 TSMC 등 반도체 제조사들이 투자를 강화하는 만큼 장비 업체에 대한 수요도 커질 것”이라고 전망했다. 도쿄일렉트론은 고객사와 공동 연구를 위해 일본 미야기현에 기술혁신센터를 2025년까지 순차적으로 가동할 계획이다.

미·일, 경제판 2+2 회의 가져…반도체 동맹 강화

미국과 일본은 7월 29일 워싱턴에서 양국 외교장관과 경제장관이 참석한 ‘미·일 경제정책협의회(EPCC)’, 이른바 ‘경제판 2+2 회의’를 처음 개최하고 양자컴퓨터나 인공지능(AI) 실용화에 필요한 2나노미터(nm)급 차세대 반도체를 공동 개발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삼성전자와 TSMC가 차세대 반도체 개발을 두고 치열하게 경쟁하는 가운데 미국이 일본과 손을 잡고 대응에 나선 것이다.

양자컴퓨터는 0과 1을 동시에 구현하는 큐비트(quantum bits, qubit)를 통해 일반 컴퓨터로 수만 년이 걸리는 연산을 수십 초에 해낸다. 양자컴퓨터는 미국과 중국이 경쟁하는 대표적인 분야다. 미국은 반도체 설계 분야에서 세계 최강이다. 엔비디아, 애플, 퀄컴, 인텔 등 미국 반도체 기업들은 반도체 설계 분야에서 최고 수준의 기술력을 보유하고 있다.

도쿄일렉트론을 비롯해 일본 반도체 기업들은 소부장 분야에서 세계 최고라는 말을 들어왔다. 일본 요미우리신문은 “미국은 반도체 설계와 개발, 일본은 장비와 소재 분야에 강점을 갖고 있다”며 “양국이 반도체 분야에서 협력하는 것은 이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이번 경제판 2+2 회의는 미국에선 토니 블링컨 국무장관과 지나 러몬도 상무장관, 일본에선 하야시 요시마사 외무상, 하기우다 고이치 경제산업상이 공동 주최했다. 국가들의 관계에서 통상 2+2 회의는 양국의 외교와 국방장관이 참석하는 회의체를 말한다. 미국과 일본은 이번에 2+2 회의를 경제 분야까지 확대했다. 경제판 2+2 회의를 가진 것은 전 세계에서 미국과 일본이 처음이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과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는 지난 1월 화상으로 열린 정상회담에서 기존의 외교·안보 2+2 회의와 별도로 경제판 2+2 회의를 신설하기로 합의했었다. 양국의 동맹관계가 외교, 안보뿐만 아니라 경제와 산업 분야로도 확대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하야시 외무상은 “양국 정부는 더 이상 외교와 안보, 그리고 경제를 떼어 놓고 생각할 수 없다는 공동 인식에 따라 경제정책 협의체를 만들었다”고 밝혔다.

블링컨 국무장관도 “세계 1위와 3위 경제 대국으로서 질서에 기반한 경제를 방어하기 위해 우리가 협력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라고 강조했다. 양국이 경제판 2+2 회의를 신설한 의도는 자유시장경제 질서를 따르지 않고 경제적 강압 행위를 일삼는 중국을 견제해 경제 패권 확장을 막고, 미·일 주도의 인도·태평양 경제 질서를 만들려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다시 말해 양국은 경제 분야에서 중국에 대한 포위망을 더욱 견고하게 구축하려는 것이라고 분석할 수 있다.

이번 회의의 합의사항들 중에서 가장 주목되는 점은 양국이 차세대 반도체 개발을 위한 공동 연구센터를 설립한다는 것이다. 그 내용을 보면 우선 일본이 연말까지 새로운 연구기관인 ‘차세대 반도체 제조기술개발센터’(가칭)를 설립하고, 일본 국책연구기관인 산업기술종합연구소와 이화학연구소, 일본 도쿄국립대 등과 협력해 거점을 구축하기로 했다.

새 연구센터에는 반도체 설계, 장비·소재 개발, 제조 인프라스트럭처 등에서 민간기업들도 참여할 예정이다. 미국 국립반도체기술센터(NSTC)도 공동 연구·개발에 참여해 미국의 인재와 설비 등을 활용할 계획이다.

양국의 공동 연구 과제는 2nm 수준의 차세대 반도체다. 현재 전 세계에서 5nm 미만의 반도체를 생산할 수 있는 곳은 TSMC와 삼성전자밖에 없다. 특히 대만은 10nm 미만 반도체 생산 부문의 세계 시장점유율이 90%에 달하는데, TSMC는 2025년부터 2nm 기술을 이용한 반도체를 생산할 계획이다. 삼성전자도 이때까지 2nm 제품을 출시할 방침이다.

양국의 공동 연구 의도는 중국이 대만에 대한 무력통일 가능성을 고려해 대만 반도체에 대한 의존도를 줄이겠다는 것이다. 보스턴컨설팅그룹(BCG)에 따르면 중국의 반도체 생산능력이 세계 시장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2020년 15%에서 2030년 24%로 확대될 전망이다. 이처럼 반도체 시장에서 존재감을 키우고 있는 중국이 대만을 침공하면 세계 첨단 반도체 공급이 끊길지 모른다는 우려 때문에 미국과 일본이 손을 잡은 것이다.

일본 니혼게이자이 신문은 “대만에서 긴급사태가 발생하더라도 미국과 일본이 첨단 반도체를 안정적으로 조달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며 “양국이 공동 연구를 바탕으로 시범 제조라인을 건설하고 2025년 자체 양산하겠다는 계획”이라고 보도했다.
미·일, 중국 반도체 굴기 저지 총력전
‘칩4’ 반도체 동맹, 중국 견제 수위 높일 듯

미국과 일본은 한국과 대만의 정부 연구기관과 민간기업에도 협력을 요청할 방침이다. 미국은 반도체 시장에서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 이른바 ‘칩4’로 불리는 반도체 동맹을 구축할 계획을 추진하고 있다. 미국의 의도는 미국과 한국, 일본, 대만이 참여하는 반도체 동맹을 만들어 중국을 견제하겠다는 것이다.

미국은 중국의 반도체 개발과 제조를 저지하기 위해 총력전을 벌이고 있다. 블룸버그통신에 따르면 미국 상무부는 최근 자국의 모든 반도체 장비 업체에 14nm 이하 미세 공정 장비를 중국에 수출하지 말라는 내용의 공문을 보냈다. 미국 반도체 장비 업체인 램리서치의 팀 아처 CEO는 “정부의 수출 제한 조치가 확대됐다는 통보를 받았다”면서 “14nm 공정보다 미세한 제조 기술을 적용한 반도체 장비는 중국에 수출하지 않도록 하라는 내용”이라고 밝혔다. 미국의 또 다른 반도체 장비 업체인 KLA의 릭 월러스 CEO도 같은 내용의 수출 제한 조치를 정부로부터 통보받았다고 밝혔다.

미국 정부는 중국의 핵심 반도체 업체 중신궈지(SMIC)에 대해 10nm 이하 미세 공정을 적용하는 반도체 장비를 허가 없이 수출할 수 없도록 제한한 바 있다. 이번에 14nm로 변경했다는 것은 중국의 반도체 개발과 제조를 보다 강력하게 막으려는 의도라고 볼 수 있다. 이에 따라 SMIC뿐만 아니라, 중국에서 운영 중인 TSMC도 첨단 반도체 장비를 도입할 수 없게 된다. SMIC는 현재 14nm 공정 반도체를 생산 중이고, 중국 내 TSMC가 보유한 기술은 16nm 공정에 그치고 있다. 첨단 반도체를 스스로 제조할 수 없으면 차세대 통신, 로봇, AI 등 미래 먹거리인 첨단 산업의 발전이 더뎌질 수밖에 없다.

미국 정부는 이와 함께 자국산 낸드플래시(낸드) 메모리 반도체 장비의 중국 수출을 통제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로이터통신은 미국 정부가 중국 낸드 제조사인 창장메모리(YMTC)를 포함해 중국에서 메모리 반도체를 생산하는 기업에 미국산 제조 장비 수출을 제한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수출 제한 검토 대상은 128단 이상의 고성능 낸드 생산에 쓰이는 반도체 장비로, 스마트폰이나 데이터센터 등 첨단 기기에 탑재되는 낸드 분야를 겨냥한 것이다. 이 경우 중국에서 낸드를 생산하는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에 악영향이 미칠 수 있다. 삼성전자는 중국 시안에 낸드 공장을, SK하이닉스는 중국 우시에 D램 공장과 랴오닝성 다롄에 낸드 공장을 각각 운영하고 있다.

YMTC는 최근 4세대 3차원(3D) 232단 낸드 메모리 반도체를 개발하는 데 성공했다. 칭화유니그룹과 중국 후베이성이 함께 투자해 2016년 설립한 YMTC는 사실상 중국 정부가 소유한 국영 반도체 회사로 분류된다. 현재 200단 이상 낸드 제품 개발을 공식적으로 발표한 곳은 2곳이다. 미국의 마이크론이 7월 232단 낸드 개발을 선언하며 올해 말부터 제품 양산에 들어간다고 밝혔다. SK하이닉스도 8월 3일 238단 낸드 제품 개발을 발표했다. SK하이닉스는 내년 상반기 양산을 준비하고 있다. 미국 정부가 자국산 낸드 메모리 반도체 장비 수출을 제한할 경우 YMTC가 232단 낸드를 양산하는 데 상당한 어려움을 겪을 것으로 보인다.

미국 정부는 또 의회가 통과시킨 ‘반도체 칩과 과학 법’에 따라 앞으로 반도체 산업 육성에 박차를 가할 계획이다. 이 법의 핵심은 미국이 자국의 반도체 산업 발전과 기술적 우위를 유지하기 위해 2800억 달러(368조 원)를 투입한다는 내용이다.

미국 정부는 자국 내 반도체 시설의 건립 및 확장, 현대화를 위해 390억 달러를 지원하고, 상무부의 연구·개발에 110억 달러, 반도체 칩과 공공 무선 공급망 혁신 지원에 540억 달러를 투입한다. 미국 과학기술 분야의 연구 및 지원을 담당하는 국립과학재단(NSF)에도 810억 달러를 지원한다. 특히 반도체 투자에 대한 25%의 세액공제를 신설하는 내용도 담겨 있다.

세액공제는 향후 10년간 240억 달러를 지원하는 효과가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미국에 반도체 공장을 건설하는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를 비롯해 TSMC 등과 인텔 등 미국 기업들이 혜택을 받을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이 법에는 이른바 ‘가드레일’ 조항도 있다. 중국을 비롯해 우려 국가(country of concern)에 향후 10년간 첨단 반도체 시설을 짓거나 기존 시설에 추가로 투자하는 것을 금지하는 내용이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이 법을 적용받게 되면 중국 공장에 대한 추가 증설과 기존 시설의 업그레이드는 사실상 불가능해진다. 미국은 이처럼 중국의 ‘반도체 굴기’를 저지하고 반도체 패권을 장악하기 위해 더욱 적극적으로 나설 것이 분명하다.

글 이장훈 국제문제 애널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