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 좋은 일 했더라도 앞으로 더 많이 해야”

지금 대한민국에서 가장 핫한 인물인 안철수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 원장은 돌연변이가 아니었다. 내성적이면서도 자신의 일에는 미친 듯이 몰두하는 천재성은 멀리는 그의 증조할아버지부터 시작해 점차 진화한 것이었다. 목수였던 증조부의 남다른 교육을 통해 그의 후손은 은행원 의사 벤처사업가(안철수 교수) 과학자의 길을 걷고 있다. 부산에서 아직도 현역으로 환자를 돌보고 있는 안영모 옹으로부터 5대째 이어지는 안철수가(家)의 자녀 교육법을 직접 들어봤다.
안철수 부친 안영모 원장 직격 인터뷰
인터뷰를 약속한 날 범천의원 문을 열고 들어갔더니 다른 개인 병원과 다른 전경이 펼쳐져 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서니 바로 원장 진료실이었다. 대부분의 개인 병원 로비는 환자 대기실 겸 간호사가 차지하고 있는데 간호사는 오히려 뒷방 신세이고 로비가 원장 진료실로 사용되고 있었다.

작은 난로가 있고 그 옆에 진찰용 간이침대가 놓여 있는데 안 옹은 환자들을 간호사보다 먼저 맞이하고 있었다. 안 옹은 따로 인터뷰 시간을 내주지 않고 환자를 보고 쉬는 시간을 이용해 인터뷰에 응했다.

“자녀 교육은 참으로 어려워요. 아이들은 부모가 한 말과 행동을 금방 따라합니다. 부모는 말과 행동 하나하나에 신경을 써야 합니다.”

안 원장은 한 텔레비전 프로그램에서 “부모의 역할은 아이가 책을 읽는 환경을 만들어 주는 것이 중요하다. 아이에게 책을 읽으라고 이야기하지 말고 부모가 직접 책을 읽는 모습을 보여주라”고 강조했다. 부친이 했던 방식대로 그 역시 자신의 자녀 교육에도 적용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자녀 교육의 으뜸으로 ‘배려하는 마음가짐’을 드는 것도 부친과 꼭 닮았다.
안철수 부친 안영모 원장 직격 인터뷰
안철수 부친 안영모 원장 직격 인터뷰
‘안철수 신드롬’의 기원은 증조부

안 옹은 “철수는 중학교 때부터 수학과 과학을 참 잘했다”고 했다. 안 옹 역시 공고에 다닐 때부터 수학에는 자신이 있었다고 한다. 수학 재능은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었다. 안 원장은 서울대 의대를 목표로 공부하면서 기초를 다지면 실력은 저절로 향상된다는 것을 실감했다. 마침내 원했던 서울대 의대에 합격했고 대학원 박사과정을 졸업할 때까지 한 푼의 등록금도 내지 않고 모두 장학생으로 다녔다. 또한 차남 역시 수학을 잘했고 경희대 한의대에 합격했다.

안 옹은 오늘의 안 원장을 있게 한 가족사를 들려줬다. 자신의 할아버지는 양산 서창에서 태어나 목수로 집을 지어주며 이웃들에게 인심을 베풀었다고 한다. 그러다 자식 교육을 위해 부산으로 이주했다. 다행히 선친(안호인)은 부산상업학교에 진학했고 은행 지점장을 지냈다. 이어 안 옹은 공고를 나왔지만 부친의 권유로 서울대 의대에 진학했고 동생은 연세대를 나와 교직에, 막내는 경찰에 투신했다. 안 원장은 아버지를 이어 서울대 의대에 진학했다.
안철수 부친 안영모 원장 직격 인터뷰
오늘날 우리 사회를 뒤흔드는 ‘안철수 현상’의 진원지는 바로 안 원장 증조부의 ‘부산 이주’의 결단 덕분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안 원장 집안은 최근에만 놓고 볼 때 목수-은행원-의사-의대교수·벤처기업가·경영학교수 그리고 정치인 변신(?)-과학자 등으로 5대에 걸쳐 도전과 열정으로 진화를 거듭해 왔다. 이는 마치 한국 근현대사의 눈부신 진화와 닮아 있다고 하면 지나친 비유일까.

수학과 과학 재능은 안 옹의 손녀 안설희 씨에게로 이어지고 있다. 안설희 씨는 유펜(펜실베이니아대) 대학원 석사과정을 졸업하는데 수학과 화학을 전공했다. 안 옹은 손녀가 스탠퍼드대에서 박사과정을 밟을 예정이라고 한다. 3대에 걸친 수학과 과학 재능은 단지 유전적인 재능이라기보다 늘 공부하는 아버지의 뒷모습을 보면서 기초를 다져가며 자기 주도적으로 공부하는 습관의 대물림에서 그 비결을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그런데 부창부수라는 말처럼 안 원장과 부인 김미경 교수(서울대)도 마흔에 ‘법’을 배우고 싶다며 의사를 그만두고 미국 로스쿨에 유학을 갔다. 생화학이 전공인 부인은 5년을 공부한 끝에 캘리포니아 주와 뉴욕 주 변호사 시험에 합격했다. 당시 안 원장도 뒤늦게 미국 MBA 석사과정에 있었기 때문에 학교를 마치고 가족이 도서관에 모두 모여 저녁 늦게까지 공부하기도 했는데 그때가 가장 소중했던 기억이라고 한다.

안 옹은 2남 1녀 자녀들에게 “금전에 눈을 두지 말고 명예를 중히 여겨라. 지금까지 좋은 일을 했더라도 앞으로 더 많이 해야 한다. 평생 남을 위하는 마음으로 살라”고 강조해 왔다. 안 원장이 주식을 기부하며 나눔을 실천하고 있는 것은 모두가 아버지로부터 ‘학습’된 것은 아닐까.

안 옹과 안 원장 가족의 삶과 열정적인 도전을 보면 자식의 현재 모습은 모두가 부모의 말과 행동에서 학습된다는 것을 새삼 느낄 수 있다. 운전면허 시험조차 100점을 받기 위해 ‘열공’했다는 안 원장의 모습은 바로 늘 공부하고 책을 가까이 한 부친 안 옹의 공부 습관에서 비롯된 것이리라.

안 원장이 책을 가까이 하게 된 것은 어린 시절 항상 책을 읽는 아버지 덕분이었다. 부산 범천4동 가난한 동네에서 83세의 나이도 잊은 채 지금도 의사로 활동하는 부친 안 옹은 환자를 보는 틈틈이 책을 가까이 했다. 의학 서적을 보고 일본어 소설을 읽었다고 한다.

안 옹은 1963년부터 ‘범천의원’을 열어 가난한 이웃들의 벗이 되어 왔다. 안 원장은 일제 치하 시절 부산공립공업중학교(현 부산공고)를 졸업하고 서울대 의대에 진학했다. 지금도 그렇지만 공고를 나와 서울대 의대에 합격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안 옹은 “당시 부친이 ‘너는 몸이 약해서 의사가 되는 게 좋겠다’는 말을 듣고 서울대 의대 진학을 결심했다”고 회고한다. 그가 다닌 모교에서는 서울대 의대는 가히 넘을 수 없는 도전이었다. 공고였기에 진학한 선배는 아무도 없었다. 안 옹은 불가능해 보였던 서울대 의대에 보란 듯이 합격했다.


공고 출신으로 서울대 의대에 합격

안 옹은 서울대 의대를 나와 7년간 군의관 복무를 마친 뒤 부산에서 의사의 길을 걸어왔다. “당시 서울대 의대를 나온 동기들은 모두 고향에서 개업했어요. 요즘은 그렇지 않지만 당시에는 그게 전통이었어요. 지금도 나처럼 현역으로 의사하는 친구가 둘 있어요.”

1963년, 갓 돌이 지난 아들 철수를 안고 당시 부산의 판자촌인 범천동에서 병원을 개업했다. 가난한 동네에 병원을 차린 안 원장은 시내 병원의 절반 값을 진료비로 받으며 형편이 어려운 이들을 치료했다. 안 원장은 돈이 없는 이웃들에게는 진료비조차 받지 않았다. 안 원장이 초등학생 시절 아버지는 병원 앞에서 교통사고를 당한 신문 배달 소년을 병원으로 데려가 치료해 줬는데 “어린 학생이 돈이 어디 있겠느냐”며 치료비도 받지 않고 그냥 보내준 일화가 있었다. 이 일이 주위에 알려져 신문에 실렸는데 어린 철수는 이 신문 기사를 보고 아버지에게 크게 감명 받았다고 한다.

안 옹은 군의관으로 복무할 때 외과로 전문의를 땄다고 했다. 전역해 개업하니까 군에서 취득한 전문의가 소용이 없었다고 한다. 개업 당시에는 전문의가 별로 없었던 시절이어서 마치 종합병원처럼 환자를 다 받았다. 산부인과도 받았다고 한다. 안 옹은 의학 서적을 펴고 다시 공부를 시작했다. 마흔 살에 부산대 의대에서 의학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안 옹의 공부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쉰 살에 전문의 시험에 도전했다. 가정의학과 전문의가 되면 여러 과를 진료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전문의는 지정 수련 병원에서 소정의 인턴·레지던트 과정을 이수하고 시험에 합격해야 한다. 안 옹은 3년 동안 서울과 대구, 부산 등에서 강의를 들어야 했다. 쉰 살이 넘은 안 옹으로서는 쉽지 않은 과정이었는데 결국 해냈다.

안 원장은 “전공이 따로 없었던 시대에 의사가 되신 아버지는 56세에 전문의(가정의학과)를 취득하셨다”면서 이때 평생 연구하며 최선을 다하고 도전하는 아버지의 모습에 큰 감명을 받았다고 한다.

세 번에 걸쳐 다른 분야에 도전하고 공부한 안 원장의 열정적인 삶은 바로 아버지로부터 연유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안 옹이 범천의원을 개원한 게 34세(1963년) 때였는데 안 원장이 안철수연구소를 창업한 시기가 공교롭게도 34세(1995년) 때였다. 안 원장은 10년 동안 안철수연구소를 경영하고 대표이사에서 물러나 44세 때 경영학 공부를 위해 미국 유학을 떠났다. 부친이 마흔 살에 박사학위를 받은 것처럼 말이다. 또한 안 옹이 쉰 살에 전문의에 도전한 것처럼 안 원장도 쉰 살인 2011년에 서울대 교수가 되었고 다시 ‘의미 있는 길’을 찾아 새로운 도전을 준비 중이다. 다가오는 대통령 선거에서 최대의 변수는 바로 ‘안철수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안철수 부친 안영모 원장 직격 인터뷰
안철수의 성공 비결은
내성적이어도 리더가 될 수 있다

내성적이어서 친구를 사귀지 못해도 걱정하지 마라

‘내성적인 사람이 성공한다’는 책에서 강조하듯이 내성적인 성격은 단점으로도 작용하지만 오히려 장점이 되어 플러스 효과를 더 많이 낸다. 내성적인 사람은 자기 성찰로 부단히 자기 확장으로 이어지면서 신뢰를 얻곤 하는 것이다. 안철수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장이 바로 여기에 해당한다. 그는 자신을 변호하듯 한 강연회에서 이렇게 말했다.

“젊고 인맥이 넓을수록 기업가가 되기 쉽다고 생각하지만 성공한 기업가들은 대개 내성적이고 중년의 나이에 기업을 만든 경우가 많습니다. 벤처기업 사장 모임에 간 적이 있는데 성공한 기업의 대표일수록 말도 없고 내성적이었어요.” 기업가라면 외향적이어야 한다는 사회적 통념이 그릇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서울시장 후보로 거론되는 안철수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장이 2일 서울 서대문구청에서 열린 한 강연회에 참석해 기자들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왼쪽은 박경철 안동신세계연합클리닉 원장
/강은구기자 egkang@hankyung.com 2011.9.2
서울시장 후보로 거론되는 안철수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장이 2일 서울 서대문구청에서 열린 한 강연회에 참석해 기자들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왼쪽은 박경철 안동신세계연합클리닉 원장 /강은구기자 egkang@hankyung.com 2011.9.2
안 원장은 수줍고 내성적인 성격에 말도 많이 하지 않는 스타일이다. 남 앞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못하는 성격에다 폭넓게 사람을 사귀는 성격도 아니다. 내성적인 안 원장이었지만 현재 ‘안철수 신드롬’이라고 회자될 만큼 사람들은 안철수를 외친다. 흔히 카리스마가 있어야 리더라고 하는데 안 원장은 카리스마와 좀 거리가 있다. 그러나 경영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피터 드러커가 말했듯이 리더십은 카리스마가 아니다. 드러커는 리더십의 본질은 일·책임감·신뢰라고 말한다. 안 원장은 그 누구보다 일·책임감·신뢰의 덕목에서 높은 점수를 받고 있기 때문이다.


책에서 본받고 싶은 역할 모델을 찾아라

안 원장이 애독하는 책들은 철학·정치·경제·문학 등 실로 다양하다. 컴퓨터나 경영 관련 책뿐만 아니라 추리소설도 즐겨 본다. 그런가 하면 ‘손자병법’은 미국 유학 시절 100번 넘게 읽었다고 한다. 이렇듯 우리 시대에 자신의 꿈을 이뤄가고 있는 청소년과 청년들의 ‘멘토’이자 가장 닮고 싶은 ‘역할 모델’로 회자되는 안 원장은 늘 자신을 키운 것은 책이었다고 말한다. 만약 안 원장이 어린 시절부터 책을 가까이 하지 않았다면 오늘날의 안 원장은 존재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가 의대 교수에서 벤처기업가로, 그리고 다시 경영학 교수로 세 번에 걸친 큰 도전에 나서고 성공을 거둘 수 있었던 원동력은 부단한 ‘학습’에서 나왔다.

안 원장의 독서 방법은 독특하다. 안 원장은 책을 읽을 때에는 전체 줄거리를 따라 읽기보다 주인공이나 등장인물 하나하나의 캐릭터에 주목하면서 읽었다. 어린 시절 과학책과 소설책을 좋아했는데 읽은 소설이 이제는 어떤 줄거리인지조차 기억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게 다 ‘등장인물 중심’의 독서 방식을 취했기 때문이다. 책의 줄거리보다 개별적인 인물에 주목하면 한 인간의 내면세계에 훨씬 더 깊숙이 들어갈 수 있고 인간에 대한 이해를 넓힐 수 있다고 한다. 감명 깊게 읽은 책이 무엇이냐고 묻자 “내게는 모든 책이 감명 깊다”는 말로 대신했다.
안철수 부친 안영모 원장 직격 인터뷰
그의 좌우명 또한 책을 통해 찾았다.

“어떤 문제에 부닥치면 나는 미리 남보다 시간을 두세 곱절 더 투자할 각오를 한다. 그것이야말로 평범한 두뇌를 가진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이는 그가 서울대 대학원에 다닐 때 히로나카 헤이스케의 ‘학문의 즐거움’을 읽고 자신의 평생 좌우명으로 삼은 문구다. 안 원장은 “어떤 문제에 부닥치면 나는 미리 남보다 두세 곱절 더 투자할 각오를 한다”고 말한다. 이 문구는 히로나카가 세계적인 수학자가 될 수 있었던 비결이었다.



취재= 최효찬 자녀경영연구소 소장

사진= 이민희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