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에도 거액 연봉자들이 속출해 샐러리맨들의 부러움을 사는 사례가 늘고 있다. 이들은 최고 1백억원을 받기도 한다. 거액 연봉자 대부분은 기업의 실적이 호전됐을 경우 스톡옵션을 통해 일정기간 이후에 막대한 액수의 돈을 거머쥘 수 있다는 조건이 따라붙는 최고경영자들이다. 그래서 일반 샐러리맨들로서는 자신들과는 거리가 먼 이야기처럼 여겨왔다.최근 일반 샐러리맨으로서 22억원을 거머쥔 샐러리맨이 탄생해 눈길을 끌고 있다. 주인공은 환은살로먼스미스바니 증권사의 김경준 부장(33세). 그는 지난해에도 10억원의 연봉을 챙겼다. 그의 직업은 차익거래(현물과 선물간의 가격 차이를 활용한 거래)를 통해 자산을 운용해주는 파생상품운용 펀드매니저. 펀드매니저중에서도 복잡하기로 유명한 파생상품 거래를 전문적으로 운용하는 펀드매니저다. 그가 올해 거액을 챙길 수 있었던 것은 1백억원의 펀드를 가지고 차익거래를 통해 회사에 2백30억원의 순이익을 올려준 대가였다. 이중에는 차익거래와는 별도로 외국투자자들의 한국내 증권투자를 대행해서 얻은 1백억원의 수수료가 포함돼 있다. 김부장은 차익거래는 비교적 위험이 낮은 고도의 투자기법으로 그만큼 수당도 높다고 말한다.◆ 혼저서 수십억원대 거래 처리재미교포 2세인 김경준 부장이 운용한 환은살로먼스미스바니증권의 펀드는 지난해 4월부터 올해 1월까지 9개월동안 1백40억원이 넘는 순익을 거뒀다. 1백억원의 펀드로 이자, 세금 등을 제외하고도 1백37%의 수익을 올린 셈이다. 이같은 수익률은 살로먼스미스바니 뉴욕본사와 전세계 지점 가운데서 최고 수익율이다. 홍콩지점에서 35%, 일본지점에서 20% 정도의 수익률을 올린 것에 비해서도 엄청나게 높은 수익률이다. 뉴욕과 런던지점의 펀드수익률은 마이너스를 기록했다. 이 펀드는 국내에서는 거의 알려지지 않은 차익거래 전용펀드로 레버리지(leverage)효과를 통해 펀드 규모의 3~5배를 움직여 높은 수익을 올릴 수 있었다.김부장은 자신을 포함한 3명이 이같은 수익을 거뒀다고 한다. 정교한 투자시스템과 투자기법을 잘 알고 있으면 많은 인원도 필요없이 투자할 수 있는게 차익거래의 묘미라고 한다. 그가 운영하는 시스템은 미국과 일본에서 운영하고 있는 시스템을 한국의 특성에 맞게 고친 독특한 시스템. 이 시스템은 국내에서 특허를 신청해 놓은 상태다. 자신이 직접 고안한 이 파생상품 운용시스템을 이용하면 혼자서도 수십억원의 거래를 순식간에 처리할 수 있다고 한다.그가 정교한 파생상품투자시스템을 고안할 수 있었던 것은 세계적인 투자은행인 모건스탠리에서의 경험이 크게 도움이 됐다. 모건스탠리은행은 파생상품을 대규모 전산시스템을 통해 운용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1만명의 전체직원 중 2천명이 전산인원일 정도로 전산에 의한 투자를 원칙으로 삼고 있다. 이곳에서는 상품 거래자(trader)들도 우선 전산요원들과의 협의를 거쳐 투자하도록 훈련받는다. 전산시스템에 의한 이러한 투자경험이 한국에서도 큰 효과를 거둔 것같다고 김부장은 스스로 분석한다.그러나 김부장이 한국에 와서 처음부터 투자에서 성공을 거둔 것은 아니다. 모건스탠리 동경지사에서 한국의 환은살로먼스미스바니 증권으로 근무지를 바꾼 2년전만 하더라도 좌절감을 여러차례 겪었다. 한국에 잘못 온 것 아닌가 하는 의문도 일었다. 미국과 일본에서 적중한 투자시스템이 한국에서는 전혀 먹혀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국의 증권시장은 아직 초보단계여서 선진시스템을 그대로 적용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3개월동안 밤새워가며 모건스탠리에서 고안한 시스템을 한국의 투자환경에 적용할 수 있도록 개조작업에 착수하였다. 이 시스템을 바탕으로 97년엔 70억원의 수익을 올렸고 그 대가로 10억원을 연봉으로 받았다.◆ 모건스탠리 입사 등 경력 화려김부장은 세계에서 몇 안되는 파생상품운용 전문 펀드매니저중 한 사람이다. 세계 제일의 금융시장인 뉴욕월가에도 8명의 파생상품운용 펀드매니저가 활동하고 있을 뿐이다. 일본 동경에는 2명의 파생상품 운용 전문 펀드매니저가 활동하고 있다. 파생상품 운용 펀드매니저는 고도의 지식과 전문기법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김부장도 모건스탠리에 입사할 때 3백대1의 경쟁률을 뚫고 동양인으로서는 처음으로 파생상품운용 펀드매니저가 됐다.그가 경쟁이 치열한 파생상품운용 펀드매니저로 발탁된 것은 그의 경력이 절대적으로 작용했다. 그는 89년 코넬대학에서 경제학을 전공했다. 코넬대학 4학년 재학 때에는 동양인으로서는 처음으로 총학생회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총학생회장에 당선되어 코넬대학에 한국학을 개설한 것을 지금도 그는 큰 보람으로 여기고 있다. 그후 미국 시카고대학 경제학 석사를 1년에 마치고 세계적인 자산운용회사인 GE(제너럴 일렉트릭) 캐피털의 M&A부서에서 근무했다. 당시 그는 미국에서는 처음으로 보험사를 인수, 각 부서를 쪼개어 매각하고 핵심부문만을 높은 가격에 되파는 방식을 통해 커다란 수익을 올렸다. 여기서 2년동안 근무한 뒤 와튼스쿨에서 MBA를 받았다. 실무경험과 이론을 한층 높은 차원으로 접목하기 위한 것이었다.그는 6살 때 미국으로 이민간 재미교포 2세다. 집안이 넉넉지 않아 한국에는 한번도 나온 적이 없었다. 대학에 다닐 때에는 학비를 벌기 위해 방학기간을 이용, 아르바이트를 했다.그는 차익거래를 전문적으로 운영하려면 경제 매커니즘 뿐 아니라 숫자에도 뛰어난 감각이 필요하다고 귀띔한다. 경제이론에 입각해 투자시스템을 이용하려면 통계가 주로 활용되는데 이때 숫자를 한눈에 파악할 정도가 돼야 한다는 것이다. 또 실제 투자에 앞서 시뮬레이션에 의한 모의투자를 통해 꼼꼼하게 변수요인을 점검할 필요가 있다고 덧붙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