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프로페셔널 10댄스 국가 대표 장세형·아델 부부

음악에 맞춰 유연하게 움직이는 네 개의 발에는 마치 날개가 달린 듯하다. 서로를 향한 눈빛에는 신뢰와 애정이 가득 넘친다. 댄스 스포트 월드 챔피언 출신 국가 대표인 장세형·장아델 부부다.
‘세계가 인정한 댄스 비결 알려 드리죠’
‘차차차’, ‘룸바’, ‘삼바’ 등의 댄스 이름은 이제 일반 대중에게도 그리 낯설지 않은 이름들일 것이다. 하지만 댄스 스포츠(Dance Sports)가 아니라 댄스 스포트(Dance Sport)라고 불러야 된다는 사실과 아시안 게임에 정식 채택된 엄연한 엘리트 스포츠 종목이라는 사실을 아는 이들은 그리 많지 않다.

“그래도 예전에 비해 인식이 많이 좋아진 셈이죠. 대학에서도 교양과목으로 많이 채택되고 있고 동호회들도 많이 활성화돼 있으니까요.”(장세형)

장세형 씨와 아내 아델은 줄곧 미국에서 활동하다 지난해 말부터 한국에 들어와 한국 프로페셔널 10댄스의 국가 대표로 활동하고 있다. 1년에도 몇 번이나 각종 세계대회와 해외 공연으로 쉴 틈이 없는 이들 부부는 댄스 스포트의 전 종목을 모두 소화할 수 있는 세계 유일의 커플로 유명하다.

댄스 스포트는 크게 ‘탱고’, ‘비엔나 왈츠’, ‘퀵스텝’, ‘차차차’, ‘파소도블레’, ‘자이브’ 등의 인터내셔널 스타일 10댄스와 ‘이스트코스트 스윙’, ‘볼레로’, ‘맘보’ 등의 아메리칸 스타일 9댄스 등으로 나눠지는데, 대부분의 댄서들이 몇몇 자신 있는 특기 분야에만 치중하는데 비해 두 사람은 댄스의 전 종목에서 화려한 수상 실적을 자랑한다.

“그저 우리만 댄스를 즐기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댄스를 좋아하는 더 많은 사람들을 가르치고 싶기 때문에 힘들어도 모든 종목을 소화할 수 있도록 노력했습니다.”(장세형)

댄서의 운명, 그리고 댄서의 사랑

원래 장세형 씨는 태권도 사범으로 활동했던 열혈 태권 청년이었다. 그가 댄스와 인연을 맺게 된 계기도 바로 태권도 때문이었다. “태권도장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다 보니 더 잘 가르치고 싶다는 욕심이 생기더라고요. 그래서 어떻게 하면 즐겁게 아이들에게 태권도를 가르쳐 줄 수 있을까 고민하다 레크리에이션을 배워야겠다고 생각했죠.”(장세형)

레크리에이션 지도자 자격증을 준비하던 중 레크리에이션의 한 종류로 ‘라스트 왈츠’를 배우게 됐다. 그리고 그 순간 태권 청년은 댄스에 온 마음을 빼앗긴다. “사람들이 살면서 타인과 함께 손을 맞잡는 일은 그리 많지 않잖아요. 서로 겨루는 것이 아니라 함께 즐길 수 있는 춤이 너무 좋았어요.”(장세형)

그때부터 태권 청년은 무작정 댄스에 빠졌다. 6년여를 오직 댄스에만 열중했다. 그러던 중 1996년, 그는 인생의 큰 전환기를 맞게 된다. 댄스를 하는 것을 이해하고 지지해 준 어머니와 그에게 댄스를 처음 가르쳐 주었던 한국 레크리에이션의 선각자인 이경렬 교수가 세상을 뜨신 것이다. 그 일이 있은 후 그는 혈혈단신으로 미국행 비행기에 오른다.

“짐이라고는 태권도복 한 벌과 아버지가 마련해 주신 연미복 한 벌이 전부였어요.”(장세형)

당시 연미복 한 벌의 가격은 150만 원 정도. 시골에서 농사를 지으시는 아버지가 얼마나 어렵게 마련해 주신 것인지 너무나 잘 알기에 그는 비행기 안에서 내내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맹세했죠. 세계 챔피언이 되기 전까지는 절대로 다시 돌아오지 않으리라고.”(장세형)
가난한 청년의 유학 생활은 누구나 짐작할 수 있듯 고난과 고통의 연속이었다. 태권도장에서 일하며, 또 레스토랑에서 설거지를 하며 댄스 학원을 다녔다. 마땅히 방을 구할 돈이 없어 일하던 곳 마룻바닥에서만 4년을 기거했다. 미국에 간 지 1년이 지나지 않아 각종 댄스 대회에서 수상하기는 했지만 상황은 별로 나아지지 않았다.

실기만이 아니라 학문적인 토대까지 마련하고 싶다는 생각에 뉴욕대 교육대학원까지 다니느라 일상은 더욱 고달팠다.

하지만 가장 큰 문제는 마음에 드는 파트너를 찾기가 어렵다는 것이었다. 가장 신뢰할 수 있고 서로의 발목을 붙잡는 상대가 아니라 서로에게 날개를 달아줄 수 있는 상대를 찾는 것은 인생의 짝을 찾는 것만큼이나 힘든 일이라고 한다.

“그래서 댄서들은 종종 인터넷 사이트에서 파트너를 찾곤 해요. 서로 비슷한 생각, 비슷한 경력, 비슷한 실력을 지닌 파트너를 찾기 위해서죠.”(장세형)

2007년, 비로소 그에게 최상의 짝이 나타났다. 영국 아가씨 아델이었다. “저 역시 함께 댄스를 출 수 있는 파트너를 찾던 중이었어요. 그러다 세형 씨의 프로필을 보고 e메일로 소통해 가며 서로의 생각을 맞춰 본 끝에 함께 춤춰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죠.”(아델) 아델의 어머니는 세계댄스교사협회(IDTA) 수석 심사위원이다.

그 덕분에 아델은 엄마 뱃속에서부터 엄마와 함께 춤을 춘 타고난 댄서였다. 걸음마보다 댄스를 먼저 배웠던 까닭에 그 어떤 사람보다 자신의 춤을 이해하고 자신과 함께 새로운 경지로 나아갈 파트너를 찾던 아델에게도 장세형 씨는 최적의 파트너였다.

함께 호흡을 맞추기 시작하면서 두 사람의 실력은 눈에 띄게 달라졌다. 그야말로 서로의 발에 날개를 달아준 셈이다. 그렇게 1년여, 함께 댄스에 대한 열정을 불태우던 두 사람은 마침내 부부의 연을 맺게 된다.

2008년 9월 미국 내셔널 챔피언십에서 동메달을 획득한 후 11월에는 아메리칸 스타일 댄스 스포츠 대회로는 세계 최대 규모의 대회인 ‘세계 프로페셔널 라이징 스타 아메리칸 스타일’에서 챔피언 타이틀을 획득했다.

그야말로 난다 긴다 하는 아마추어와 프로 선수들이 모두 참여하는 세계선수권 대회에서 챔피언으로 등극한 것이다.

그 후에도 ‘미국 트리플 크라운 댄스 스포트 챔피언십’ 볼룸 부문 우승 ‘세계 마스터 댄스 스포츠 챔피언십’ 라틴 부문 우승 등 출전하는 대회마다 화려한 수상 실적을 거둔다.

심사위원들은 이들 부부의 현란한 댄스에 “믿을 수 없을 정도의, 시선을 사로잡는, 마법에 빠진 것만 같은”이란 화려한 수식어를 붙여 주었다.
‘세계가 인정한 댄스 비결 알려 드리죠’
댄스로 세계와 한국을 잇고 싶어

2009년 이들 부부는 귀국을 결심한다. 아내에게 자신이 나고 자란 땅과 사랑하는 가족들을 보여주고 싶었던 장세형 씨의 선택이었다. 하지만 그보다 더 큰 이유는 따로 있었다. 이론과 실기를 겸비하며 공부해 온 그동안의 성과를 고국에서 펼쳐나가기 위해서였다.

“공부를 조금 더 해서 실기와 이론이 완벽한 교수가 되어 후배들을 많이 양성하고 싶어요. 댄스로 한국과 세계를 잇는 가교 역할도 하고 싶은 꿈도 있고요.”(장세형)

한국말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아내 아델도 그런 남편의 열정을 이해하고 선뜻 따라주었다.

“말도 잘 통하지 않고, 거리에 나가면 자꾸만 쳐다보는 사람들 때문에 많이 불편하긴 해요.(웃음) 하지만 사랑하는 사람이 있고 그와 마음껏 춤출 수 있으니까 다른 건 별로 힘들다고 생각하지 않아요.”(아델)

장세형 씨 역시 성균관대에서 박사과정 밟으랴, 하루 10시간씩 춤 연습하랴, 특강 등으로 춤 가르치랴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지만 꿈이 있어, 사랑하는 아내가 있어 전혀 힘들지 않단다.

그래서 이들 부부는 너무나 행복하게 매일매일 댄스 슈즈에 사랑과 신뢰라는 이름의 날개를 달고 플로어를 누비는 모양이다.

김성주 객원기자 helieta@empa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