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는 소립자와 성좌 같은 놀라운 과학적 발견과 항생제의 개발, 유전자 해독, 복제 등 의학적 진보, 대량생산, 세계무역, 막대한 부의 창출로 대변되는 경제 기적, 그리고 정보기술(IT) 분야의 눈부신 기술 진보가 있었던 시기였다. 이 과정에서 연구기관과 고등교육기관이 첨병 역할을 했다.

한국 사람들은 교육을 매우 중요시한다. 성균관대는 1398년 설립된 고등 유교 교육기관이라고 들었다. 필자가 만난 한국 학생들은 하나 같이 성실하고 근면했다. 한국 정부는 막대한 자원을 쏟아 부어 세계에서 손꼽힐 만큼 중·고등 교육률이 높은 나라가 됐다.

1995년까지 한국 정부는 고등교육기관의 운영에 깊이 개입했고 대학의 설립 주체와 운영 방식, 입학 절차, 학과 및 단과대학 정원, 등록금, 교수의 인사 정책 등을 모두 관리 감독했다.

이후 규제가 완화되면서 입학과 정원에 대해 대학이 어느 정도 자율성을 갖게 됐지만 서구에 비하면 여전히 엄격한 규제에 묶여 지나친 간섭을 받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제 한국은 세계 15위 경제 대국으로 선진국 반열에 오른 만큼 고등교육에서도 세계적 도전과 현안에 일익을 담당할 때가 됐다. 그러나 이에 필요한 의지와 예산은 아직 충분하지 못한 것 같다.

한국의 고등교육기관들은 순위와 학생 수요 측면에서 일종의 위계 구조를 갖고 있다. 언론에선 일반적으로 KAIST·포스텍(포항공과대)·서울대·고려대·연세대(이상 무순)를 톱5 대학으로 꼽는다. 한국의 교육비 지출은 세계 최고 수준이지만 정부와 공공 부문에서 지원되는 예산은 다른 선진국에 비해 매우 낮은 수준이다.

그런데도 한국 정부는 고등교육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한다. 연구 생산성 측면에서 봐도 한국 대학들은 SSCI(Social Sciences Citation Index·사회과학 논문 인용 색인) 인용 횟수나 기타 기관이 산정한 순위에서 그다지 좋은 성적을 거두지 못하고 있다.

이런 현실이라면 세계 각국의 우수한 학생들이 돈을 내고 한국에 와서 교육을 받거나 우수한 연구 인력이 한국에 와서 연구를 하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세계 유수의 기업이 한국 대학 졸업자를 고용하고 연구비를 지원하려고 하지도 않을 것이다.

한국 정부는 열정 넘치는 기업과 부지런한 근로자들의 힘으로 세계 수준의 기업을 다수 배출했다. 그렇다면 교육산업에서도 그러지 못할 이유가 없다.

필자의 짧은 소견으로는 한국 정부가 교육기관에 대한 존중과 신뢰가 부족해 교육의 세세한 부분까지 관리하면서도 충분한 재원을 지원하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세계적인 대학을 만들어 내기 위한 전략도 갖고 있지 않은 것 같다. 그렇다면 20세기의 혁신을 이끌었던 서구, 그중에서도 미국의 고등교육 시스템을 살펴보자.

첫째, 미국은 정부가 고등교육의 큰 틀을 정하지만 교육행정과 교수진 구성에 대해서는 대학이 자율권을 갖고 있다. 세부적 운영은 철저히 대학의 손에 맡겨 있다는 뜻이다. 그 결과 혁신 능력과 창의력이 세계 최고 수준을 자랑한다.

둘째, 정부는 고등교육에 대한 지원을 비용이 아니라 투자로 보고 학생들에게 여러 경로로 학비를 지원해 주고 있다.

셋째, 고등교육은 비싸지만 그 열매 또한 크다는 인식을 바탕으로 연구·개발에 자금을 지원하고 사회의 여러 문제를 해결하게 한다. 정부는 고등교육의 산물인 인적자원과 연구 지식을 기업이 최대한 활용하도록 하고 기업이 다시 고등교육에 기여하는 선순환 구조를 조성한다. 사회를 대신해 성과 평가 기준을 정하고 엄격히 적용함으로써 고등교육기관의 운영 주체에 철저히 책임을 묻는다.

아시아에서도 이와 비슷한 나라가 있다. 싱가포르와 홍콩이 대표적인데, 적어도 비즈니스 스쿨은 이미 전 세계에서 교수와 학생들을 끌어 모으고 있다. 미래를 개척하고 21세기의 당면 과제를 해결하고자 한다면 한국 정부는 물론이고 고등교육기관의 교수·행정책임자·이사회·기업이 머리를 맞대고 세계 속 한국의 위상에 걸맞은 고등교육기관을 만들어 나아가야 할 것이다.


[경제산책] 21세기 한국의 고등교육
라비 쿠마르 카이스트 경영대 학장


1952년생. 74년 인도공대(IIT) 기계공학과 졸업. 76년 미국 텍사스대(알링턴) 오퍼레이션리서치, 통계학 석사. 81년 미국 노스웨스턴대 경영과학 및 산업공학 박사. 2003년 서던캘리포니아대 경영대학 부학장. 2009년 KAIST 경영대학장(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