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저축은행의 탄생과 소멸은 못난 아들을 둔 비범한 창업자의 비애라고 단순히 표현하기엔 너무나 안타까운 사연이 아닐 수 없다.

지난 2006년 부산저축은행의 박상구 명예회장이 부산에 청산문화복지재단을 세워 그의 제2의 고향인 부산의 청소년들을 위해 장학재단을 설립하게 됐다는 기사를 읽고 눈이 번쩍 뜨였다.

그는 2004년에 부산저축은행의 지분 45%를 자식들에게, 그리고 나머지 45%는 함께 고생한 직원들에게 양도했는데 남은 10%를 가지고 부산에 장학재단을 세웠다는 것이다. 당시에 나는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전형을 보는 것 같아 마음이 뜨거워졌다.

1977년 초에 나는 대학 은사님을 따라 당시 모범 기업 사례로 선정됐던 삼양타이어를 2박 3일간 방문하며 그 실태를 점검했었고, 당시 임직원들의 신망을 온몸에 받던 박상구 사장과 그의 인품에 대한 기억이 늘 뇌리에 박혀 있었다.

그는 당시 수백 명의 가난한 사원들에게 실내체육관에서 합동 결혼식을 주선해 주면서 자신의 딸도 그중에 세워 혼례를 함께 치르게 했는데 젊은 나에게는 무척이나 인상 깊은 사건이었다.

박 회장은 금호그룹 창업자인 박인천 씨의 장조카로, 금호그룹의 모태가 된 광주여객 설립 이전부터 삼촌인 박인천 씨와 함께 사업을 시작하며 삼양타이어 사장에 이르렀으나 1981년에 갑자기 사임 압력을 받고 자기의 지분을 25억 원이라는 헐값에 처분하고 회사를 떠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지분을 처분해 받은 자금으로 부산·대전·광주에서 상호신용금고를 차례로 인수하고 안성에 도가산업을 차려 그를 따라나선 직원들과 함께 경영하기도 했다. 그러나 사업은 순조롭지 않았고, 결국 박 회장은 회사들을 모두 매각하고 직원들과 함께 부산으로 내려와 부산상호신용금고의 경영 정상화에 매달렸다.

박 회장은 직원의 임무를 새롭게 정비, 30명 중 10명은 평상시대로 금고 업무를 보게 했으나, 10명은 대출금을 성실히 갚을 능력이 있는 고객을 찾아 관리하도록 했고, 다른 10명은 1급 건설회사의 어음을 구입하는 임무를 맡겼다.

신용금고의 보증수표로 1급 어음을 사들인 후 이 어음을 다시 일본계 은행인 야마구치은행에 제공하는 일을 6개월 정도 계속하자 이 은행이 드디어 금고의 공신력을 믿고 거금을 대출해 주기 시작했다.

야마구치의 대출은 다른 외국계 은행들의 대출까지 쉽게 끌어들일 수 있게 하면서 부산상호신용금고의 도약에 날개를 달아줬다. 이후 부산(상호)저축은행으로 상호를 변경하고 부산제2저축은행·대전저축은행 등을 잇달아 인수하며 성장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부산저축은행의 신화는 여기까지였다. 회사를 물려받은 아들 박연호 회장은 이후 부동산 붐에 편승해 무리하게 각종 프로젝트 파이낸싱(PF) 대출에 뛰어들었고, 결국 부실화의 여파를 견디지 못한 부산저축은행은 영업정지 처분을 받고 말았고 박연호 회장은 5조 원대의 불법 대출, 회계장부 조작, 감독 당국 매수 등의 혐의로 지난 5월 초 구속됐다. 부산저축은행의 탄생과 소멸은 못난 아들을 둔 비범한 창업자의 비애라고 단순히 표현하기엔 너무나 안타까운 사연이 아닐 수 없다.

[경제산책] 박상구 부산저축은행 설립자 이야기
박상수
경희대 경영대학원장·한국재무학회장

1954년생. 77년 서울대 경영학과 졸업. 86년 미국 시카고대 경영학 석사·박사. 90년 미국 뉴욕주립대(버펄로) 조교수. 95년 경희대 경영대 교수(현). 2001년 기획예산처 연기금투자풀 운영위원(현). 2009년 경희대 경영대학원장(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