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 리포트]
화학 사업에 남다른 애정…소외된 계열사에서 그룹 ‘캐시카우’로


[한경비즈니스=이현주 기자] 롯데그룹은 전통적으로 유통의 강자다. 식품은 비율이 높지 않아도 한국 사업의 모태라는 상징을 갖는다. 화학은 그에 비해 꽤 오랜 기간 주목 받지 못했다. 그런데 최근 달라진 위상이 실감 난다. 공격적인 투자가 화학에 쏟아지고 있다. 그룹 내 ‘백조’로 비상한 롯데케미칼의 성장 과정을 짚어본다.
“5년간 20조 베팅” 신동빈의 미래, ‘화학’에 달렸다
“한국 기업으로부터의 최대 규모의 대미 투자이며 미국인을 위해 일자리 수천 개를 만들었다. 한국은 훌륭한 파트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을 면담하고 트위터를 통해 이같이 말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5월 13일 취임 이후 처음으로 백악관에서 한국 기업 총수와 면담을 가졌다.

신 회장이 환대 받은 배경에는 3조6000억원의 대규모 투자가 있었다. 5월 9일 준공된 미국 남부 루이지애나 주에 자리한 석유화학 공장이다. 롯데케미칼이 지은 에탄크래커(ECC) 공장은 한국 기업이 미국에 지은 화학 공장 가운데 최대 규모다. 트럼프 대통령과 회동 당시 신 회장 옆에는 윤동민 롯데지주 경영전략실장과 김교현 롯데화학 BU장이 함께했다.

이번 백악관 회담은 신 회장의 경영 복귀 이후 화학 분야를 키우는 행보로 주목된다. 대규모 북미 투자로 롯데케미칼의 글로벌 에틸렌 생산 규모는 약 450만 톤, 국내 1위 세계 7위 수준으로 확대됐다. 우즈베키스탄·말레이시아·인도네시아 등 전 세계에 있는 글로벌 생산 기지를 통해 세계적인 화학 회사로 발돋움한다는 계획이다.

롯데그룹은 유통·식품·화학·서비스 분야에서 사업을 영위하고 있다. 그중에서도 백화점·면세점·마트 등 유통 분야가 오랜 기간 기업의 성장 축이었다. 이번 백악관 면담을 계기로 신 회장은 화학 사업에 더 집중할 것으로 보인다. 오프라인 영업점이 한계에 맞닥뜨리면서 유통만으로는 그룹의 미래를 보장할 수 없다.

화학은 최근 3~4년간 그룹의 캐시카우 역할을 한 효자 사업이다. 영업이익으로 보면 그룹의 절반 이상이 화학 부문에서 나왔다. 화학 업종의 슈퍼 사이클이라는 호재가 배경이지만 그룹 내 중심축 변화 관점에서 흥미롭다. 특히 사드(고고도 미사일 방어 체계) 보복 여파로 면세점 이익이 줄어드는 사이 그룹의 핵심 축이 유통 중심에서 유통과 화학 ‘양 날개’로 롯데가 재편되고 있다.
“5년간 20조 베팅” 신동빈의 미래, ‘화학’에 달렸다
M&A로 성장한 회사, 롯데케미칼
롯데의 화학 사업은 알고 보면 꽤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 LG화학과 비교하면 롯데가 화학 역량을 키워 온 전략은 인수·합병(M&A)이다. 몇 차례의 공격적인 M&A를 통해 회사가 커지고 성장의 역사가 시작됐다.

롯데가 화학 사업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것은 롯데케미칼의 전신인 호남석유화학을 인수한 1979년부터다. 공기업 민영화를 통해 당시 여수화학산업의 지분 50%를 롯데가 인수하며 호남석유화학이 탄생했다. 당시만 해도 식품이나 유통에 비해 그룹 내에서 화학은 소외된 사업군이었다.

2003년 현대석유화학(현 롯데케미칼 대산공장) 인수는 성공적인 첫째 딜 사례로 꼽힌다. 당시 현대석유화학은 외환위기 이후 급하게 매물로 나오게 됐다. 제1공장과 똑같은 규모의 제2공장을 짓기 위해 무리하게 차입을 하면서다. 호남석유화학과 LG화학이 컨소시엄을 구성해 50 대 50의 비율로 인수하면서 각각 2공장과 1공장을 얻었다. 인수 금액은 1조8272억원이었다.

연이어 2004년 KP케미칼(현 롯데케미칼 울산공장) 인수는 성장의 발판을 마련하는 또 하나의 M&A였다. 이에 따라 고순도 이소프탈산(PIA), 고순도 테레프탈산(PTA), 파라자일렌(PX) 등 방향족 제품 사업부문을 강화하게 됐다. PIA는 내구성과 가공성이 우수하고 광택이 뛰어나 페트병, 자동차·선박용 페인트, 접착제 등 생산에 투입되며 국내 화학 회사 중 롯데케미칼이 유일하게 생산한다. 이 M&A는 인수금액 1785억원을 이듬해 곧바로 회수할 만큼 잘된 딜로 기록된다. 이후 약 10년간 석유화학의 슈퍼 사이클이 도래하면서 외형도 성장할 수 있었다. 롯데케미칼은 지금까지 국내에서 각각 여수·대산·울산 공장에 생산 기지를 두고 에틸렌·합성수지·화성제품·기초유분을 생산하고 있다.

현대석유화학 이후 또 한 번의 조 단위 딜은 2010년 타이탄케미칼 인수였다. 말레이시아 국영 석유화학사인 타이탄 지분 100%를 1조5223억원에 인수하면서 국내를 넘어 동남아시아 생산 거점을 확보하고 또 신규 시장을 개척하는 토대를 마련할 수 있었다. 롯데타이탄은 지금까지도 롯데케미칼 영업이익의 효자 역할을 하고 있다. 2017년엔 말레이시아 증권거래소에 성공적으로 상장해 기업 가치를 2.5배 이상 높이는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이와 함께 파키스탄 대규모 석유화학 기업인 LCPL(롯데케미칼 파키스탄)을 인수해 해외 자회사의 양대 축을 형성했다.

2016년 삼성의 화학 부문 인수는 롯데케미칼 사상 최대 규모이자 국내 화학 산업 최대 빅딜이었다. 삼성SDI 케미칼 부문(현 롯데첨단소재)과 삼성정밀화학(현 롯데정밀화학)을 2조7915억원에 인수했다. 이를 통해 규모의 경제에 더해 원료를 수직 계열화하고 포트폴리오를 다각화할 수 있었다. 특히 정밀화학 분야에 진출하면서 전통적인 석유화학 기업에서 종합 화학 회사의 면모를 갖추게 됐다.

2018년 기준 롯데케미칼 매출액은 16조5000억원으로, 롯데그룹 전체에서 단일 회사로는 매출 규모가 가장 크다. 특히 롯데케미칼 역대 최대 영업이익을 낸 2017년엔 그룹 영업이익의 약 65%가 화학에서 나왔다.
“5년간 20조 베팅” 신동빈의 미래, ‘화학’에 달렸다
신증설을 포함한 신규 투자도 대부분 성공했다. 이번 미국 루이지애나 주 레이크찰스 ECC·에틸렌글리콜(EG) 공장은 공사 기간 지연과 건설비 등 초과 없이 ‘기한과 예산(on time, on budget)’을 달성했다는 점에서 성공적인 오픈이라는 평가를 얻었다. 미국 엔지니어링 회사 자콥(jacob)의 조사 자료에 따르면 미국의 메가 프로젝트 중 77%가 평균 20개월의 일정이 지연되고 80%가 약 30% 이상 예산을 초과한다.

특히 이번 미국 신설 공장은 원료, 생산 기지, 판매 지역 다변화라는 의미가 있다. 화학 산업은 경기에 민감하다. 유가에 따른 사이클이 필연적이다. 국내 석유화학 기업들은 에틸렌을 주로 나프타를 통해 생산하고 있다. 원료 값이 내려가면 이익을 많이 남기지만 유가 급등기에는 리스크를 안아야 했다. 미국 루이지애나 공장에서는 석유가 아닌 셰일가스에서 나오는 에탄을 원료로 사용한다. 기존 원료인 나프타 의존도를 줄이고 가스 원료 사용 비율을 높이면서 일종의 헤지가 가능하다.

신증설을 통해 특히 에틸렌 생산능력을 확대했다. 최초로 에틸렌을 생산한 1992년 이후 20년 가까이 에틸렌 생산은 열한 배 이상 늘었다. 이번 미국 공장 준공으로 롯데케미칼의 글로벌 에틸렌 생산 규모는 2019년 기준 약 450만 톤이 된다.

에틸렌은 ‘석유화학의 쌀’로 불린다. 모든 것의 시작이다. 에틸렌 등 기초유분을 통해 폴리에틸렌·폴리프로필렌 등 합성수지가 생산되고 이후 플라스틱 가공을 거쳐 최종 제품 생산이 가능해진다. 에틸렌에서 합섬 원료가 나오면 섬유도 생산한다.

석유화학 회사의 규모를 판단하는 기준 중 하나는 바로 에틸렌 생산능력이다. 에틸렌 생산 규모로만 볼 때 국내에서 에틸렌을 생산하는 6개 기업 가운데 롯데케미칼이 가장 크다. 석유화학 업황이 좋으면 이 에틸렌 규모로 우열을 가릴 수 있다. LG화학이 전통적인 석유화학 이외에 첨단 산업인 배터리 등으로 사업 다각화 전략을 편 것과 달리 롯데케미칼은 에틸렌 생산능력에 집중하면서 원료와 포트폴리오 다변화로 성장을 모색한 점에서 차이가 있다.

롯데케미칼은 향후 5년간 국내외 전 사업부문에 걸쳐 50조원을, 그 가운데 화학에 20조원을 투자하기로 했다. 생산 설비 확대와 해외 M&A에 적극 뛰어들 것으로 보인다.
“5년간 20조 베팅” 신동빈의 미래, ‘화학’에 달렸다
신증설 투자로 생산능력 확대
롯데케미칼이 지속적인 체력 비축과 석유화학 사이클에 따른 적재적소에서의 M&A로 지속적으로 성장함에 따라 그룹 내외에서의 위상도 달라졌다. 특히 외부에서 바라볼 때 롯데의 화학은 비주류 사업이었다. 롯데라는 타이틀이 붙지 않았던 이유가 크다. 호남석유화학에서 롯데케미칼로 이름을 바꾼 것은 2012년의 일이다. 1979년 이후 줄곧 호남석유화학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했다. 2005년 한 차례 사옥을 옮길 때 내부적으로 사명 변경에 대한 논의가 있었지만 결국 바꾸지 않았다. 석유화학은 공해산업이라는 인식이 강했고 식품·유통을 중심으로 사세를 확장한 롯데그룹으로선 그룹 이미지와 맞지 않는다는 판단이 작용했을 것이라는 해석이 나온다. 또 B2B 비즈니스라는 것도 배경으로 꼽힌다. “해외 수출도 많이 하는데 이름을 바꾸면 설명하는 데도 어려움이 있고 굳이 잘해 왔는데 무엇하러 바꾸느냐”는 이유에서였다.

2012년 롯데케미칼로 공식적인 이름을 얻게 된 것은 그래서 롯데의 계열사로서의 본격적인 얼굴을 내밀고 롯데의 일원으로 함께 성장한다는 의미가 있다. 특히 롯데지주 출범과 함께 그룹의 중심축으로 부상하고 있다는 해석이 나온다. 지난해 10월에는 신 회장이 약 2조원을 들여 롯데케미칼을 롯데지주 내로 편입하기도 했다.

신 회장은 오랜 기간 화학 사업에 애정을 보여 왔다는 게 그룹 내부의 전언이다. 거슬러 올라가면 신격호 명예회장은 일본 와세다대 화학공학과를 졸업했다. 제과 사업을 하기 전 비누 공장을 만들던 중 미사일에 맞아 날아가 버린 에피소드도 있다. 무엇보다 신동빈 회장이 처음 한국 롯데에 입사해 첫 사회생활을 시작한 곳이 1990년 호남석유화학이다. 당시 상무로 이름을 올려 경영 수업을 받았다. 이후 현재까지 등기이사로 있다.

롯데케미칼을 거친 인사가 현재 롯데그룹의 요직을 차지하고 있다는 점도 재밌는 대목이다. 그룹 내 헤게모니가 ‘식품’에서 ‘유통’으로 그리고 ‘화학’으로 넘어왔다는 것이다. 황각규 롯데지주 부회장이 대표적이다. 그는 1979년 호남석유화학으로 입사한 이후 신 회장을 가까이에서 보좌하기도 했다. 특히 황 부회장은 지주 회사격인 정책본부 국제실에서 근무하며 큰 그림을 그려 왔다. 굵직한 M&A들을 주도하기도 했는데, 대표적으로 삼성의 화학 부문 인수가 황 부회장의 작품이다.

롯데케미칼을 비롯해 롯데의 화학 부문을 총괄하는 김교현 롯데화학 BU장도 신 회장 시대에 새롭게 임명된 리더다. 타이탄 인수 및 운영에서 공을 세웠다. 롯데 화학의 성장 스토리를 이끈 허수영 전부회장의 뒤를 이은 신임 화학 BU장으로, 이번 백악관 회담에도 함께했다. 현재 롯데케미칼 대표인 임병연 부사장은 1989년 호남석유화학 연구소에 입사한 이후 그룹의 요직을 거쳐 올해 1월 롯데케미칼 대표이사 부사장에 올랐다. 그는 황 부회장 직계로 분류되는 인사다.
“5년간 20조 베팅” 신동빈의 미래, ‘화학’에 달렸다
이 밖에 롯데월드 박동기 대표, 롯데로지스틱스 박찬복 대표, 롯데렌탈 이훈기 대표, 롯데지주의 정부옥 HR혁신실장(인사실장) 등도 케미칼 출신이다. 특히 3년 전부터 롯데케미칼이 이익을 많이 남기던 시점부터 롯데 내에서 본격적인 ‘화학 파워’가 형성되고 있다.

더 정확히는 서울대 화학공학과의 힘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한국의 화학 산업을 이끄는 리더들이 서울대 화공과 출신들로 포진돼 있다. 황각규 부회장, 허수영 전 부회장, 임병연 부사장 등이 모두 서울대 화공과 출신이며 허수영 전 부회장과 영원한 라이벌로 불렸던 LG화학의 박진수 이사회 의장도 서울대 화공과를 졸업했다.

롯데그룹 관계자는 “그룹 내부적으로는 신동빈 회장이 애착을 많이 가지고 호남석유화학 시절부터 꾸준히 투자를 하면서 확장해 왔고 2016년 이후 비약적으로 성장하면서 케미칼 출신들이 그룹의 실질적인 자리에 많이 가 있다”고 말했다.

롯데케미칼은 ‘비전 2030’을 통해 2030년까지 매출 50조원, 세계 7위권 업체로 도약하겠다는 목표를 가지고 있다.
“5년간 20조 베팅” 신동빈의 미래, ‘화학’에 달렸다
charis@hankyung.com



[본 기사는 한경비즈니스 제 1226호(2019.05.27 ~ 2019.06.02)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