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대생 vs 인문대생

‘취업 인문학’ 본격 시행 1년. 이쯤에서 실수요자인 취업준비생들의 이야기도 들어봐야 하지 않을까. 그래서 지난해 12월 22일 오후 3시, 대학생 4명을 한자리에 초대했다. 애초에는 기업의 인문학 평가 동향에 대해 가볍게 대화하는 시간으로 구상했지만 웬걸, 이들은 인문학을 사이에 두고 인문대생 2명과 공대생 2명으로 나뉘어 불꽃 튀는 전공 간 ‘맞짱 토론’을 벌였다. 결론적으로 인문학은 공대생에게도 어렵고 인문대생에게도 벅찼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만두지 말고 계속 평가해줬으면 좋겠단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바람직한 인문학 평가법도 함께 찾아봤다.
[취업인문학 실록] 인문학 중요성 공감, 대신 가이드라인이 필요해요!
Q. 현재 인문학은 어떻게 공부하고 있나요?
이태인(이하 태인) 철학 관련 교양과목을 선택해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책에 대해 공부하고 있는데 책을 전부 읽고 철학과 교수님과 문답하는 과정이 어렵더라고요. 무엇보다 힘든 건 인문대생들과의 경쟁이에요. 인문대생들은 이해도 빠르고 발표도 잘 하는데 공대생들은 객관적 사실만 보려는 경향이 있죠.


양준호(이하 준호) 저 역시 교양으로 준비하는데 학점도 중요하다 보니 선뜻 신청하기 힘들더라고요. 전공 공부만도 어려운데 전공과 전혀 관련 없는 교양을 들으면 시험기간에 부담이 크거든요. 태인 학생의 말처럼 인문대생보다 좋은 학점을 받기도 어렵고요. 법과 관련된 교양을 들으면 법학과 학생들이 많고 미디어 과목을 신청하면 미디어 전공자들이 넘쳐나죠.


신수인(이하 수인) 저도 교양으로 대비하고 있긴 하지만 인문대생도 인문학을 교양으로 듣는 건 어려워요. 시간표를 전공에 맞춰야 하니 정말 듣고 싶은 교양과목은 들을 시간이 안 되거든요. 혼자 철학 책을 읽기도 버거워요. 기업에서는 대학 때부터 인문학적 소양을 기르도록 요구하지만 정작 대학이 제대로 지원해주지 못하는 느낌이 들죠.


구희성(이하 희성) 그래서 전 영화나 책을 통해 자연스럽게 습득해요. 영화를 본다면 ‘저 주인공은 왜 저렇게 얘기했을까’처럼 다양한 시각에서 생각해보는 거죠.


Q. 기업이 인문학적 소양을 평가하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요?
태인 모든 직무에 인문학적 소양을 요구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요. 인문학적 소양과 업무 능력이 얼마나 연관돼 있는지도 잘 모르겠고요.

수인 전 공대생에게도 인문학은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신제품을 개발할 때, 단순히 성능이 좋은 제품이 아니라 얼마나 실생활에 도움이 되고 편리한지를 따지는 게 요즘 추세잖아요.

태인 인문학적 소양이 필요한 업무는 다른 담당자에게 맡긴 뒤 나중에 협업하면 되지 않을까요.

수인 협업을 하는 데도 인문학적 소양이 중요하지 않을까요. 다른 부서원들과 원활하게 소통하려면요.

희성 동의해요. 앞서 업무에 도움이 안 되는 것 같다고 했는데 기술이 아무리 중요해도 최종 결정은 결국 사람이 하는 거잖아요. 더 나은 결론을 내려면 부서원과의 원활한 소통이 필수이고 그러려면 인문학이 반드시 필요하죠. 또 우리나라가 최근 급속히 산업화를 이루는 동안 놓쳤던 정성적 요소들도 인문학이 되찾아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요.

준호 공대생은 기계를 다뤄요. 학부 내내 귀에 못이 박히도록 배우는 것도 효율과 품질이죠. 물론 소통도 중요하지만 더 좋은 기술을 보유한 제품을 생산하는 게 저희의 역할이라고 생각해요.

희성 인문학은 나아가 공대와 인문대 두 가지로 양분화 된 현재의 교육제도를 개선할 수 있는 도구일지도 몰라요. 저희 학교는 자연대와 인문대가 아예 캠퍼스 차원으로 나뉘어 있어서 자연대 수업을 듣고 싶어도 거리가 멀어 어렵죠. 결국 자기 전공에 매몰될 수밖에 없는 거예요. 하지만 이번 기회에 공대생도 인문학을 배우면 새로운 기술이 보일 거예요. 인문대생 역시 기술적인 지식이 있어야 하겠지만요.

준호 그러고 보니 주변에 문장이 조금만 길어지면 이해를 못하는 공대생들도 많아요. 공대생들의 사고력이 떨어지고 있는 거죠. 이번 인문학 평가 도입을 계기로 공대생들의 인문학적 소양이 향상된다는 것에는 긍정적이에요. 다만 토익 같은 기존 스펙에 인문학까지 준비해야 한다는 부담감이 있는 건 사실이죠.

태인 특히 현대자동차는 공대생들에게만 역사 에세이를 출제하고 있는데 공대생이 전공 지식과 인문학 두 개를 동시에 준비하기에는 조금 버거워요.

희성 그건 맞아요. 다른 스펙에 대한 부담이 전혀 줄지 않았죠. 좋은 인재를 뽑으려는 기업의 노력에는 긍정적이지만 또 하나의 스펙이 추가된 것만 같아요.


Q. 그럼 이쯤에서 고충도 들어볼까요. 인문학을 준비하는 데 어떤 점이 특히 어렵나요?
수인 확실한 범위가 없다는 점이 아닐까요. 인문학이 단순히 역사만 가리키는 것은 아니잖아요. 또 워낙 주관적이라 면접관마다 평가 기준도 다를 것 같고요. 주변의 금융권 준비생들에게 많이 듣는 이야기가 있어요. 은행들이 최근 인문학 서적 감상문을 내라고 하는데 이 인문학 책의 범위가 어디까지냐는 거죠. 대부분은 철학책을 선택하던데 인문학이라는 건 심리학이 될 수도, 문학이 될 수도 있잖아요. 구체적인 범위를 정해줬으면 좋겠어요.

희성 확실히 인문학을 중시하는 문화가 최근 갑작스럽게 생긴 거라 어떻게 준비해야 할지 난감해요.

준호 맞아요. 중·고등학교 때부터 객관식에 길들여져 있었는데 갑자기 인문학 관련 주제로 에세이를 쓰라고 하니 너무 버거워요.

태인 공대생에게는 인문학이라는 단어 자체가 어려워요. 아예 처음 듣는 내용도 많고요.

수인 인문대생에게도 어려움은 있어요. 모든 인문대생은 당연히 인문학에 능통할 것이라는 선입견 때문이죠. 물론 중·고등학교 때 역사나 윤리 등을 배웠지만 수능 공부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잖아요. 또 인문대도 나름인 게 경영이나 경제는 철학이나 역사보다는 수학에 더 가까워요. 이 점도 감안해줬으면 좋겠어요.
[취업인문학 실록] 인문학 중요성 공감, 대신 가이드라인이 필요해요!
Q. 새로운 인문학 평가도구를 제시해 본다면?
수인 오픈북 형태는 어떨까요. 객관적인 정보는 주되 여기에 대해 얼마나 논리적으로 관점을 펴 나가는지를 보는 거죠. 필기보다는 면접 때 실제로 대화를 해 보는 방식도 좋을 것 같아요. 기존에 많은 기업이 면접 때 시사나 상식에 관해 묻는데 이를 철학 등 인문학 문제로 대체하면 어떨까요. 평소에 인문학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물어야지 시험 직전 급하게 책을 사서 읽고 외워야 하는 단순 암기형 문제는 지양해줬으면 해요.

태인 전 고등학교 때 문과에 있다가 교차 지원으로 공대에 입학했어요. 처음엔 걱정도 많았는데 막상 오니 흥미가 생겼죠. 중요한 건 방향인 것 같아요. 기업이 어떤 인문학을 얼마나 볼 건지 가이드라인만 확실히 제시해주면 제가 수학 지식을 극복하고 공대에 적응한 것처럼 인문학이라는 새로운 영역도 한결 수월하게 습득할 수 있을 것 같아요.

희성 무엇보다 도중에 그만두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그러면 미생의 장그래처럼 스펙은 부족해도 삶에 대해 진지하게 성찰해 본 인재가 현실에서도 좋은 기업에 입사할 수 있는 날이 올지 모르죠. 다만 누가 지시해서가 아니라 인사담당자들이 스스로 인문학적 소양이 중요하다고 생각했으면 좋겠어요.

준호 저도 계속 유지해줬으면 해요. 최근 단순 스펙이 업무와 관련 없다는 이야기도 많이 나오고 있잖아요. 대신 조금 더 근본적인 소양을 물었으면 해요.

희성 맞아요. 이번 기회에 인문학이 신입 채용 외에 우리나라의 교육 문화 자체를 바꿔줬으면 좋겠어요. 답을 정해놓고 다른 사람의 생각을 틀렸다고 이야기하는 게 아니라 남과 다른 의견이 주목받는 사회가 됐으면 좋겠습니다.


글 이도희 기자 | 사진 허태혁 영상 담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