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6월 9일 여의도 63빌딩 8층 한국자동차공업협회 대회의실. 회의를 마치고 기자회견장을 들어서는 한국자동차업계 최고경영진들은 무척이나 상기된 표정이었다.『삼성의 승용차사업 진출과정에 의혹이 있다고 볼 수밖에 없지 않은가.』(정몽규 한국자동차공업협회 회장 - 현대자동차 회장)『삼성의 승용차사업은 진입 자체부터 잘못된 것이다.』(한승준 기아자동차 부회장)『진입할 당시 수급에 문제가 없다던 삼성이 얼마나 지났다고 공급과잉 문제를 들고 나오는가.』(김태구 대우자동차 회장)우리나라 자동차산업을 이끌고 있는 최고경영진들이 삼성을 한 목소리로 비난하고 나섰다. 삼성의 자동차사업 신규진입 이후 한없이못마땅하면서도 공개적인 내색은 자제해왔던 자동차업계가 「연합전선」을 구축해 공개적으로 삼성 비난에 나서기는 이번이 처음.공동성명에 「철부지 어린아이가 어른을 충고하는 겁없는 행위」라는 원색적인 용어까지 동원됐을 정도로 삼성에 대한 오랜 감정이폭발된 자리였다.◆ 원죄론 내세우며 일탈행위 맹공업계가 한 목소리로 삼성공격에 나선 것은 회사별로 사정은 다르지만 삼성의 일탈행동을 더 이상 방치해서는 기존업계가 위기에 빠지겠다는 공통된 생각에서다. 특히 이번 사건의 발단이 된 삼성의 구조조정 주장이 자동차산업 전반에 큰 변수가 될 가능성이 커지고있다는 판단에서다. 게다가 통산부 장·차관이 각종 세미나에서 번갈아가며 삼성의 구미에 맞는 산업구조조정론을 제기해 기존업계의신경을 곤두서게 한 것도 이번 사건이 「연합전」 형태로 발전하게된 배경이다.기존업계가 가장 앞세우고 있는 것은 「삼성의 원죄론」이다. 삼성이 보고서에서 우려하고 있는 공급과잉과 구조조정 주장은 삼성이자동차산업에 신규진입하면서부터 생기기 시작한 문제라는 것이다.따라서 삼성의 신규진입 문제를 의혹화해 문제를 삼아가겠다는 것이다. 회의 참석자들이 저마다 삼성의 신규진입 당시 문제를 거론하고 나선 것은 삼성이 더 이상 일탈행위를 거듭할 때는 「원죄」를 물고 들어가겠다는 일종의 경고로 볼수 있다. 더욱이 이 문제를거론하는 것이 삼성의 이미지에 결코 좋을 일이 없다는 것도 계산에 숨어 있다.업계가 이처럼 「삼성의 원죄」를 비난하고 나선데는 삼성의 신규진입을 허용한 정부를 공격하겠다는 의도도 숨어 있다. 물론 문민정부 초기 여러 가지 이유로 삼성의 신규진입 허용에 「꿀먹은 벙어리」가 될 수밖에 없었던 기존업계의 한풀이 성격도 없다고는 할수 없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정부에도 약점일 수밖에 없는 「원죄론」을 내세워 자동차산업 구조조정을 위해 적대적 M&A도 지원해야 한다는 삼성의 구조조정 논리에 동조하지 말라는 경고가 담겨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런 복합적인 계산이 단숨에 업계의 목소리를 하나로 조율시켰다는게 일반적인 분석이다.이런 가운데서도 기존업계의 입장도 제각기 다를 수밖에 없다.물론 피해당사자인 기아는 기분이 나쁠 수밖에 없다. M&A에 취약한자본구조를 갖고 있는 기아로서는 삼성의 주식매집과 산업스파이사건 등으로 결코 좋지 않은 감정을 갖고 있던터에 이번에는 「성장한계기업」 「경영진간의 갈등상존」 「최고경영진에 대한 불신」등의 용어를 사용해 가며 「기아를 먹게 정부가 도와달라」는 보고서를 내놓았으니 결코 가만 있을 수 없는 상황이다. 이미 삼성의보고서건에 대해 충분한 보고를 받아온 김선홍 기아그룹 회장은 지난 2일 기아자동차판매주식회사 출범식 직후 기자들과 만나 삼성을겨냥해 「달갑지 않은 업체의 신규진입」이라는 표현을 써가며 『이미 2~3년전 구조조정을 할수 있었던 기회를 스스로 포기한 정부가 이제와 구조조정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며 정부와 삼성을 강도높게 비난했었다.5일 언론이 삼성자동차 보고서를 일제히 보도하고 나서자 즉각 삼성에 대한 포문을 열고 검찰고발등 법적대응에 나서는 등 기민한움직임을 보이고 이는 것도 이번 기회에 삼성의 의도를 뿌리째 뽑아버리지 않고는 결코 안정된 경영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기아는 이번 사건이 소강국면에 빠지지 않도록 다양한 전술을 구사해가며 장기화시키겠다는 전략이다.쌍용자동차도 피해당사자로 분류되지만 기아보다는 소극적이다. 물론 12일 전경련회장단회의에 김석준그룹회장이 김선홍회장과 함께나와 삼성보고서에 대한 불만을 토로했고 이종규사장도 협회회의에참석해 삼성비난에 동참했지만 기아 수준의 적극적인 대응은 하지않고 있다. 일부에서는 협회회의에서 이종규사장이 삼성에 대한 비난의 강도를 낮추자는 의견을 냈다는 설도 있지만 확인되지 않은이야기다. 어쨌든 자구노력에 신경쓰기도 바쁜 쌍용으로서도 「회생가능성이 없는 기업」이라는 평가가 엄청나게 기분나쁜 것은 사실이다.◆ 현대, ‘2위로 밀릴지도’ 우려속 앞장현대자동차는 일견 유엔군처럼 보인다. 협회회원사가 삼성에게 뺨을 맞았는데 회장사로서 가만히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기 때문이다. 정몽규회장이 기아의 SOS에 적극 호응해 삼성 공격에 앞장선것도 업계 맏형 역할인 셈이다. 하지만 현대라고 삼성자동차에 감정이 좋을 리가 없다. 대우경제연구소가 내부용으로 작성한 보고서에 따르면 삼성이 기아를 인수하면 단기적으로는 현대가 계속 1위자리를 유지하겠지만 중장기적으로는 현대가 2위로 밀려날 수도 있다는 분석이다. 따라서 현대도 삼성이 기아에 관심을 갖는 것 자체에 대해 경계심을 풀수 없는 입장이다. 그런 까닭에 현대도 이번사건이 현대에 마이너스가 되지 않는만큼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지는 않지만 삼성의 이미지가 손상될 가능성이 높다는 점에서 장기화되기를 바라는 심정이다. 물론 현대도 이번 사건에 뒤늦게 포문을열 가능성도 있다. 삼성이 보고서를 「OO자동차(현대자동차)」가악의적으로 배포했다고 비난하고 있기 때문이다.현대는 삼성의 이같은 주장에 대해 보고서 내용이 문제의 발단인데도 중요하지 않은 유포과정을 문제삼아 삼성이 본질을 흐리려 한다고 비난하고 있다. 따라서 삼성이 공개적으로 현대를 물고들어갈경우 본격적으로 삼성의 「원죄론」을 들고 나올 가능성도 없지 않다. 그럴 경우 소강국면으로 접어들고 있는 삼성-기존업계간 전쟁은 휴전없는 「2차대전」으로 확산될 수도 있다.업계에서는 삼성이 만약 기아자동차의 M&A에 나선다면 현대는 기아를 돕는 「백기사」로 나설 것이라는 시각도 만만치 않다. 하나의시나리오이긴 하지만.대우는 한쪽 다리만을 걸친 상태다. 삼성이 분명 껄끄러운 상대지만 이번 건은 대우와 직접적인 관계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김태구회장 자신이 삼성의 신규진입 당시 협회회장을 맡아 신규진입을앞장서 반대했던만큼 삼성에 기분이 좋을리 없다. 김회장이 두차례의 협회 공동기자회견에서 삼성의 공급과잉 주장을 강도 높게 비난한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하지만 삼성자동차는 이런 업계의 반응에 『어쨌든 업계에 혼란을야기해 미안하다』고 답할 생각은 없어 보인다. 개인적인 보고서였고 결코 외부에 공개적으로 유포한 적이 없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오히려 이런 보고서를 기존업계가 그토록 민감하게 반응해「마녀사냥」하듯이 공격해대는게 무슨 저의인지 모르겠다는 반응이다.따라서 삼성의 보고서를 놓고 벌어지고 있는 업계간 갈등은 장기화가 불가피해 보인다. 세계시장을 놓고 경쟁력 제고에 주력해야 하는 시점에 삼성의 보고서로 시작된 다툼이 국내 자동차산업 발전에결코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기존업계와 삼성 모두 깨달아야하는데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