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면 클수록 더욱 좋다(The bigger, the better)」.20세기말 세계 산업계를 이런 명제가 지배하고 있다. 거대기업들이덩치를 더 키우기 위해 짝짓기 경쟁에 들어간 것이다. 금융기관이나 제조업체만이 아니다. 회계법인(KPMG - 언스트& 영), 증권거래소(나스닥-아멕스)까지도 가세하고 있다. 마치 짝을 짓지 못하면 21세기로 가는 경쟁대열에서 낙오할 듯한 양상이다.급기야 이같은 거대기업의 합병을 일컫는 신조어까지 등장했다. 이른바 「메가 머저(Mega Merger·거대합병)」열풍이다. 메가 머저라는 용어가 누구에 의해 언제부터 쓰였는지는 분명치 않다. 다만90년대 후반의 트렌드라는 것만은 확실하다. 영국의 M&A전문 월간지 어퀴지션스에 따르면 90년대초만 해도 전세계의 M&A 규모는 연간 4천억달러 안팎이었다. 그러던 것이 95년에는 8천억달러로 늘어났고 작년에는 무려 1조6천억달러에 달했다. 거대기업간의 M&A가그만큼 늘어났다는 증거다.그중에도 미국기업들의 M&A 열기는 가히 「광풍」이라 할만하다.지난해 미국기업들의 M&A총액은 96년대비 54%나 증가한 9천1백50억달러에 달했다. 한 통계에 따르면 1시간42분마다 1건 꼴로M&A가 이뤄진 셈이라고 한다. 「레이더스(기업사냥꾼)」들이 활개를 쳤던 80년대말의 3시간당 1건보다도 더 왕성하게 인수합병이이뤄진 것이다.메가 머저가 90년대 후반의 현상이라는 것은 지금까지 이루어진 세계 10대 M&A중 9건이 96년 이후에 이루어진 사실로도 확인된다.RJR 나비스코와 콜베르크 크래비스(KKR)의 합병(88년10월)만이예외다. 특히 작년말부터는 「열병(fever)」이라는 표현이 어울릴만큼 메가 머저가 봇물을 이루고 있다. 외신들은 합병소식을 전할 때마다 『또하나의 메가 머저…』라는 구절을 관용구로 사용할정도다.◆ 첫 신호탄 ‘MCI - 월드콤’ 합병그 첫 신호탄은 작년 11월 발표된 미국의 통신회사 MCI와 월드콤의합병결정이었다. 두 회사의 합병규모(주식시가총액기준)는4백34억달러. 당시만 해도 사상최대의 M&A였다. 뒤이어 12월에는스위스의 양대은행 SBC와 UBS가 합병계획을 발표했다. 또 올 2월에는 제약회사인 글락소 웰컴과 스미스클라인 비첨이 합병 릴레이의바통을 이어받았다.(이 계획은 최고경영자간 역할분담 문제로 무산됐다)다시 지난 4월6일. 이번에는 미국의 금융기관들이 세계를 경악케했다. 씨티코프와 트래블러스가 전격적으로 합병을 발표한 것. 무려 7백26억달러에 달하는 거대 M&A다. MCI와 월드콤이 세운 「사상최대」기록이 불과 5개월만에 깨진 것이다. 미국 금융기관들의 합병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1주일 후인 4월13일에는 뱅크아메리카와 네이션스뱅크, 뱅크원과 퍼스트시카고 은행이 동시에 합병을 발표했다. 흡사 씨티코프와 트래블러스의 합병소식에 쫓겨 서둘러 합치는 듯한 모습이었다.미국 금융기관들이 준 충격이 채 가시기도 전인 5월7일 또다시 놀라운 소식이 전해졌다. 독일의 다임러 벤츠와 미국의 크라이슬러가합병을 발표한 것이다. 대서양을 넘어 이루어진 이 합병소식은 세계 자동차산업의 재편을 재촉하는 기폭제가 되고 있다. 메가 머저의 열기는 5월11일 또 한차례 확인됐다. 이날 하루 동안 굵직한M&A만 7건이 발표됐다. 통신업체인 SBC커뮤니케이션스와 아메리테크, 영화음반업체인 시그램과 폴리그램 등이 그 주인공이다. 이들의 합병규모도 1천억달러에 달했다.거대기업들이 이처럼 메가 머저로 덩치 키우기에 열을 올리는 배경으론 역시 세계 시장의 통합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세계 시장이 하나가 돼 글로벌 경쟁이 가열되면서 기업들이 규모 확대를 통해 시장지배력을 강화하려 하고 있는 것이다. 이젠 자국 시장에서의 1위가 아니라 세계시장에서의 1위 자리가 중요해졌다는 얘기다.거대기업간에 서로의 약점을 보완하자는 이른바「윈-윈(win-win)」전략도 세계 시장에서의 대경쟁을 염두에 둔것이다.그런데 마치 릴레이처럼 이어지고 있는 이 M&A 사례들을 들여다보면 메가 머저가 갖는 특징의 중요한 한 단면을 엿볼 수 있다. 「상승 작용」이 바로 그것이다. 즉, 어느 두 업체가 합병을 하면 그에 자극받아 같은 업종의 다른 업체들도 짝짓기에 나서는 것이다.씨티코프와 트래블러스의 합병이 뱅크원-퍼스트시카고, 네이션스뱅크-뱅크아메리카의 합병으로 이어진 게 단적인 예다.◆ “큰 것이 좋다”… 세기말 산업계 지배제약업계에서는 이런 현상이 더욱 두드러진다. 95년 이전까지 세계최대의 제약업체는 미국의 머크였다. 그러나 95년 영국의 글락소와웰컴이 합병하면서 그 자리를 찬탈했다. 뒤이어 96년엔 스위스의산도즈와 시바가이기가 노바티스로 합병, 1위에 올라섰다. 그리고올들어서는 또다시 글락소 웰컴이 1위 탈환을 위해 스미스클라인비첨과의 합병을 추진했었다. 순위 다툼은 방위산업분야에서도 치열했다. 90년대초 미국에는 15개의 방위산업체가 있었다. 그런데90년대 중반 수차례의 인수합병을 거쳐 지금은 보잉, 록히드 마틴,레이티온의 3두체제로 정리됐다.이같은 사례들이 보여주듯 이제 세계 산업계에서 「작은 것이 아름답다」는 명제는 80년대의 테제로 퇴색됐다. 대신 「큰 것이 아름답다」는 안티 테제가 세기말의 산업계를 지배하고 있는 것이다.그리고 어느 외국언론이 『Bigger means better(더 큰 것이 더 좋다)』라고 표현했듯이 「크다」가 「좋다」와 동의어로 인식되는게요즘 세계 산업계의 큰 흐름이다.◆ 거대합병 vs 독점 규제초대형 기업합병인 메가머저의 아킬레스 건은 역시 독점 문제다.그렇지 않아도 시장지배력이 큰 거대회사들이 합병, 골리앗 기업으로 커지면서 시장을 독점해버려 횡포를 부릴 수 있다는 우려다. 세계 각국이 오래 전부터 공정한 시장경쟁을 해칠 수 있는 독점을 법으로 엄격히 금지해왔다는 점에서 최근 메가머저에 대한 각국 정부의 대응은 무척 관심거리다.한데 이 대목에서 흥미로운 것은 주요 선진국의 경우 최근 거대기업간 짝짓기에 대해 무척 관대하다는 것이다. 지난 4월초 씨티코프와 트래블러스의 합병이 발표되자 미국 법무부 독점금지위원회는하루만에 즉각 OK사인을 냈다. 일반은행과 보험 증권등 금융산업간업무영역을 철저히 구분, 겸업을 금지해온 그동안의 미국 정부 태도에 비춰 씨티코프와 트래블러스간의 합병 뉴스만큼이나 놀라운「사건」이었다. 물론 씨티코프와 트래블러스는 업무영역을 구분하는 현행법을 적절히 지키는 범위에서 합병계획을 발표했다. 어쨌든미국 상업은행의 대표격인 씨티코프와 보험 증권 전문인 트래블러스의 합병승인은 기존의 상식으론 불가능했던 일이라는 점에서 미국정부의 반응은 주목할 만하다. 게다가 미 상원 금융위원회 다마토 의장은 한술 더 떠 『차제에 금융관련법을 대폭 손질할 것』이라며 씨티코프와 트래블러스의 합병을 지원사격까지 했다.사실 미국 정부는 지난 2∼3년간 빈발한 거대기업 합병에 대해 상당히 우호적인 태도를 보여왔다. 독점 폐해보다는 자국기업의 경쟁력 강화를 중시해서다. 지난해 보잉사가 맥도널 더글러스(MD) 인수를 추진했을 때 두 눈에 쌍심지를 켠 곳은 미 법무부가 아니라 유럽의 에어버스였다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당시 에어버스측은『경쟁기업의 씨를 말리겠다는 파렴치한 욕심』이라며 원색적인 비난을 퍼부었고 EU집행위원회도 반독점 기준을 들먹이며 반발했지만미국 정부는 끝까지 보잉을 싸고 돌았다. 보잉과 MD의 합병을 통해미국 항공산업 재편을 가속화하고 세계 시장을 제패토록 했을 때의자국 실리를 시장독점보다 우선시했기 때문이다.일본 정부도 마찬가지다. 까다롭기로 유명한 일본 공정거래위원회는 지난 96년 미쓰이석유화학과 도아츠화학의 합병을 군말없이 허용했다. 수지원료인 페놀시장의 60%를 한 회사가 장악하게 되는 메가톤급 합병이었는데도 말이다. 일본 공정위는 그동안 시장점유율이 25%를 넘거나, 시장점유율 15%이상이면서 1위인 기업의 합병을불허해온 터였다. 세계시장의 대통합과 글로벌 경쟁의 심화는 자국시장에서의 반독점 규제를 무용지물로 만들어 버리고 있는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