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69)이 돌아왔다. 해외를 떠돈 지 5년 6개월 만이다. 그러나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지는 못했다. 그를 맞이한 것은 약 1.4평짜리 독방이었다. 검찰이 그를 6월16일 41조원 분식회계, 10조원 사기대출, 200억달러 외환유출 등의 협의로 구속, 수감한 것이다.그가 떠난 것은 1999년 10월이다. 당시 대우그룹은 9월6일 이미 (주)대우, 대우자동차를 제외한 10개 계열사가 은행관리에 들어선 상태. 그룹 해체 작업이 긴박하게 진행되던 와중에 중국 옌타이의 대우자동차 공장 준공식 참석차 출국한 이후 돌아오지 않고 기나긴 도피생활을 시작됐다.외국생활의 뿌리는 ‘세계경영’에서 찾을 수 있다. 대우그룹은 외환위기가 터지기 전인 95년부터 ‘세계경영’의 기치를 내걸었다. 그리고 공격 일변도로 해외사업을 추진했다. 해외사업의 축은 자동차였다. 97년 말까지 중국, 인도, 폴란드, 루마니아, 체코, 우즈베키스탄 등지에 총 14개의 해외 합작공장을 건설하거나 인수했다. 불행하게도 해외공장의 가동률은 50%를 넘지 못했다. 운전자금까지 국내외 차입에 의존해야 했다. 이른바 ‘차입경영’으로 ‘세계경영’에 가속도를 낸 것이다. 외환위기는 그의 꿈을 깼다. 국가신용이 곤두박질치면서 그는 궁지에 몰렸다. 98년 10월 노무라증권 서울지점이 배포한 ‘대우에 비상벨이 울리고 있다’는 보고서는 히로시마에 떨어진 원자폭탄만큼이나 강력했다.대우에 대한 금융권의 자금회수가 빨라지기 시작했다. 자산을 매각하고, 사재를 담보로 내놓으며 버텼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한 번 깨진 시장의 믿음을 되사긴 어려웠다.그의 도피배경은 아직 확실치가 않다. 그는 자신의 출국과 관련 두 번 발언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권유로 출국했다.’(2003년 1월 미국 경제전문지 <포춘>과의 인터뷰) ‘그룹임원과 채권단의 권유로 떠났다.’(6월14일 대검찰청 중앙수사부 브리핑) 하지만 진실은 아직 땅에 묻혀 있다.지난 6월14일 새벽 베트남 하노이에서 인천으로 향하던 항공기 안에서 그는 귀국배경을 짧게 설명했다. “책임을 지려고 돌아갑니다.” 이것이 전부였다. 그리고 다시 입을 닫았다. 대변인 격인 백기승 전 대우그룹 홍보이사는 “대우문제에 대한 사법절차가 끝난데다 건강이 허용할 때 대우문제를 정리해야겠다는 생각에서 귀국을 결심한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점점 악화되고 있는 건강상태가 귀국결심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또 일각에서는 모든 것을 털어놓은 뒤 홀가분하게 여생을 고국에서 지내고 싶다는 생각에서 돌아올 결심을 했을 것이라는 분석도 제기된다. 이외에도 국내 여론이 동정적으로 바뀌고 있다고 판단했다거나 참여정부와의 물밑협의 끝에 귀국을 결정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추측도 나오고 있다.향후 김 전 회장에 대한 수사방향은 구속영장에도 나타나 있듯이 분식회계, 사기대출, 외환유출 등 크게 3가지로 정리된다. 이중 외환유출 문제는 그가 가장 민감하게 받아들이는 대목이다. 법원은 대우 해외법인이 허가 없이 차입해 빼돌린 20조7,000억원과 대우자동차의 수출대금을 영국에 있는 금융계좌에 불법적으로 송금한 혐의에 대해 유죄판결을 내렸다. 이 점에 대해서는 김 전 회장의 입장도 완강하다. ‘모두 차입금을 갚는 데 썼다’는 것이다.검찰의 수사와는 별도로 그의 공과에 대한 재평가 논란도 끊이지 않을 듯하다. 그의 기업가정신과 세계경영에 대한 재해석, 평가가 다시 이뤄져야 한다는 주장이 최근 제기되고 있다.그가 세운 대우그룹은 한때 국내 재계순위 2위까지 오른 한국경제의 간판기업 중의 하나였다. 따라서 그와 대우가 명멸해가는 과정이야말로 기업을 경영하는 경영인들에게 하나의 훌륭한 반면교사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