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월 롯데백화점 명품관 에비뉴엘 개관으로 불이 붙은 백화점간 명품 유치경쟁은 향후 더욱 가열될 전망이다. 우선 신세계가 내년 상반기 명품관을 열 예정이다. 인접한 롯데 에비뉴엘과의 ‘전쟁’이 불을 보듯 뻔하다. 갤러리아와 현대백화점도 손놓고 있을 리가 없다. 차별화 차원에서 더 많은 명품브랜드 유치에 나서고 있다. 서울에서의 치열한 경쟁이 지방으로까지 이어질 전망이다. 지방 소비자의 명품 수요가 점점 늘고 있어 백화점 입장에서도 방관할 수만은 없다.백화점들이 명품브랜드 유치에 적극 나설수록 해외 명품브랜드의 콧대는 높아지기 마련이다. 상대적으로 백화점의 자세는 점점 낮아질 수밖에 없다. 샤넬, 루이비통, 에르메스 같은 최고급 브랜드를 잡기 위한 백화점의 노력은 눈물겹다. 이들이 부당한 횡포를 부려도 속수무책 당할 수밖에 없을 정도다.롯데는 명품관 에비뉴엘을 개점하면서 명품브랜드의 오만함으로 몸살을 앓았다. 루이비통, 샤넬, 까르띠에, 불가리 등 4대 명품을 로열층인 1층에 유치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끝내 반쪽짜리 개점에 만족해야 했다. 샤넬과 함께 ‘명품 중의 명품’으로 꼽히는 루이비통의 매장공사가 늦어져 개점일을 그만 맞추지 못하고 말았다. 롯데 경영진은 속으로만 애를 태웠을 뿐 어쩔 도리가 없었다. 롯데백화점은 99년 본점이 루이비통과 샤넬 등 명품브랜드를 유치하는 과정에서도 루이비통 입점을 포기하는 등 곤욕을 치른 바가 있다. 당시 루이비통이 라이벌인 샤넬보다 더 좋은 조건을 요구했기 때문에 들어줄 수가 없었던 것이다.‘명품의 메카’라고 자부하는 갤러리아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지난해 9월 200억원을 들여 기존의 패션관을 리뉴얼해 제2명품관인 웨스트를 열면서 루이비통의 까다로운 요구를 모두 들어줘야만 했다. 당시 루이비통이 백화점을 통해 매장으로 들어가지 않고 길거리에서 바로 매장 진입이 가능하도록 별도의 입구를 내달라며 고집을 부렸다. 루이비통이 길거리 쪽 별도의 문을 통해 단독매장처럼 보이는 효과를 노린 것이다. 갤러리아는 심혈을 기울인 전체 건물디자인의 컨셉이 허물어질 것을 우려해 처음에는 거절했지만 끝내 수용할 수밖에 없었다.이처럼 백화점들이 허리를 숙이면서 해외 명품브랜드는 국내 브랜드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혜택을 누린다. 보통 해외 명품브랜드의 수수료율은 10%선. 매달 수수료로 20~30%를 내는 국내업체들에 비해 턱없이 저렴하다. 매장위치도 ‘로열층’인 백화점 1층의 ‘노른자’ 위치를 고집한다. 이로 인해 화장품, 잡화로 채워지던 백화점 1층이 명품매장으로 변했다.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가장 눈에 잘 띄는 곳에는 어김없이 샤넬이나 루이비통, 구찌 등의 매장이 자리잡고 있다. 일부는 보다 넓은 면적을 요구하며 들어주지 않으면 옮길 것이라고 으름장을 놓기도 한다.명품브랜드의 콧대는 점점 높아지고 있지만, 백화점들은 단호하게 대처하지 못하고 있다. ‘대중백화점’을 자처하던 롯데백화점과 ‘생활 속의 백화점’을 내세우던 신세계도 고급백화점으로의 변신을 꾀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외환위기로 중산층이 무너지고 할인점의 역할이 커짐에 따라 백화점의 노선수정은 불가피해졌다. 98년 강북의 백화점들은 연간 매출이 10~20% 곤두박질쳤지만 현대백화점 압구정점은 2%가 줄었을 뿐이다. 여기서 교훈을 얻은 백화점들은 ‘고급화’에서 살길을 찾았고, 이 과정에서 명품브랜드를 하나라도 더 유치하기 위해 총력전을 펼친 것이다. 서울시내 백화점 한 명품바이어는 “이익과 상관없이 고객의 내점이 많아지고 품격도 올라가기 때문에 명품브랜드 유치에 매달리는 것”이라고 털어놓았다.아울러 단번에 백화점 매출을 끌어올릴 수 있다는 점도 명품브랜드 유치에 매달리는 이유 중 하나다. 영국 여배우 제인 벌킨의 이름에서 따온 ‘에르메스 벌킨’ 악어가죽 가방은 2,000만~3,000만원을 호가하는 명품. 10개만 팔아도 단번에 2억~3억원의 매출이 발생한다.하지만 수량이 한정돼 있는 탓에 국내에서는 없어서 못 팔 정도다.명품 입점은 일반브랜드에 비해 상대적으로 긴 시간이 소요된다. 국내 현지법인과 입점 협상을 벌이지만 외국 본사가 모든 결정권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입점까지 보통 1년 정도 걸리지만 때로는 3~4년이 걸리는 경우도 적지 않다. 이렇게 많은 시간이 들어가는 것은 명품브랜드들이 수수료율, 인테리어 비용 지원, 매장면적 등에서 무리한 조건을 내걸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경쟁브랜드와 비교해 보다 나은 조건을 요구하는 경우 협상은 더욱 길어지기 마련이다. 이에 대해 명품브랜드 관계자들은 “모든 백화점의 입점요구를 들어줄 수는 없는 것 아니냐”는 입장이다. 원칙대로 치밀한 시장분석을 통해 유리한 곳에 입점을 결정한다는 것이다. 보통 협상은 백화점 명품바이어들이 책임지고 있지만 사정이 여의치 않을 경우 백화점 오너들이 직접 나선다. 오너들은 주로 외국 본사를 방문해 직접 입점을 요청하거나 한국법인 CEO와 잦은 교류를 가지면서 입점분위기를 만드는 데 힘쓴다.유치에 성공했다고 손을 놓으면 곤란하다. 지리적으로 가까운 경쟁백화점들이 호시탐탐 해당 브랜드의 입점을 노리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명품바이어는 물론 오너들까지 나서서 이른바 ‘관리’에 들어간다. 한편 해외 명품브랜드의 콧대가 점점 높아지면서 저자세로 일관하는 백화점의 태도를 지적하는 목소리도 적지 않다. 무작정 명품브랜드를 유치하고 보자는 백화점들의 과열경쟁이 명품브랜드의 프리미엄만 높였다는 것이다.INTERVIEW / 오일균 갤러리아 압구정점 영업총괄팀장‘브랜드 정보파악이 가장 중요’명품바이어는 백화점에서 명품브랜드 유치를 위해 밤낮으로 뛰어다니는 사람들이다. 이들의 활약 여부에 따라 백화점간 희비가 엇갈리는 경우가 적지 않다. 갤러리아백화점 명품관의 영업총괄팀장 오일균 부장(45)은 업계에서 첫손가락에 꼽는 노련한 명품바이어다.1988년 입사한 그는 명품관 개관시절부터 명품바이어로 일했다. 샤넬, 루이비통, 프라다, 구찌 등이 그의 손을 거친 브랜드다. 그래서인지 오부장은 갤러리아 명품관에 대한 자부심으로 똘똘 뭉쳐 있다. 명품의 기준이 뭐냐고 물었더니 “갤러리아 명품관에 입점한 브랜드가 기준”이라며 잘라 말할 정도다.명품바이어로서는 ‘백전노장’인 그도 명품 유치의 어려움은 지금도 여전하다고 털어놓는다. “샤넬, 루이비통 같은 브랜드는 입점까지 보통 2~3년 정도 걸립니다. 백화점 내 매장위치나 면적 등을 정하는 과정에서 요구하는 것이 워낙 까다롭기 때문입니다.” 더군다나 명품브랜드 관계자들이 백화점 명품바이어보다 한국시장을 더 많이 알고 있을 정도라고 한다. 치밀한 상권분석을 통해 소비자들의 소비패턴은 물론 연령별로 원하는 상품에 대한 데이터를 갖고 입점과 매장의 위치, 면적 등을 결정한다는 것. 때문에 명품브랜드와 상대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그들의 특성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브랜드의 알려지지 않은 역사까지 훤히 꿰고 있어야 합니다. 또 이들은 해마다 컬렉션을 달리하고 달리하는 컬렉션마다 디자이너를 바꿀 정도로 민감하게 굴기 때문에 정보수집에 게을러서도 안됩니다.”그는 한국 명품시장이 더욱 커질 것으로 보고 있다. 해외 명품브랜드의 오너가 1년에 1~2회 방문할 정도로 명품시장의 성장을 예상하고 있는데다 실제로 최근 명품소비층이 40~50대에서 20~30대까지 대중화되고 있다는 것. 그와 동료 20여명이 관리하는 명품브랜드가 139개. “브랜드 정보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그들과 자주 만나야 합니다. 때로는 그들과 인간적인 관계를 맺어놓는 게 도움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