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2년 당시 은행 설립 최저 자본금이었던 250억원으로 출발한 신한은행은 출범 24년 만에 총자산 163조원을 가진 국내 2위 규모의 금융그룹으로 성장했다. 이 같은 신한은행호의 압축성장에는 강력한 리더십이 뒷받침됐음은 물론이다.신한호의 선장 겸 조타수는 라응찬 신한금융지주 회장이다.그는 선린상고 출신으로 국내 최대 규모의 금융그룹 회장까지 오른 ‘은행원 신화’로 신한의 산역사이자 신한맨들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맡고 있다.라회장은 상주중학교를 졸업한 뒤 무작정 상경해 치과 기공소의 조수 등 닥치는 대로 일을 했다. 결국 은행원으로 변신, 대구은행을 거쳐 제일투자금융 상무로 재직하면서 82년 재일교포들이 주주가 된 신한은행의 창립멤버로 참여했다.91년에 제4대 신한은행장이 된 그는 국내 최초로 은행장 3연임에 성공하면서 8년간 은행장 자리를 지켰다.그는 행장 시절 철저한 소신경영으로 오늘날 신한금융그룹의 성공의 기틀을 닦았다. 정치권이나 정부관료들의 대출청탁을 일절 거절, 한보 부실채권을 최소화한 것이나 자신을 키워준 금융계 사부 김준성 전 부총리의 인사청탁을 거절한 것 등은 금융계의 유명한 일화 중 하나다.또 강력한 카리스마를 바탕으로 리테일 혁명과 고객만족이란 목표 아래 경영혁신을 주도하며 오늘날 신한은행이 국내 2위 은행으로 도약하는 데 초석을 닦았다. 실제로 그의 재임기간인 91~99년 초 신한은행의 총자산은 10조원에서 45조원으로 늘었으며 지점수도 115개에서 336개로 두 배 이상 증가했다. 이때 보인 양적·질적 성장은 신한은행이 대한민국 리딩뱅크로 자리를 굳히는 발판이 됐다는 평가다.그는 99년 신한은행 부회장으로 일선에서 물러났다가 2001년 9월 신한금융지주가 출범하면서 회장으로 취임했다. 이에 따라 올해로 무려 16년째 대표이사직을 유지한 국내 최장수 최고경영자 기록도 갖고 있다.지난해 말 500억원 규모의 ‘신한장학재단’을 설립해 퇴임을 준비하는 것 아니냐는 관측도 나돌았지만 아직 자회사경영관리위원회를 통해 은행과 카드, 증권 등 자회사의 인사권을 행사하는 등 그룹 내에서 누구도 넘보지 못하는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라회장이 신한호의 선장이라면 안전관리를 돌보는 항해사는 이인호 신한금융지주 사장이다.이사장은 1943년 대전 출생으로 62년 대전고등학교와 67년 연세대학교를 졸업하고 66년 상업은행에 입행, 금융계와 연을 맺었다. 82년 신한은행 창립멤버로 참여해 상무이사와 전무이사를 거친 뒤 라회장으로부터 바통을 이어받아 99년부터 2003년 3월까지 신한은행장을 맡았다.그는 행장 시절 한 번 정한 목표는 기필코 달성하는 뚝심의 리더십을 발휘하며 2기 신한은행호를 반석 위에 올렸다. 그의 행장 시절 별명은 ‘달리는 노트북’. 머릿속에는 신한은행의 모든 경영내용과 청사진을 입력해 두고 발은 항상 현장을 달린다는 데서 붙여진 별명이다. 행장 시절 크레디트스코어링시스템(CSS) 등의 선진 여신기법을 도입해 신한은행이 우량 선도은행으로 발돋움하는 데 절대적인 역할을 해냈다.신한은행장 퇴임 이후 신한은행 부회장 및 신한지주 비상임이사를 역임해 오다 지난해 5월 최영휘 사장의 전격적인 경질 직후 ‘구원투수’로 지주사 사장에 올랐다. 그후 풍부한 경험을 바탕으로 인사파동을 무난히 수습하고 그룹의 모회사인 신한지주를 진두지휘하는 한편 지주사간 현안에 대한 거중조정자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이사장도 라회장과 김승유 하나금융그룹 회장을 제외하곤 현직에서 활동 중인 뱅커(Banker)들 가운데 가장 오랜 기간 최고경영자의 자리를 지키며 주위의 부러움을 사고 있다.금융업 CEO의 평균 재임기간이 고작 2.1년에 불과하다는 점을 감안하면 라회장과 이사장의 장수는 신한금융그룹 성공의 핵심비결이란 평가다.신한호의 동력을 책임지는 기관장은 신상훈 통합 신한은행장이다.신행장은 라회장에 이은 새로운 ‘은행원 신화’로 꼽힌다. 어려운 가정형편 속에서 상고를 졸업한 시골청년이 자산규모 163조원의 국내 2위 은행인 통합 신한은행의 사령탑이 됐기 때문이다.신행장은 67년 군산상고 졸업과 동시에 산업은행에 입행한 뒤 82년 신한은행 출범 때 창립멤버로 합류,24년 만에 국내 굴지 은행이 된 신한은행의 ‘성장신화’를 함께 쓴 인물이다.신한은행이 신한지주에서 차지하는 비중을 감안할 때 신행장이 라회장에 이어 신한금융그룹의 실질적인 2인자라는 데 이견을 다는 사람이 거의 없다.‘아침식사 두 번, 저녁식사 세 번’할 정도로 바쁘지만 직원들 경조사는 직접 챙기고 말단직원에게도 직접 소주잔을 건네는 덕장의 면모를 갖췄다. 신한 직원들이 그를 ‘큰형님’이라고 부르며 따르는 이유다.하지만 경쟁은행들은 그를 ‘여우 같다’고 한다. 새로운 아이디어를 한 발 앞서 영업에 접목시키는 것이 얄미울 정도이기 때문이다. 지난해 은행창립 23주년을 맞아 ‘23전23승에 빛나는 이순신 장군의 불패신화’ 벤치마킹도 그의 머릿속에서 나왔다. 지난해 5월 ‘블루오션’이란 화두를 던지고 금융권 블루오션 바람을 주도한 것도 그다.일본 오사카(大阪)지점장 시절에는 폭력조직인 야쿠자와 맞서 연체채권을 해결했다는 일화가 있을 정도로 배짱과 뚝심이 대단하다. 지점장 시절에는 평생에 한 번 받기도 힘든 전국영업점 업적평가대회 대상을 두 번이나 받는 전무후무한 기록을 세운 것으로 유명하다. 또 주경야독으로 성균관대 경영학 학사와 연세대 경영학 석사학위를 받았을 정도로 열정의 소유자다. 그가 쓴 금융지주사 관련 석사논문은 후에 신한금융지주를 설립하는 데 이론적 토대를 제공하기도 했다.신행장이 1등 기관사라면 그룹의 2등 기관사로는 통합 신한카드의 홍성균 사장이 꼽힌다. 홍사장은 지난 82년 신한은행 창립 때 개설준비위원으로 참여한 이래 2002년 신한카드 사장으로 자리를 옮기기 전까지 신한은행에서만 20여년을 근무한 ‘신한맨’이다. 지난 91년 신한은행 도쿄지점장을 거쳐 99년 이사직에 올랐으며 2002년 신한카드 설립과 함께 사장으로 취임했다. 이어 카드대란으로 닥친 안팎의 어려움 등을 무난하게 극복하며 통합 신한은행과 함께 출범하는 통합 신한카드사의 사장직을 맡았다. 최근 입찰공고가 나간 LG카드 인수전을 실질적으로 이끌며 그룹 내에서의 위상을 높이고 있다.이밖에 이동걸 굿모닝신한증권 사장과 한동우 신한생명 사장도 신한호의 핵심이다.이사장은 영남대 경제학과를 졸업한 70년 한일은행에서 사회생활을 시작한 뒤 87년 신한은행에 입행, 비서실장과 인사부장, 상무 등을 거쳤다. 이어 2002년 신한캐피탈 사장으로 자리를 옮겨 리스시장 침체에 따른 자산감소와 충당금 부담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던 회사를 3년 만에 전문화된 금융서비스를 제공하는 종합여신금융회사로 발전시켰다. 그는 이 같은 능력을 인정받아 최근 그룹인사에서 활로를 찾지 못하고 있는 굿모닝신한증권의 해결사로 낙점됐다.한사장은 부산고와 서울대 법대를 졸업한 뒤 한국신탁은행과 신용보증기금을 거쳐 82년 이인호 사장 등과 함께 창립멤버로 신한은행에 입행했다. 이어 은행 인사부장과 종합기획부장, 이사, 상무 등을 거쳐 부행장까지 지냈다. 이어 2002년 신한생명보험 사장으로 취임했다.지난해 말 신한생명이 신한금융지주 자회사로 편입되면서 그룹 내 위상이 강화됐다. 지난 2월 말부터 신한데이타시스템을 맡고 있는 한민기 사장 또한 신한금융그룹 내에서 주목받는 핵심 브레인 중 한 명이다. 오사카지점장을 거쳐 신한금융지주 상무를 역임한 그는 신한은행 부행장 시절 PB업무를 총괄하며 초우량은행의 이미지 제고에 더 큰 활력을 불어넣었다. 신한금융그룹의 신경망이나 다름없는 신한데이타시스템을 이끌며 빈틈없는 업무처리로 그룹의 지속적인 사업확장을 차질 없이 뒷받침할 것으로 기대를 모으고 있다신한금융그룹을 이끄는 키맨을 꼽을 때 빼놓을 수 없는 사람이 신한은행 창업자인 이희건 신한지주 명예회장이다.이명예회장은 재일교포 사회의 대부인 동시에 국내 금융산업 발전의 산증인이기도 하다. 일제강점기이던 1917년 경북 경산군의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난 그는 막연한 꿈을 안고 15살 때 현해탄을 건넜다. 낮에는 단순노무직으로 일하며 주경야독 끝에 23살에 메이지대학 전문부를 졸업했다. 오사카 동남쪽 외곽에 자리잡은 재일교포 밀집지역 쓰루하시의 무허가시장에서 자전거 타이어 장사를 시작한 그는 곧 교포들 사이에서 지도력을 인정받아 상가번영회 업무 등을 도맡게 되면서 교포들의 경제적 위상 제고에 절대적 공을 세웠다.지난 55년 일본 금융기관들로부터 ‘찬밥’ 신세를 면치 못하던 교포 상공인들을 위해 신용조합인 오사카흥은 설립을 주도했다. 이 일은 이명예회장의 인생을 ‘금융인’으로 돌려놓는 분수령이 됐다. 사장에 취임한 그는 오사카흥은을 오사카지역 최대의 신용조합으로 키워내며 교포사회를 금융이란 끈으로 묶어나갔다.이명예회장은 재일교포들의 국내투자사업이 본격화된 77년에는 원활한 자금지원을 위해 국내에 제일투자금융을 설립했다. 또한 82년 7월 당시 일본 오사카신용조합회장이던 그는 한국의 외환사정이 어려울 때 일본에서 교포자금을 끌어와 신한은행을 설립했다.일본이 엔화반출을 규제하고 있던 당시 교포들이 신한은행 설립자금을 여행용 가방에 숨겨 한국으로 실어날랐던 일명 ‘007작전’은 아직도 감동적인 얘기로 전해지고 있다.그는 회장직을 20년 가까이 수행하면서 경영에는 일절 간섭하지 않은 채 정부의 외압은 막아내 신한은행이 우량은행으로 발돋움하는 데 초석을 닦았다. 주주들을 설득, 10년 동안 배당을 받지 않는 대신 그 이익금으로 은행의 자본금을 늘리도록 하는 등 신한은행을 알짜 금융기관으로 키우는 데 누구보다 앞장섰다.지난 2001년 오사카흥은이 모태가 된 간사이흥은의 파산으로 명성에 흠집이 생겼고 신한은행 회장직에서 물러나는 등 다소 시련을 겪었지만 아직 22%에 달하는 지분을 가진 1,000여명 재일교포들의 얼굴로 신한금융그룹에 간접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신한금융그룹은 새로운 신한은행호의 출범과 함께 최근 인수공고가 나간 LG카드 인수작업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해 향후 2008년까지 총자산을 267조원으로 끌어올려 ‘월드클래스 금융그룹’으로 도약한다는 그랜드 디자인을 짜놓고 있다.배가 목적지를 잃고 좌초하지 않으려면 선박의 항해를 지휘통솔하는 최고책임자인 선장과 안전관리를 돌보는 항해사, 조타수와 기관장간의 유기적인 역할분담과 일사불란한 팀워크가 필수다. 신한금융그룹의 리더십이 어떻게 신한, 조흥은행간 화학적 통합을 성공적으로 끝내고 LG카드 인수에 성공해 명실상부한 월드리딩 금융그룹으로 ‘뉴 신한호’를 몰아갈지 금융계가 주목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