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 제 562호 (2006년 09월 11일)

‘묻지 말아요… 옛일은 다 잊었소!’

기사입력 2006.09.07 오후 02:53

지난 8월30일 서울 미아리 인근 북한산 자락의 한 아파트 24층. 노부부가 도란도란 나누는 이야기 소리가 밖으로 새어나왔다. 가끔은 작은 웃음소리도 들려왔다. 목소리만 들어도 이들이 다정한 부부임을 단번에 느낄 수 있었다.

초인종을 누르자 선한 인상의 할머니가 문을 열었다.

기자가 물었다. ‘실례합니다만 김선홍 회장님댁 맞죠?’ 그녀는 물끄러미 쳐다보더니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잘못 찾아오셨습니다.”

‘회장님 얼굴이라도 잠깐 뵈었으면 합니다.’ 김 전 회장이 거주한다는 사실을 사전에 확인한 기자도 물러서지 않았다. “죄송합니다. 지금은 안 계십니다.” 그녀가 아파트 문을 닫았다.

경비실로 내려와 전화를 걸었다. 이번에는 김선홍 전 기아그룹 회장(74)이 직접 받았다. 기자는 구체적으로 신분을 밝혔다.

순간 정적이 흘렸다. 잠시 뒤 그의 차분한 목소리가 전화선을 타고 들렸다.

“조금 전에 찾아오신 분이군요.” ‘잠깐 뵈었으면 합니다.’ 정식으로 인터뷰를 요청했다. “이제 와서 제가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기자를 만날 일이 전혀 없습니다.” 그의 거절에서 완곡함이 느껴졌다.

‘요즘 어떻게 지내세요?’ “그저 평범하게 삽니다. 오시느라 고생했는데, 그만 돌아가시죠.”

‘건강은 어떻습니까?’ 기자가 다시 물었다. “늙은이가 그렇죠.” 그는 가느다란 목소리로 답했다.

김 전 회장 집을 방문하기 전 접촉했던 옛 기아그룹의 측근들에게 그의 근황을 물으니 “건강이 좋지 않다”고 귀띔했다.

‘한국의 크라이슬러’. 한때 국내 자동차산업을 주름잡았던 김 전 회장의 별칭이다. 1958년 1월 그는 기아산업의 말단사원이었다. 1990년 그는 기아그룹 회장에 올랐다. 그리고 기아그룹을 재계 10위 안에 드는 대그룹으로 성장시켰다. ‘봉고신화’로 통하는 그의 성공스토리는 수많은 샐러리맨들의 박수갈채를 받았다.

그는 지난해 별세한 정세영 현대산업개발 명예회장,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과 더불어 한국의 자동차산업을 세계적 수준으로 키운 주역으로 평가받고 있다. 그는 별칭 그대로 ‘한국의 크라이슬러’였다.

그러나 그의 노후는 초라해 보였다. 그가 살고 있는 아파트는 평범했다. 몇 년 전에 개발된 곳으로, 그전에는 전형적인 ‘달동네’였다. 이곳에선 도봉구와 성북구 일대가 한눈에 들어온다. 경사진 곳이 많아서 겨울이면 걸어다니는 것조차 쉽지 않을 듯했다. 물론 편의시설도 거의 없다. 서울시내를 오가는 교통편도 불편했다.

가까운 부동산중개소에 따르면 김 전 회장이 살고 있는 아파트는 32평형이다. 시가는 3억원 정도. 그나마 그의 명의도 아니다. 등기부등본상에는 차남의 이름이 기재돼 있다. 서강대 물리학과 교수였던 그의 차남은 기아차 사태가 터진 직후 영국의 한 대학으로 직장을 옮겼다. 김 전 회장은 98년 기아부도 후 분식회계 혐의(횡령 등)로 4년을 선고받아 2년을 복역한 뒤 2000년 형집행정지로 풀려났다. 이후 마지막 재산이었던 잠실의 한 아파트에서 살다 지난해 초 그 집마저 예금보험공사에 압류당하면서 지금의 아파트로 이사를 왔다.

회장으로 있던 그룹이 부도가 났다고는 하지만 그는 한때 한국경제를 쥐락펴락했던 재계거물이었다. 그런 그가 외진 지역의 아파트에 사는 것이 선뜻 이해되지 않았다.

지난해 12월 법원은 전 기아차 채권단들이 기아차 경영진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청구소송에서 “김선홍, 박제혁 등 전 경영진이 허위 재무제표를 제시하고 금융회사로부터 불법대출을 받은 사실이 인정된다”며 “피고는 우리은행에 43억원, 예금보험공사에 10억원, 서울보증보험주식회사에 13억원 등을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이미 그의 명의로 된 모든 재산은 가압류돼 있는 상태였다. 그의 최측근이었던 박제혁 전 기아차 사장은 “나도 정부에서 50만원씩 주는 국민연금마저 압류당하고 있기 때문에 친구들조차 만나기 힘들다”며 신세한탄을 할 정도다. 박 전 사장은 “회장님도 마찬가지”라고 말했다.

같은 혐의로 처벌받은 상당수 전직 재벌그룹의 회장들이 채권단의 거액소송에도 불구하고 부유한 생활을 누리고 있는 것과는 크게 대조를 보이는 대목이다.

이에 대해 박 전 사장은 “(전)기아차 경영진은 다른 그룹 경영진과 달랐다”며 “우리는 뒷주머니를 찬 적이 없다”고 주장했다. 검찰도 ‘(김 전 회장이) 이렇게 가난할 줄 몰랐다’며 깜짝 놀랐을 정도라는 게 박 전 사장의 이야기다.

박 전 사장의 말대로 거액의 손해배상소송을 당한 전직 재계 오너들 중에는 일부 언론의 집요한 추적으로 숨겨진 재산이 밝혀져 망신을 당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적어도 김 전 회장은 개인의 부를 축적하는 스타일은 아니었다”고 회고하는 재계 인사들을 만나는 것은 어렵지 않다.

김 전 회장은 2003년 8월 평화자동차 고문으로 현업에 복귀한 적이 있다. 평화자동차는 북한 남포공단에서 이탈리아 브랜드인 피아트의 모델을 조립생산하고 있다. 당시 그는 부정기적으로 서울 강남구 신사동 평화자동차 본사로 출근했다. 주로 자동차 개발과 생산, 판매 등 사업 전반에 대해 자문했다. 박상권 평화자동차 사장이 북한 내 독자모델 생산을 추진하면서 자동차사업 전반에 대해 조언해줄 인물을 물색하던 과정에서 우연한 기회에 인연을 맺게 됐다는 후문이다.

그는 평화자동차에서 비교적 활발하게 활동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어떤 이유에선지 지난해 10월 고문직을 사퇴했다. 이에 대해 김 전 회장은 “더 이상 할일이 없어 그만뒀다”며 언급을 피했다. 그러나 아직도 완전히 손을 뗀 것은 아닌 듯했다. 평화자동차 관계자는 “요즘도 한달에 한두 차례 회사를 방문해 (박)사장님을 만난다”고 전했다.

공식적으로 평화자동차 고문직을 그만둔 이후 김 전 회장은 거의 칩거상태에 들어갔다. 교회 장로 활동과 독서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고 있다. 학교 동창들도 거의 만나지 않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서울대 기계공학과 9회로 동문회 고문으로 등재돼 있지만 활동은 하지 않고 있다. 옛 기아차 출신 임직원과의 만남도 잦은 편이 아니다. 박 전 사장은 “나도 연락이 와야 만날 수 있다”고 했고, 도재영 전 기아자동차판매 부회장은 “뵌 지 몇 년 된 것 같다”고 말했다. 예전 기아차 출신 중에서도 김 전 회장의 자택주소를 아는 이를 만나기가 힘들었을 정도다. 그만큼 철저하게 ‘야인’으로 살고 있는 셈이다.

아파트 단지 내에서도 그의 존재를 아는 이가 드물었다. 경비실에서는 그가 살고 있는 아파트 호수를 말하자 “노인네 두 분이 살고 있다”고만 했다. 같은 동의 주민들도 국내 자동차산업을 일으킨 ‘한국의 크라이슬러’가 이웃에 살고 있는지를 알지 못했다. 인근 부동산중개소 등 상가 사람들도 김 전 회장을 아느냐는 기자의 물음에 한결같이 ‘그 사람이 누구죠?’라고 되물었을 정도다.

공식석상에 일절 모습을 드러내지 않던 그도 지난해 두 번에 걸쳐 공개적인 외출을 한 적이 있다. 지난해 5월 작고한 정세영 현대산업개발 명예회장의 빈소를 찾아 애도의 뜻을 전했다.

10월에는 서울 신촌 세브란스병원에 입원 중인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의 병문안을 다녀갔다. 이 자리에서 두 사람은 서로의 건강상태를 묻는 인사와 과거 자동차회사를 운영하던 시절을 회상하며 약 15분 가량 이야기를 나눈 것으로 알려졌다.

김 전 회장은 ‘앞으로 특별한 계획이 있느냐’는 물음에 “허허” 하고 웃더니 “이대로 살 것”이라고 잘라 말했다. 그는 “나이가 얼마인데, 이제 무슨 일을 하겠느냐”며 “이렇게 조용히 사는 것이 좋다”고 했다. 그는 또 “평범한 서민생활에 적응했다”며 “예전 이야기는 더 이상 하고 싶지 않다”는 말도 했다. 그의 측근들은 “국내 자동차산업과 기계공학의 발전을 가져온 혜안과 경험을 가진 김 전 회장을 이대로 방치하는 것은 국가적 손실”이라고 입을 모았다.

권오준 기자 jun@kbizwee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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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일시 : 2006-09-07 14:5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