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월 15일 과천 정부청사 통합브리핑룸은 두 차례 술렁거렸다. 재정경제부 정례 브리핑을 당초 예정됐던 김석동 차관에서 권 부총리가 진행하기로 했다는 소식이 전해진 때가 첫 번째다. 기자들은 “경제부총리가 무슨 중대 발표를 하나…”며 긴장감을 늦추지 않았다.11시 30분께 권 부총리가 마이크를 잡았을 때 기자들은 잠시나마 귀를 의심할 정도로 놀랐다. 권 부총리 입에서 “종합부동산세(종부세) 등 주택 보유세로 부담을 느끼는 서울 강남 주민들은 분당으로 이사 가면 될 것 아니냐”는 말이 나왔기 때문이다. 권 부총리는 특히 강남 30평형대 아파트를 팔고 분당 30평형대를 살 경우와 강남 50평형대 아파트를 팔고 분당 50평형대로 이사 갈 경우 각각 상당한 현금을 챙길 수 있다며 두 차례나 친절(?)히 안내해 기자들은 잘못 듣지 않았음을 깨달았다.권 부총리의 이 같은 발언은 즉각 ‘부적절한 발언’으로 비판받았다. 경제 정책을 책임지고 있는 최고 사령탑이라면 응당 “집값 상승에 따라 종부세 등 보유세 부담이 늘어난 것은 사실이지만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 부유층의 의무)로 받아들이고 성실하게 납부해 달라”는 수준의 담화문 발표가 바람직했을 것이란 얘기다. 전날 건설교통부가 2007년 공동주택 공시가격을 공개하면서 세금이 크게 늘어나는 공시가격 6억 원 이상 주택 보유자들이 정부 정책에 상당한 불만을 가지고 있을 것이란 점에서 이들을 어루만져 주는 노력이 필요했다는 지적이다.그럼에도 불구하고 권 부총리가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면 될 것 아니냐”는 톤으로 정제되지 않은 발언을 쏟아낸 것은 그 배경에 뭔가 있을 것이란 관측이 많다. 특히 권 부총리가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강조하는 유럽에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대사로 활약했으며, 평소 성품이 신중하고 말을 가려 한다는 점에서 그의 스타일에도 맞지 않다는 분석이다.정치공세 차단 포석설도이에 대해 재경부의 한 간부는 “청와대와 어떤 사인이 있지 않았겠느냐”고 나름대로의 해석을 내놨다. 부동산 시장 불안을 참여정부의 최대 정책 실패라고 스스로 인정하고 있는 청와대가 권 부총리로 하여금 강성 발언을 해 줄 것을 요구했을 것이란 추측이다. 해마다 3∼4월이면 제비가 찾아오듯 부동산 가격 급등이 되풀이되는 것을 막기 위해 부동산 불안의 진원지인 강남에선 보유세 부담이 엄청나며, 보유세 부과 시점인 6월 1일 이전에 고가 주택을 파는 것만이 세금 폭탄을 피하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강조함으로써 매물을 유도해 보겠다는 생각을 직설적으로 표현했다는 설명이다.이와는 달리 권 부총리 스스로 종부세 문제에 확실한 선을 그음으로써 향후 국회에서 정치 쟁점화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란 해석도 나온다. 분양가 상한제 및 민간 아파트 분양 원가 공개를 위한 입법안은 지난 2월 임시국회에서 논란 끝에 처리되지 못했다. 조만간 진행될 임시국회에서 이 문제와 더불어 보유세의 적정 수준 문제가 불거지면 법률안 처리가 또 다시 미뤄질 수 있다는 절박감을 권 부총리 스스로 느꼈을 것이란 전언이다. 보유세 부담을 일부 부유층만의 문제로 돌림으로써 정치권, 특히 한나라당이 공세를 취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사전 포석일 수 있다는 진단이다.전후 사정이야 어찌됐든 권 부총리의 소신이 또 다시 도마 위에 오른 것은 사실이다. 권 부총리는 분양 원가 공개 확대, 반값 아파트, 이자제한법 등의 이슈에서 잇따라 소신을 굽힌 바 있다. 이 같은 정책은 시장경제 원칙에 어긋날 수 있으며 오히려 부작용이 우려된다는 점에서 반대 입장을 분명히 밝혔다가, 지난해 말과 올 초 열린우리당 등 정치권이 강력하게 주문하자 슬그머니 반대론을 접었다.이와는 반대로 부동산 문제에 있어선 취임 초부터 원칙을 고수하고 있다. 그는 15일에도 “고령 은퇴자나 1주택자의 종부세 경감은 없으며 양도세 부담 완화도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고 재확인했다. 이를 두고 일각에선 “권 부총리의 소신은 상당한 탄력적인 소신”이라는 말까지 나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