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타 개런티 ‘억, 억’…‘부르는 게 값’

한국 영화의 위기설이 그 어느 때보다 높다. 지난해 110편이나 제작된 국산 영화 중 수지를 맞춘 작품이 10% 이하라는 사실이 알려진 이후 제작자들은 제작비 상승, 특히 날이 다르게 치솟는 스타들의 개런티를 수지 악화의 가장 큰 원인으로 지목했다.드라마 제작사들은 그들대로 ‘나날이 치솟는 스타들의 출연료 때문에 도저히 수지를 맞출 수 없다’고 비명을 지른다. 외주 제작사들이 방송사로부터 받는 제작비는 회당 8000만 원에서 1억 원. 회당 2000만 원대에 이르는 톱스타들의 출연료와 3000만 원을 호가하는 스타 작가들의 집필료를 감안하면 매일 보는 드라마들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가 궁금해진다.과연 스타들의 몸값은 지나치게 비싼가. 비싸다면 대체 왜 이렇게 비싼 것일까.현재 최고가의 출연료를 자랑하는 배우는 송강호. ‘5억 원 이상’이 확고하게 매겨져 있는 데도 2009년까지 출연작 스케줄이 차 있을 정도다.그 뒤를 잇는 것이 설경구 차승원 최민식 등 탄탄한 연기파들. 흔히 생각하는 장동건 이병헌 배용준 등 미남 스타들보다 이들이 좋은 대우를 받는 것은 시장에서 입증된 티켓 파워의 힘이다. 아무튼 이들이 4억~5억 원대의 출연료를 받고 있고 장진영 전도연 김혜수 등 톱클래스 여배우들은 3억~4억 원대로 남자 배우들보다 약간 낮은 몸값을 형성하고 있다.드라마 쪽은 1위와 2위의 격차가 크다. 배용준이 오는 5월 방송되는 MBC TV <태왕사신기>로 회당 1억 원을 자랑하는 가운데 2위는 지난해 <연애시대>에서 손예진, 그리고 현재 방송중인 <히트>에서 고현정이 회당 2500만 원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 뒤로는 권상우 김희선 하지원 등이 2000만 원대를 지키고 있다. 회당 2500만 원은 16부작이라면 4억 원, 24부작이라면 6억 원에 해당하는 거액. 영화 출연료를 능가하는 수준이다.드라마 출연료 영화 ‘추월’국제통화기금(IMF)의 타격을 받았던 1997년 최고의 톱스타였던 최진실의 드라마 출연료가 300만 원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10년 동안 8배 이상 올랐다. 지난해 이후 영화를 고집하던 톱스타들이 속속 브라운관으로 복귀하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여기서 궁금증. 할리우드 영화 <오션스 일레븐>은 조지 클루니를 위시해 브래드 피트, 줄리아 로버츠, 맷 데이먼 등 톱스타들이 줄줄이 출연하는 초호화 캐스팅으로 잘 알려져 있다. 이런 작품은 출연하는 배우들의 면면 자체가 화제가 되기도 하는데 과연 한국 드라마에서도 이런 일이 가능할까.최근 제작이 재개된 대작 드라마 <카인과 아벨>의 사례는 이 부분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지난해 제작에 착수하자마자 한류 스타 최지우가 관심을 보인 것까지는 낭보였지만 오히려 그 이후 위기가 닥쳐왔다. 최지우 측은 회당 3000만 원대의 출연료와 함께 상대역인 두 형제 역할에도 자신과 비슷한 수준의 스타를 캐스팅해줄 것을 요구했다. 이렇게 되면 주연급 세 사람의 출연료만 최하 7000만 원선에 이르게 돼 도저히 제작비를 감당할 수 없는 수준이 된 것이다. 우여곡절 끝에 제작이 취소될 뻔한 <카인과 아벨>은 최근 소지섭을 중심으로 ‘새 판’을 짜고 있다.지난해 또 하나의 빅 프로젝트로 꼽혔던 드라마 <에이전트 제로>의 경우도 크게 다르지 않다. 차인표 손예진 설경구라는 대형 스타 3인의 공연으로 기대를 모았던 이 작품은 현재 제작이 무기 연기된 상태. 제작사는 “절대 제작 취소가 아니며 드라마의 완성도를 높이기 위해 대본을 더 가다듬고 있다”고 말하고 있지만 아무래도 3명을 합해 회당 6000만 원이 넘는 출연료를 감당할만한 손익 계산이 나오지 않았을 것이란 관측이 지배적이다.영화계는 이런 문제를 좀 더 유연하게 대처하고 있다. 김지운 감독의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은 송강호 이병헌 정우성이란 초호화 진용을 구축하며 엄청난 출연료 부담에 직면했지만 제작진은 송강호의 개런티를 투자로 전환하는 데 합의했다. 송강호는 영화의 흥행 성과에 따라 투자자의 입장에서 배당을 받는 셈. 이 시스템은 제작자와 배우의 동지 의식이 낳은 쾌거라고 할 수 있다.드라마건 영화건 한류 스타들은 별개의 대접을 받는다. 해외 수출에 대한 기대가 있기 때문이다. <태왕사신기>에서 배용준의 출연료가 1억 원이라지만 그 이상이라는 소문도 파다하다. 한류 전성기였던 2004~05년에는 “회당 1억 원을 제시해도 스타들이 입질을 하지 않는다”고 한탄하는 제작사들이 많았다. 일본이라는 확실한 시장이 확보돼 있었기 때문이다.하지만 이건 일부 한류 스타들에게 국한된 얘기일 뿐이다. 고액 개런티가 영화나 드라마의 수지에 엄청난 악영향을 미치는데도 불구하고 출연료는 천정부지로 치솟는 것은 보는 이들을 의아하게 한다.매출 위해 ‘일단 만들고 봐’물론 속내를 보면 간단하다. 영화건 드라마건 흥행이 되고 안 되고를 떠나서 ‘무조건 만들어야 하는’ 사람들이 부지기수기 때문이다. 지난 2005년 이후 엄청난 투기성 자본이 엔터테인먼트 업계로 몰려들었다. 이들은 기존의 매니지먼트사나 드라마·영화 제작사를 모태로 소규모 기업들을 이용한 우회 상장을 통해 코스닥 시장의 엔터테인먼트 붐을 일으켰다.이때 등장했던 회사들 중 제대로 된 수익 모델을 갖춘 회사들은 거의 없었고 어쨌든 이들은 외형상 매출을 발생시키기 위해 ‘뭐라도 만들어야 하는’ 상황이었다. 이는 곧 영화계와 방송계에서 드라마·영화의 기획안과 작가, 그리고 스타들의 품귀 현상으로 이어졌다. 이러고도 출연료가 오르지 않을 재간이 없다.지난해 110편에 달한 한국 영화 제작 붐은 이런 기현상의 결과였다. 하지만 이런 식의 졸속 제작 붐에서 좋은 작품이 나오기를 기대할 수 없었고 공급 과잉은 당연히 전체 한국 영화의 수지 악화를 가져왔다. 결국 개런티 상승의 주범은 지난해 집중적으로 판을 흐린 투기성 자본이었고, 가장 큰 피해자는 ‘붐’에 휩쓸리지 않고 자리를 지켜온 기존 제작사들이었다고 할 수 있다.연예인들에게도 어느 정도 책임은 있다. 연예계에서는 이미 1990년대 후반 이후 연기자들의 부족한 직업의식에 대한 문제 제기가 계속 이어져 왔다. 소위 인기 스타라면 드라마나 영화 등의 활동을 통해 대중에게 자신의 존재를 어필하는 것이 당연하겠지만 한국에는 오직 CF로만 대중과의 소통을 이루는 ‘이상한 스타들’이 줄곧 존재해 왔다.이런 풍조를 부채질한 것은 한국의 기형적인 광고 시장이다. 한국 연예인들의 가장 큰 수입원은 드라마나 영화 출연료가 아니라 CF 출연 개런티다. 최고의 광고 모델인 이영애의 1년 전속료는 10억 원에 달한다. 영화계의 최고 스타인 송강호가 영화 2편을 찍어야 받을 수 있는 금액이다.이영애는 드라마 <대장금>이나 영화 <친절한 금자씨>로 작품에서도 최고의 톱스타로 군림하고 있는 만큼 고액 개런티가 당연시되지만 전지현의 경우는 좀 다르다. 지난 2001년 <엽기적인 그녀>의 히트 이후엔 흥행이든 비평이든 성공작으로 꼽을 만한 작품이 없었지만 광고 출연료는 떨어지지 않는다. 오히려 광고가 인기를 유지하는 수단이 되고 있는 형국이다.한 광고대행사 관계자는 “한국만큼 광고주들이 빅 모델에 집착하는 나라도 드물다”며 “대행사에서 이미지와 적정 출연료를 고려해 모델을 추천해도 광고주들이 ‘돈이라면 걱정 말고 톱스타 아무개를 써 달라’고 주장하는 경우가 흔하다”고 말했다.일단은 돈의 액수가 최우선이라는 연예계의 풍조도 비판의 여지가 있다. 현재 형성된 연예인들의 몸값은 분명 ‘찾는 사람이 있으니 오른다’는 시장의 논리를 철저하게 따른 결과다. 물론 시장이 확대되고 수익성이 높아지면 출연료가 오르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다만 2006년 이후 급격한 출연료 상승은 업계 전체의 수익 감소와 함께 찾아왔다는 점이 문제다.현실적으로 한국 연예계에서 연예인들의 개런티가 내려간 것은 수요의 급감으로 연예인들이 공멸에 대한 위기의식을 느꼈던 IMF 때밖에 없다. 누가 봐도 거품으로 가득한 엔터테인먼트 기업들이 필연적인 조정을 거쳐 옥석이 가려지고 나면 출연료는 자연히 안정 국면으로 접어들 것이다. 배우들이 일시적인 고액 베팅의 유혹을 떨치고 작품성 위주의 선택을 하거나 러닝 개런티 방식으로 제작자와 위험 부담을 나누는 풍조가 확대되는 것도 한 방법이지만, 아무래도 ‘일단 작품을 만들고 보자’는 식으로 실적에 목을 맨 제작사들이 사라지기를 기대하는 것이 훨씬 현실적인 해결책으로 보인다.송원섭·중앙엔터테인먼트&스포츠(JES) 기자 five@jes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