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와대 통신

청와대 내에서 9부2처2청을 옮기는 것을 뼈대로 하는 세종시의 기존 계획을 변경해야 한다는 목소리는 현 정부 출범 이후부터 있어 왔다. 지난해 중반 정권 창출에 한몫했던 일부 참모들이 사석에서 이런 얘기들을 꺼냈다. 그렇지만 미국산 쇠고기 파문으로 촛불 시위가 벌어져 공론화되지 못했다. 내부에서만 맴돈 채 파묻힌 것이다. 이후 글로벌 금융 위기로 완전히 뒤로 밀렸다. 그러던 것이 올해 중반 경제 위기가 어느 정도 수습되고 집권 중반기 국정 운영 방향을 재점검하면서 내부적으로 다시 거론되기 시작했다.한국경제신문을 비롯한 몇몇 언론사가 세종시의 문제점을 집중적으로 보도한 게 방향타가 됐다. 청와대는 올해 이명박 대통령의 광복절 기념사에 세종시 문제를 어떤 식으로든 거론하는 방안을 한때 검토한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이 대통령이 총대를 메는 모양새를 취하는 게 좋지 않다는 의견이 강해 포기했다. 세종시를 원안대로 추진하겠다고 한 약속을 뒤집는 게 큰 부담이었다. 세종시 계획의 전면 수정은 이 대통령의 강한 뜻이었지만 이걸 관철시키는 방법론을 놓고 내심 고민이 컸다.그러던 차에 9월 3일 개각 때 정운찬 총리가 내정되면서 세종시 문제를 수면 위로 끌어올리는 절호의 기회를 맞았다. 정 총리가 총리 지명 직후 가진 기자간담회의 일성은 바로 “세종시는 수정돼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충청도 분들에게 섭섭하지 않을 정도로 계획을 세울 것”이라고 말해 논란의 불을 댕겼다. 청와대로선 이 대통령이 직접 나서기 껄끄러운 문제에 대해 정 총리가 목소리를 내자 내심 반기는 분위기였다. 정 총리가 가려운 데를 시원하게 긁어준 셈이었다.일단 청와대는 “결정된 것이 없다”며 발을 뗐다. 모호한 스탠스였다. “어떻게 할 것이냐”며 연일 쏟아지는 기자들의 질문 공세에 참모들은 모두 입을 닫았다. 그러면서도 대안 마련에 착수했다. 9월 중순 한 핵심 참모는 기자에게 “청와대는 여론을 주의 깊게 살펴보고 있다”며 “총리 청문회 때 (청와대와)교감된 발언이 나올 수 있다”고 귀띔했다.외형적으로는 “세종시와 관련해 검토하고 있는 것이 없다”는 반응을 보인 것과 차이가 났다. 며칠 지나지 않아 또 다른 핵심 관계자는 “세종시에 과학비즈니스벨트를 만들고 서울대 이공계를 비롯한 유수 대학을 유치하는 것을 검토하고 있다”며 한발 앞선 정보를 전해줬다. 세종시 수정 계획을 기정사실화하고 차근차근 준비하고 있다는 얘기였다.확인 요청에 청와대는 일단 “결정되지 않았다”는 반응을 보였다. “검토하고 있지 않다”가 아니라 “결정되지 않았다”는 것은 사실상 세종시 대안으로 염두에 두고 있다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이후 이런저런 기사들이 쏟아졌다.세종시가 본격적으로 완전하게 공론화의 길로 들어선 것이다. 청와대는 10월 들어 본격적으로 밀어붙이는 작전으로 들어갔다. 11월 4일 이 대통령과 정 총리 간 주례 회동이 분수령이 됐다. 이 대통령이 세종시 대안의 기준으로 △국가 경쟁력 △통일 이후까지 염두에 둔 국가 미래 △해당 지역 발전 등을 꼽으면서 정 총리에게 수정안 마련을 사실상 지시했다.그 후 여권 내부에선 친박근혜계의 강한 반발이 터져 나오면서 계파 간 싸움의 빌미가 되기도 했다. 그런데도 이 대통령은 추진 의지를 전혀 꺾지 않고 있다. 이 대통령은 사석에서 “기존의 방안대로 가도록 내버려 두면 나도 편하다. 그렇지만 양심상 도저히 그럴 수 없다”며 “임기 내에 다음 정권을 잡는 분들을 위해 초석을 깔겠다”는 뜻을 여러 번 밝혔다.이 대통령은 수정안이 나오는 것과 상관없이 조만간 입장 표명을 하겠다는 계획이다. 정부는 어떻게 하든 연내에 대안을 내놓는다는 방침이지만 뛰어넘어야 할 난관도 적지 않다. 우선 ‘친박’ 측 인사들을 설득하는 게 큰 과제다. 세종시 특별법 수정안을 국회에서 처리하려면 친박측 의원들의 지지가 필수적이다. 박근혜 전 대표는 ‘원안 고수’에서 꿈쩍도 하지 않고 있다. 청와대는 “묘수가 없다. 답답하다”는 반응이다. 반대가 적지 않은 국민 여론을 돌려놓는 것도 과제다.이 문제는 이 대통령의 정치적 승부수와 함께 정 총리와 박 전 대표 간 대권 게임과도 연결돼 있다. 서로가 한 치도 물러설 수 없는 상황이다. 최후 승자는 누가 될까.홍영식 한국경제 정치부 기자 ysho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