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어나는 ‘무장’ 상선
해적이 득실거리는 뱃길을 지나는 상선들이 자체 ‘무장’에 나서고 있다. 해운 회사들은 통상 해적이 출몰하는 지역을 통과할 때도 배에 무기를 싣지 않았다. 교전이 벌어지면 화물이 손상돼 소송으로 이어질 수 있고 배가 가라앉기라도 하면 수억 달러의 손실이 발생하는데 차라리 해적들이 요구하는 수백만 달러의 몸값을 지불하는 편이 낫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최근 월스트리트저널에 따르면 일부 상선들이 이러한 ‘비무장 항해’의 전통을 깨고 무장한 사설 경비대를 고용해 배에 태우고 있다. 과거 소형 화기만 사용하던 해적들이 유탄발사기 등으로 중무장하고 나타나는 데다 최근 몇몇 충돌 과정에서 이들 사설 무장 경비대들이 해적을 쫓아낸 성과가 있었기 때문이다.상선에 대한 해적들의 공격은 증가 추세다. 국제해사국(International Maritime Bureau)에 따르면 지난해 1∼10월 전 세계적으로 약 324건의 해적 공격이 있었다. 이는 2008년 같은 기간의 194건에 비해 67% 증가한 것이다. 해적들의 습격 가운데 절반 이상은 아프리카 소말리아 인근 아덴만에서 발생했다. 지난해 이 지역에서 발생한 해적들이 선박 납치는 47건이었다.해적들의 선박 납치는 최근까지도 기승을 부렸다. 새해 첫날 현대차와 기아차의 수출 차량 2400대를 실은 영국 국적의 ‘아시안 글로리호’가 싱가포르를 거쳐 사우디아라비아로 가는 도중 인도양에서 피랍됐다. 지난 연말엔 예멘 상선 마무드2호와 싱가포르 유조선 프라모니가 해적들에게 납치됐다.해적들의 공격과 이에 대처하기 위한 상선들의 ‘무장’은 대양을 가로지르는 국제 교역이 시작된 16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엔 상선들이 ‘군함’처럼 무장할 수 있었다. 그러나 19세기 동인도회사의 독점이 끝나 경쟁이 심화되고 산업혁명이 일어나면서 선박의 ‘스피드’에 대한 중요성이 강조되기 시작했다.대형 쾌속 범선(clipper)과 같은 배들은 탄약을 싣기에 적합하지 않았고 무엇보다 상선이 해적들의 배를 따돌릴 정도로 빨라졌다. 따라서 상선에 무기를 쌓아두는 관행은 점점 사라졌고 전시 때만 드물게 무장했다.지금도 25노트(시속 46.3km)의 속도를 낼 수 있는 선박들은 해적선보다 빠르다. 그러나 통상 12노트 정도로 운항하는 유조선이나 컨테이너선들은 그만큼 날렵하지 못하다. 미국 국적의 컨테이너선 ‘머스크 알라바마’호는 지난해 4월 소말리아 해적에게 납치됐다가 미 해군 특수부대에 구출된 후 사설 무장 경비팀을 배에 태웠다. 이들은 지난해 11월 말 소말리아 인근 해상 480km 지점에서 해적들의 공격을 받았지만 성공적으로 격퇴시켰다. 월스트리트저널에 따르면 자국 선박의 무장을 허용하는 나라들이 늘고 있다. 미국은 머스크 앨라배마호가 피랍된 후 위험지역을 운항하는 자국 선박들에 무장을 권유하기 시작했다. 지난해 10월 스페인도 자국 국적 선박에 무장 경비대를 승선시킬 수 있도록 허용했다.인도양의 섬나라 모리셔스도 지난 1월 6일 무장 경비원의 승선을 허용했다. 마다가스카르 동쪽 인도양 해상에 있는 모리셔스는 소말리아 해적의 직접적인 영향권에서는 벗어나 있지만 국가 경제에서 해상무역과 호화 유람선이 차지하는 비중이 상당히 커 내부적으로 해적 피해 가능성에 대한 우려가 고조돼 왔다. 보험사들도 선박 무장을 지지하고 있다. 보험사들은 아덴만을 통과하는 선박들에 납치와 몸값을 보장하는 보험에 들 것을 요청하고 있다.일부 보험사들은 무장 경비대가 탑승한 선박에 대해선 특별 혜택을 제공하고 있다. 일례로 보험사 히스콕스는 무장 보호를 받는 선박에는 보험료를 50% 감면해 주고 있다. 덴마크 해운사 클리퍼 그룹은 몇 달 전 아덴만을 항해하는 선박에 6명의 무장 해병을 승선시키겠다는 러시아 해군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클리퍼는 러시아 선원들을 상당수 고용하고 있다. 민간 경비 회사들은 주로 퇴역 군인들로 구성된 무장 경비 인력을 요청하는 해운 회사들이 늘고 있다고 전했다.아직은 무장에 반대하는 해운 회사들이 훨씬 많다. 제임스 크리스토둘루 인더스트리얼쉬핑엔터프라이즈 최고경영자(CEO)는 “무장병을 사용하는 것은 잠재적으로 많은 국가와 국제법을 위반하는 것이며 해양 조약에도 어긋난다”고 말한다. 그러나 무장 경비대의 비용을 감당할 수 있는 대형 회사들 위주로 이들을 고용하려는 움직임이 점차 늘고 있다고 월스트리트저널은 전했다.박성완 한국경제 기자 psw@hankyung.com© 매거진한경,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