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동치는 은행세 신설 논란

미국이 은행세(bank tax) 신설을 놓고 시끄럽다. 연초 은행들의 고액 보너스 문제로 한차례 들끓었던 민심은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금융회사에 은행세 부과 방침을 내놓은 후 다시 찬반양론으로 갈려 요동치고 있다.이 문제는 세금 신설이라는 민감한 부분을 건드린 데다 비슷한 상황에 놓여 있는 다른 유럽 국가들에도 영향을 줄 수 있기 때문에 더욱 관심을 끌고 있다. = 알려진 대로 은행세는 세금(tax)이라기보다 일종의 징벌적 성격을 가진 부과금(fee)이다. 지난 1월 14일 오바마 대통령이 기자회견을 통해 발표한 은행세의 내용은 대략 이렇다.공식 명칭은 우리말로 하면 ‘금융 위기 책임료(finantial crisis responsibility fee)’ 정도로 해석된다. 지난해 정부로부터 구제금융을 받았거나 간접적으로 지원 혜택을 받은 금융회사들로부터 공적자금을 환수하고 금융 위기 재발 방지 차원에서 투기 목적의 자산 보유를 막자는 의도로 제안됐다.과세 대상은 제한적이다. 미국 내에서 활동하고 있는 자산 규모 500억 달러(약 57조5000억 원) 이상의 은행이나 저축기관, 보험사들로 50곳 정도가 포함될 것으로 예상된다.대상 금융회사들은 매년 자산의 0.15%를 세금으로 내야 한다. 과세 기준 자산에서 투기 성격으로 볼 수 없는 안전한 자산, 즉 법정자본금이나 미 예금보험공사(FDIC)로부터 보증을 받고 있는 예금 등은 제외된다. 예컨대 1조 달러의 자산을 가진 은행이 법정자본금이 1000억 달러이고, FDIC 보증예금이 5000억 달러라면 세금 액수는 600만 달러(=0.15%×(1조 달러-1000억 달러-5000억 달러)) 정도가 된다.미 금융 전문가들은 이 공식을 적용할 경우 씨티은행은 연간 22억 달러, 뱅크오브아메리카와 JP모건체이스는 15억 달러, 골드만삭스와 모건스탠리도 비슷한 규모의 부담을 지게 될 것으로 전망했다.오바마 미 행정부는 이 법안을 2011년 예산안에 반영해 오는 2월 의회에 제출할 예정이며 미 의회는 예산안 심사 때 이 법안도 함께 심사하게 된다. 실시 시점은 6월 30일부터 10년간이다. = 미 재무부는 이 항목으로 앞으로 10년간 최소 900억 달러의 추가 수입을 기대하고 있다. 그러나 이는 유동적이다. 오바마 대통령은 기자회견에서 “막대한 이익과 불순한(obscene) 보너스 등으로 볼 때 월가 금융사들이 이번 세금을 충분히 감당해 낼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며 “국민 혈세를 한 푼(a dime)까지 모두 돌려받겠다”고 밝혔다. 부실자산구제금융프로그램(TARP)으로 조성된 7000억 달러 중 약 1170억 달러가 손실날 것으로 예상된다. 따라서 필요하면 기간을 연장해서라도 손실분을 다 받아내겠다는 것이다. 미 행정부에서는 12년 정도 시행하면 1170억 달러를 환수할 수 있다는 얘기가 나오고 있다.이런 계획이 발표되자 월가가 발칵 뒤집혔다. ‘인기 영합 정책(populism policy)이다’, ‘불공평하다(unfair)’, ‘징벌적이다(punitive)’, ‘보복적이다(vindictive)’라는 비난이 쏟아지고 있다. 제이미 다이먼 JP모건체이스 최고경영자(CEO)는 의회 금융위기조사위원회 청문회에서 욕을 바가지로 먹고 나오는 상황에서도 이 법안에 대해서는 “세금으로 (은행들을) 벌주려는 것은 나쁜 아이디어”라고 날을 세웠다. 그도 그럴 것이 은행세는 대공황 이후 가장 큰 규모의 세목 신설안인 데다 금융 산업 전반을 흔들 수 있는 메가톤급 변수이기 때문이다.금융사들의 불평에도 일리는 있다. 가장 큰 불만은 이미 정부로부터 받은 지원금을 이자까지 쳐서 다 갚았는데 무슨 추가 환수냐는 것이다. TARP 예상 손실금 1170억 달러의 대부분이 제너럴모터스(GM)나 크라이슬러 등 자동차 지원 부문에서 발생하는데 왜 빚을 다 갚은 금융사가 대상이 돼야 하느냐는 불만이다.실제로 금융사들은 정부로부터 직접 지원받은 1820억 달러의 구제금융 자금 중 1650억 달러는 원금 상환 형태로, 130억 달러는 이자와 배당금 형태로 정부에 갚았다. 나머지 차액도 이미 갚는 일정이 잡혀 있다. 이런 금융사들이 추가 부담하고 GM이나 정부 돈을 가장 많이 쓰는 패니메이나 프레디 맥 등 모기지 업체는 과세 대상에 빠진 것은 불공평하다는 불만이다. = 금융사들의 격한 반응에도 불구하고 오바마 행정부와 미 민주당은 느긋한 모습이다. 의회 통과를 거의 기정사실화하는 분위기다. 이유는 간단하다. 금융회사들의 격렬한 반대와 공화당의 반발이 예상되긴 하지만 월가에 대한 국민적 반감과 오는 11월 있을 중간선거를 감안할 때 법안을 무산시킬 정도는 안 된다는 판단에서다.특히 공화당이 심각하게 반대할 경우 오바마 대통령의 말대로 ‘탐욕스러운 살찐 고양이(greedy fat cat:거액의 보너스를 챙기는 월가 금융인들을 비꼬는 말)’와 한패라는 인식을 줄 수 있고, 이는 결국 선거에 악재로 작용하게 된다.오바마 행정부와 민주당 지도부는 이번 법안을 재정 적자를 축소하면서 선거에 호재로 작용하는 양수겸장쯤으로 여기고 있는 듯하다. 비즈니스위크는 막강한 로비력을 자랑하는 월가 은행들도 이번 은행세 문제에 대해서만은 크게 힘을 쓰지 못할 것으로 예상했다.다름 아닌 ‘월마트 은행’의 허가 때문이다. 월마트는 수년 전부터 소매 금융 분야의 진출을 원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오바마 행정부는 필요할 경우 높은 수수료를 다운시키고 월가 금융사들을 제압하기 위한 카드로 월마트를 이용할 수 있다는 분석이다. 실제로 월가 은행 로비스트들은 월마트가 은행업에 진출할 경우 막강한 자본력과 전국 점포망을 이용한 네트워크, 최저가 정책을 통한 막강한 흡인력으로 은행 산업의 기저를 흔들 것으로 보고 이를 막기 위해 상원을 중심으로 그동안 엄청난 로비를 벌여온 터다. = 파이낸셜타임스(FT)는 은행세 신설과 관련, 세계 최대 채권 투자 기업인 핌코의 모하메드 엘 에리언 최고경영자의 발언을 인용, “은행세가 당장은 이슈지만 장기적으로는 금융시장에 큰 변수가 되지 못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신문은 그러면서 현재 진행 중인 미 금융계와 정부 간 힘겨루기 현상보다는 법안이 갖는 의미에 주목해야 한다고 지적했다.가장 먼저 주목해야 할 점이 경제 위기 이후 첫 세목 신설이라는 점이다. 이번 은행세 신설은 날로 심각해지는 재정 적자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세금 인상이 불가피한 미 행정부로서는 증세 노력의 시발점이라는 의미를 갖는다. 특히 월가의 고액 연봉자들을 겨냥한 은행세가 성공할 경우 중간선거 이후 소득세 세율을 높이려는 시도도 어느 정도 성공할 가능성이 있다.이와 관련, 미 USA투데이는 12조 달러에 달하는 미 연방정부의 부채 문제를 거론하면서 대공황 직후 미국의 소득세 최고세율이 94%까지 올랐다는 점을 지적했다. = 두 번째는 미국도 이번 금융 위기를 계기로 탈(脫)제조 산업 이후 대안으로 금융 산업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게 될 것이고, 그런 맥락에서 이번 은행세 논의도 바라볼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세 번째는 은행세는 단순히 국민들의 분노를 가라앉히기 위한 정치적 행위나 재정 적자를 줄이기 위한 세수 확보 차원에서만 의미 있는 게 아니라 통화정책에서도 유의미하다는 지적이다. 사상 유례없는 공적자금 투자 이후 당연히 뒤따르게 될 통화 환수 측면에서 보면 은행세가 금리 인상이라는 과격한 도구를 피하면서 유동성을 축소할 수 있는 수단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마지막으로 미국의 은행세 도입은 다른 나라에도 영향을 줄 수 있다. 실제로 유럽연합(EU)은 스웨덴의 제의에 따라 오는 4월 역내 재무장관 회담에서 미국식 은행세를 채택하는 문제를 다룰 예정으로 알려졌다. 스웨덴의 안드레스 보리 재무장관은 최근 EU 재무장관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금융 위기가 공공 재정을 또다시 위협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오바마 대통령이 제시한 방식의 은행세를 범EU 차원에서 채택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제의했다. 스웨덴은 지난해부터 은행 대차대조표상 부채에 대해 0.036%를 과세해 국내총생산(GDP)의 1%에 달하는 세수를 올린 것으로 알려졌다.채플힐(미 노스캐롤라이나 주)= 박수진 한국경제 기자 notwoma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