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테리아 면역 기제 활용한 신기술 등장…대량생산 가능해 파급력 클 듯

삼성서울병원 차세대 유전체 염기서열 분석기/김영우 기자youngwoo@hankyung.com20110527......
삼성서울병원 차세대 유전체 염기서열 분석기/김영우 기자youngwoo@hankyung.com20110527......
어느새 거의 20년 전의 영화가 되어버린 ‘가타카(Gattaca, 1997년)’에는 유전공학 기술의 발달이 가져올 디스토피아에 대한 섬뜩한 경고가 펼쳐진다. 영화가 배경으로 하는 미래 시대는 작은 신체 조직으로부터 간단하게 각 개인의 유전자 상태를 검사하고 각종 육체적·정신적 능력과 결함을 예측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시대의 기술적 경이는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부모의 유전자 가운데 우월한 유전자만 쏙쏙 모은 아이를 맞춤 인공수정해 낳을 수 있기까지 하다.

지금도 입시가 끝난 고3 겨울방학만 되면 말 그대로 뼈를 깎는 고통도 마다하지 않고 ‘환골탈태’하는 이들이 어디 한둘인가. 그렇지 않아도 자녀의 미래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된다면 아낌없는 경쟁에 나서는 한국 사회에서 일단 그런 ‘유전자 성형’ 기술이 나왔다면 전문 클리닉마다 장사진을 이룰 것은 눈에 선하다. 그러한 기대와 불편함을 동시에 품고 있는 연구자와 관찰자들에게 지난 1년여는 굉장히 중요한 기술적 이정표가 우뚝 선 한 해로 기록될 것이다. 바로 3세대 ‘유전자 가위’로 불리는 크리스퍼(CRISPR) 기술의 출현 덕분이다.

유전 정보의 핵심을 이루는 DNA는 아데닌(A)·구아닌(G)·시토신(C)·티민(T)이라는 네 가지 염기가 두 가닥의 나선을 이루고 있다는 것은 한 번쯤은 들어봤을 것이다. 생명체는 이 DNA에 기록된 정보에 따라 단백질을 합성하고 이 단백질이 체내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화학반응에 개입해 우리의 생김새, 활동 능력, 성격 등에 영향을 준다. 알코올 분해 효소를 생성하는 정보를 담고 있는 DNA에 문제가 있다면 술 한두 잔만 마셔도 취해 버리거나 심한 경우 죽는 일이 벌어질 수도 있다. 유전공학의 궁극적인 목표는 우리가 원하는 생체 기능이 나타나도록 이러한 DNA를 변화시키는 데 있다.


유전자 ‘이식’에서 ‘교정’으로
과거 1970년대부터 한참 이야기되던 유전공학 기술은 대부분이 유전자 재조합(recombination)이라는 방법을 이용한 것들이었다. 이것은 어떤 생물(주로 대장균과 같은 미생물)의 DNA 일부를 잘라내고 다른 외부의 DNA 조각을 끼워 넣어 붙이는 방법이다. 이때 DNA를 잘라내는 가위 역할을 하는 것이 이른바 제한 효소(restriction endonuclease)이고 다시 붙이는 풀 역할을 하는 것이 연결 효소(ligase)다. 원칙적으로 어떤 생물의 특성을 유발하는 DNA를 알고 있다면 이 부분을 잘라내 다른 생물에게 이식함으로써 이 특성이 나타나게 만들 수 있다. 이를 이용한 대표적인 사례가 한창 논란거리이기도 한 유전자변형생물체(GMO)다.

해충에게 소화불량을 일으키는 단백질을 생성하는 미생물의 DNA 조각을 콩이나 옥수수의 DNA에 삽입해 역시 해충에 잘 견뎌 내는 작물 품종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자연 진화의 원동력이 되는 돌연변이(mutation)를 이용한 방법도 많이 연구돼 왔다. 돌연변이는 DNA의 복제 과정이 잘못 일어나거나 자외선·방사선·화학물질 등 외부 자극에 의해 DNA가 절단 또는 변화돼 생겨난다. 식물 씨앗에 강제로 방사선을 쐬어 주고 거기에서 생겨난 돌연변이 중 유익한 것들만 골라내는 방법이 가장 초보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방법은 사전에 DNA의 어느 부분이 바뀌게 될지 알 수 없기 때문에 특정 부분만 골라 돌연변이를 유발하는 ‘부위 지정(site-directed) 돌연변이 유발’ 기술이 다양하게 발전됐다. 이는 작은 돌연변이 DNA 조각을 만들고 앞서 설명한 재조합 기술을 이용해 기존 DNA에 삽입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렇게 하면 좀 더 정교하게 유전자의 변화를 제어할 수 있게 된다.

하지만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이러한 방법들에는 많은 한계가 있어 왔다. 우선 자연적으로 존재해 온 제한 효소는 잘라낼 부분을 정확하게 집어내기가 어려웠다. 예를 들어 대하소설 ‘토지’의 ‘사람마다 차이는 있지만 모두가 다 사람은 완벽하지 못해’라는 구절 가운데 ‘있지만’을 ‘있다지만’으로 바꾸고 싶다고 하자. 워드프로세서의 찾아 바꾸기 기능에서 ‘있지만→있다지만’을 이용했다면 이내 크게 실수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소설 내에 수천 번은 등장할 ‘있지만’이 모두 ‘있다지만’으로 바뀌었을 테니 말이다. 예전 제한 효소의 기능은 ‘있지만’과 같이 앞뒤 한두 글자만 맞아도 모두 바꿔 주는 것과 같아 우리가 원하지 않는 부분이 잘리고 삽입되는 경우도 많이 발생한다. 이를 나중에 일일이 골라내 의도했던 결과만 찾아내는 데도 적지 않은 수고가 드는 비효율적인 방법인 셈이다.

이런 문제를 피해 가는 방법은 무엇일까. 누구나 쉽게 생각할 수 있듯이 ‘차이는 있지만 모두가→차이는 있다지만 모두가’ 식으로 앞뒤 문맥을 바꾸기 규칙에 더 많이 반영해 주면 된다. 이렇게 하면 걸리는 경우의 수가 확 줄어든다. 아예 ‘사람마다 차이는 있지만 모두가 다 사람은’이라는 식으로 더 길게 넣어주면 제아무리 장편소설이라고 해도 정확히 20권 349페이지의 해당 부분 하나만 걸릴 것이다.


대하소설에서 원하는 구절 찾기와 유사
2003년에 바로 이러한 원리를 이용한 새로운 유전자 가위 기술이 등장했다. 절단할 부위 앞뒤로 3개의 염기 순서가 일치해야 들러붙는 단백질 모양 물질, 즉 징크 핑거(zinc finger:아연 집게)를 이용한 것이다. 이러한 징크 핑거 3~6개와 제한 효소를 결합한 징크 핑거 뉴클레아제(ZFN)를 이용하면 절단 부위를 정확히 한 군데로 좁힐 수 있게 된다. 비로소 이때부터 ‘유전자 가위’라는 말이 등장하기 시작했으며 ZFN을 흔히 1세대 유전자 가위라고 한다.

이를 개선하려는 노력 끝에 2011년에 등장한 것이 탈렌(TALEN)이다. 탈렌의 원리는 ZFN과 유사하지만 징크 핑거 대신 TAL 이펙터(effector)라는 단백질을 쓴 것이다. 징크 핑거는 염기를 3개 단위로 인식하지만 TAL 이펙터는 1개 단위로 인식하기 때문에 검색 조건을 더욱 세밀하게 정해 줄 수 있다. 비유하자면 징크 핑거로는 ‘차’, ‘이’, ‘는’, ‘있’과 같이 음절 단위의 조건 지정이 가능한 것이고 TAL 이펙터는 ‘ㅊ’, ‘ㅏ’, ‘ㅇ’, ‘ㅣ’, ‘ㄴ’, ‘ㅡ’, ‘ㄴ’과 같이 음소 단위의 조정까지 가능하다. 그래서 탈렌은 한층 진보된 2세대 유전자 가위라고 불린다.

하지만 ZFN이나 탈렌이나 모두 염기를 인식하는 부분이 단백질이어서 만들기가 어렵다는 문제가 있었다. 제아무리 좋은 가위라고 해도 장인이 하나하나 공들여야만 만들어진다면 보편화되는 데 한계가 있다. 어디서나 쉽게 살 수 있는 공구 수준이 돼야 관련 지식과 기술이 빠르게 발전할 수 있다.

여기에 돌파구를 열었다고 평가되는 것이 바로 작년에 발표된 크리스퍼다. 크리스퍼의 원리는 재미있게도 미미한 박테리아가 더욱 작은 침입자, 즉 바이러스의 공격에 대응하기 위해 쓰는 면역 메커니즘에서 발견됐다.

바이러스 내부에 외부 바이러스의 DNA가 침입하면 박테리아는 이 DNA의 공격을 무력화하기 위해 특정 부위를 찾아내고 이 부분을 파괴하는 ‘Cas9’라는 효소를 끌어들인다. 이때 DNA 검색에 이용되는 것이 단일 유도(single guide) RNA, 즉 sgRNA라는 것이다. 박테리아들은 과거에 침입했던 바이러스의 DNA 정보를 이런 유도 RNA 형태로 저장해 놓고 공격에 대비하는, 즉 면역을 획득하는 셈이다.

원리를 보면 앞서의 징크 핑거와 TAL 이펙터가 단일 유도 RNA로 바뀌고 제한 효소가 Cas9으로 바뀐 것으로 생각하면 된다. 하지만 결정적으로 RNA는 단백질에 비해 구조적으로 간단하고 그만큼 만들기도 매우 쉽다는 점이 결정적인 장점이다. 유전자 가위가 장인(소수의 전문 연구실)의 영역에서 손쉬운 대량생산이 가능한 영역으로 내려오고 있는데 크게 기여했다는 점에서 이는 3세대 유전자 가위로 불리기에 손색이 없을 정도다. 이제 관련된 기술이 계속 발전된다면 인류는 단순히 오리고 붙이는 가위를 넘어 점점 개별 유전체(genome)의 미세한 영역까지 하나하나 뜯어고칠 수 있는 예리하고 정교한 메스를 손에 넣게 될 것으로 예상된다.


채승병 삼성경제연구소 수석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