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조조정 전도사' 이헌재 전 부총리, EY한영 신년 세미나서 '쓴소리'
“2016년을 한국 경제 패러다임 변화의 원년으로 삼아야 합니다. 지배 구조에서 행동 양식까지 새로운 체제를 모색해야 합니다. 성장통을 두려워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6·25전쟁 이후 최대 위기라던 국제통화기금(IMF) 사태도 극복한 경험이 있습니다.”지난 1월 12일 서울 소공동 롯데호텔에서 열린 EY한영 신년 세미나 ‘2016년 경제 전망 및 저성장 시대, 기업의 활로 모색’에서 이헌재 전 경제부총리가 한 말이다. 이 전 부총리는 정부와 기업이 저성장 시대를 맞아 시스템을 전면 재점검하는 것은 물론 타성을 버려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 전 부총리는 한국 경제를 ‘성장통 앓는 과정을 피하려다 미처 자라지도 못한 채 늙어버린 아이’에 빗대 말했다. 그는 “우리 경제의 산업구조와 경제 운용 방식이 한계에 이르렀다는 점을 모든 경제 주체가 알고 있지만 전략이라곤 그저 세계경제가 회복되기만을 기다리는 것뿐”이라고 꼬집었다.
이 전 부총리는 한국 경제의 가장 큰 과제로 산업구조의 취약성을 꼽았다. 그는 “정부가 과거처럼 산업 지도를 놓고 고민하기보다 기업 지도를 살펴야 한다”고 강조했다. 산업별 정책 대신 각 기업의 경쟁력에 따라 효율적으로 배분하는 지원책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는 “정부의 산업 정책이 자생 능력은커녕 은행 등의 도움을 받아 유지하는 좀비 기업을 양성하고 경쟁력 있는 기업까지 망치는 독소가 되고 있다”며 “부실기업의 구조조정을 더 이상 미뤄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그는 “기업의 잠재 부실을 떠안고 있는 은행권의 체력마저 고갈되면 연금에 쌓인 재원을 건드려야 할 상황이 온다”고 경고했다. 비효율의 적체를 방치하기에는 저성장 경제구조가 한계에 이르렀다는 판단에 따른 발언이다.
기업에 대한 비판도 서슴지 않았다. 이 전 부총리는 “우리 기업은 장기적이고 진지한 전략보다 당장 살아남기 위한 임시변통적 대응에 급급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재벌 기업마저 대량 감원 조치에 나서면서 하청 업체 도산에 따른 중산층 가장의 실직은 물론 영세 자영업자 및 서민층에게까지 피해가 확산되고 있다”고 말했다.
최근 면세점 사업권을 두고 벌어진 기업 간 제로섬 게임에 대해서는 다소 거친 표현을 써가며 날을 세웠다. 그는 “문제는 다른 기업의 면세점을 빼앗아 오는 게임에 목숨을 거는 재벌 그룹의 행태”라며 “재벌에 의해 한국 경제가 지탱할 수도 있을 것이란 믿음은 이제 확실히 버려야 할 때인 것 같다”고 비판했다.
중국 소비자 겨냥해 제조업 바꿔야
이 전 부총리는 기업에 대한 제언으로 ▷인터넷과 정보기술(IT) 등 고객 공유 기반 기술의 발전에 따라 예기치 못한 경쟁자에 대비할 것 ▷동일노동·동일임금·생산성 기여도를 통해 설명이 가능한 임금 격차 구조로 정비할 것 ▷현실을 반영한 경영지표를 확보할 것 ▷부채 구조를 적극 관리하고 플랜 B를 마련할 것 ▷기업 시스템을 전면 재점검하고 기업 내 관료주의를 과감히 버릴 것 등을 주문했다.
한국 경제를 둘러싼 미국·중국·일본 등 주변국 경제 정세에 대한 분석도 이어졌다. 이 전 부총리는 글로벌 플레이어들의 헤게모니 싸움에서 파생된 금리 인상, 평가절하, 유가 하락 등의 정책으로 한국 경제에 피해가 몰려오는 현황을 짚었다. 특히 한국 경제에 영향을 끼치는 중국 시장 전망에 대해 확실성이 무엇인지 잘 들여다볼 것을 주문했다.
이 전 부총리는 “중국 경제의 3대 동력은 도시화의 여력, 중서부 지역 개발, 소비 업그레이드”라며 “중국 내수 시장을 겨냥해 소비자의 기호와 취향에 맞춰 국내 제조업을 재조정해야 한다”고 밝혔다.
둘째 연사로 나선 윤만호 산은금융지주 전 사장 역시 어려운 대내외 환경을 헤쳐 나가기 위한 기업들의 체질 개선이 필요한 시점이라고 강조했다. 윤 전 사장은 “국내 기업이 산업별로 성장 정체에 직면했지만 극복 방안은 분명 존재한다”고 말했다.
윤 전 사장은 저성장을 극복하기 위한 다섯 가지 방안과 함께 적극적 대응을 통해 위기를 기회로 바꾼 글로벌 기업들의 사례를 소개했다.
윤 전 사장은 재무구조 최적화가 성장 정체를 탈출할 수 있는 가장 우선적인 방법이라고 강조했다. 자산 및 투자의 최적화와 캐시플로 진단 등이 병행된다면 이른 시간 안에 성장 정체를 타개할 수 있다는 조언이다.
그는 사업 포트폴리오 재편으로 체질을 바꿔 온 미국 듀퐁을 예로 들었다. 듀퐁은 화약·화학·신소재·바이오순의 신규 사업 개척을 통해 지난 60년간 ‘포천 500대 기업’의 위상을 유지하고 있다. 윤 전 사장은 “경영자는 재무 성과와 수익 성장 가능성, 그룹의 전략적 가치, 매각 가능성 등을 기준으로 냉철한 의사 결정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핵심 기술을 확보하기 위한 연구·개발(R&D) 투자의 중요성도 강조했다. 윤 전 사장은 중국 최대 네트워크·통신 장비 공급 업체인 화웨이와 미국의 다국적기업인 프록터앤드갬블(P&G)을 예로 들었다.
화웨이는 2014년 R&D 투자비용을 전년 대비 29.4% 늘리는 등 독자적 R&D 역량으로 저성장을 넘어섰다. P&G는 협력 업체는 물론 경쟁사와 기술·유통·인력 제휴를 하는 등 오픈 이노베이션을 통한 R&D 혁신 사례를 선보였다.
윤 전 사장은 글로벌 운영 성공 사례로 스페인의 의류 업체인 자라를 소개하기도 했다. 자라는 해외 점포의 정보를 실시간 분석해 신속한 시장 대응과 재고 감축, 가격 최적화 등을 실현했다.
윤 전 사장은 “디지털 혁신을 위해서는 디지털화 계획, 업무 프로세스 재점검, 빅 데이터 분석 역량 구축, 디지털 거버넌스 구축 등 단계별 전략이 필요하다”며 “디지털 환경에 맞춰 변화한 기업만이 선도 기업의 지위를 유지할 수 있다”고 조언했다.
그는 “국내 기업은 저성장 시대 극복을 위해 재무구조 최적화와 사업 포트폴리오 재편이 필수”라며 “산업별로 핵심 기술 확보, 글로벌화, 디지털 혁신을 선택적으로 추진해야 한다”고 밝혔다.
최은석 기자 choies@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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