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간 분쟁 막으려면
법적 요건 갖춰야 '유언' 효력 인정…공증이 가장 무난
신탁이든 유언이든 목적은 하나다. 상속인이 사후 재산 분배 등에 대한 ‘자신의 의사’를 명확히 밝혀 혹시 모를 가족 간의 불화를 막기 위한 것이다.
◆ ‘연월일’까지 정확히 기재해야
150억원대의 자산가 A 씨는 2005년 ‘본인의 모든 재산을 아들에게 물려준다’는 내용의 유언장을 작성했다. 이 유언장 말미에 작성 연월일(2005. 11.2)·주민등록번호·성명을 적은 후 도장까지 찍었다.
작성 연월일 옆에는 ‘암사동에서’라고 장소를 기재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유언장은 2014년 9월 대법원으로부터 ‘유언장으로서의 효력이 없다’는 판결을 받았다. ‘암사동에서’라는 주소가 구체적이지 않아 자필 유언의 적법한 요건을 갖추지 못한 것이다.
지난 1월 하나금융연구소에서 발표한 ‘상속 시장 분석 및 고객 세분화 방안’에 따르면 2012년 기준으로 상속 자산 시장 규모 중 ‘생전 유언 작성을 통한 유언 시장’만 약 35조원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 보고서에 따르면 보유 자산 5억원 이상, 만 40세 이상의 전국 일반인 300명을 대상으로 설문 조사한 결과 사망 전 유언장을 작성하겠다고 응답한 비율이 54%에 달했다. 최근 들어 상속과 관련한 분쟁이 급증하면서 유언장 작성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 것으로 분석된다.
하지만 이와 달리 현재 한국의 유언장 작성 비율은 그리 높지 않다. 유언장이라는 것이 워낙 사적인 영역이라 정확한 통계를 내기가 쉽지 않지만 업계에서 추산하기로는 대략 3~5% 수준에 머무르는 것으로 보고 있다.
이 중에는 A 씨의 사례처럼 유언장의 요건을 정확히 갖추지 못해 무효화된 사례도 적지 않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한국에선 유언장에 대해 민법에 상세한 규정을 두고 있다. 법 규정을 벗어난 유언은 ‘일기’나 ‘가훈’과 다를 바 없다. 법에 정해진 유언의 방법은 5가지다. 자필 유언 증서와 녹음·공정증서·비밀증서·구수증서다.
법적으로 유효한 자필 유언장을 만들기 위해서는 내용·날짜·이름·주소를 모두 손으로 쓰고 반드시 도장을 찍어야 한다. 이때 가장 흔히 하는 범하는 실수는 주소와 날짜다. 날짜는 연월뿐만 아니라 일까지 정확하게 기재해야 하며 주소 역시 아파트의 정확한 동·호수까지 나와야 한다.
글자를 모르는 사람이나 글자를 쓰기 어려울 만큼 거동이 불편하다면 ‘녹음’에 의한 유언도 가능하다. 이때는 녹음한 날짜, 유언자의 이름, 증인 1명의 녹음이 필요하다.
공정증서에 의한 유언은 공증인을 통해 유언을 남기고 증명하기 위해 작성하는 문서다. 2명 이상의 증인이 필요하며 유언자가 직접 공증인 앞에서 이야기해야 한다. 다른 유언 방식에 비해 시간이나 비용이 많이 들어가지만 공정증서의 원본을 공증인이 보관한다는 점에서 분실·위조·파손 등의 위험이 적다.
비밀증서는 유언서의 존재는 명확히 해 두되 유언의 내용을 비밀로 하고 싶은 때 유언장을 작성해 봉투에 밀봉하는 방식이다. 질병이나 급박한 사정으로 다른 방식으로 유언하는 것이 불가능할 때는 예외적으로 구수증서를 남길 수 있다. 구수증서는 2인 이상 증인이 필요하고 유언자가 그중 한 명에게 유언의 취지를 구술한 뒤 이를 기록하고 낭독하는 방식이다.
◆배우자 노후까지 챙길 수 있는 ‘신탁’
“장남이 나에게 효도를 많이 했으므로 장남에게 기여분 100%를 인정한다.”
어느 자산가가 이와 같은 유언을 남겼다. 이 자산가가 말한 ‘기여분’이란 공동 상속인 중 유언자를 특별히 부양하거나 유언자의 재산을 유지·증식하는 데 기여한 공을 인정해 이를 상속분 산정에 가산해 주는 제도로, 일명 ‘효도상속분’이라고 불린다.
하지만 이런 유언은 무효다. 유언법정주의에 따라 ‘법이 정한 사항’만 유언할 수 있기 때문이다. 현재 ‘법에 정해진 유언’은 재산 분배, 친생 부인(내 자식이 아니라고 주장), 인지(내 자식이 맞는다고 주장)만 해당된다.
이때 유언 대신 고려할 수 있는 것은 ‘신탁’이다. 한국에서는 2012년 7월 신탁법이 개정돼 신탁도 유언의 효력을 발휘할 수 있게 됐다. 금융회사 등을 통해 상속 자산을 맡아 관리하는 신탁은 다양한 조건을 설정할 수 있다. 상대적으로 제한이 많은 유언에 비해 보다 유연하게 상속 설계가 가능하다.
따라서 최근 상속 플랜에서 신탁에 대한 관심이 늘고 있긴 하지만 일반적으로는 여전히 신탁이라는 개념 자체가 생소한 것은 사실이다. 이는 하나금융연구소의 ‘상속 시장 분석 및 고객 세분화 방안’ 보고서에도 잘 나타나 있다. 상속형 신탁을 ‘잘 알고 있다’는 응답자가 전체의 7.3%에 불과했다. 특히 ‘전혀 들어본 적 없다’는 비율이 과반인 67%에 달했다. 신탁이 유언과 확실히 대비되는 부분은 신탁자(유언자) 본인의 의지를 충분히 반영한 ‘맞춤형 계약’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자신이 치매에 걸리면 자녀들이 노후 재산을 팔아버릴까 걱정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이때 신탁을 이용하면 이를 원천적으로 막을 수 있다. ‘신탁자가 치매에 걸릴 때 병원비를 신탁재산에서 지출한다’는 조항만 삽입하면 되는 것이다. 혹시라도 자녀들이 부모가 치매에 걸린 것을 안 이후 부모의 신탁재산을 돌려받기 원하더라도 수탁자(맡긴 재산을 관리해 수익을 내는 주체)인 은행이 자녀의 요구를 거절하고 계속해 병원비를 지급할 수 있다.
본인의 노후뿐만 아니라 배우자의 노후를 같이 챙길 수도 있다. 수익자에 ‘배우자’를 추가하면 간단하게 해결된다. 월세가 나오는 건물을 은행에 신탁할 때 ‘신탁자의 사망 시 수익자를 배우자로 변경하며 그 기한은 배우자의 사망 시까지로 한다’는 조항을 삽입하는 식이다.
이는 자녀가 미성년자일 때도 마찬가지다. 상속인이 어느 정도 자산 관리 능력이 생기는 나이에 유산을 상속하도록 별도의 계약을 하는 것이다.
‘신탁자 사망 시부터 자녀가 결혼할 때까지는 수익자로 자녀를 지정해 생활비를 부양하고 자녀가 결혼하면 신탁 계약을 해지하고 자녀에게 재산을 물려준다’는 내용을 삽입하면 자녀 부양과 상속 문제를 동시에 해결할 수 있다.
‘세대 연속 상속’이 가능하다는 것도 장점이다. 유언장은 최초의 상속인 지정만 가능하지만 신탁은 할아버지가 자식 세대를 거쳐 손자에게 유산을 물려주도록 설계할 수 있다.
신탁은 부동산 관리와 가업 승계 영역에서도 상당히 매력적인 옵션으로 주목받고 있다. 건물 및 임차인 관리, 해외 거주자와 국내 건물 관리, 건물의 리모델링 및 신축 등에 이르는 서비스도 신탁의 영역에 들어와 있다.
특히 가업 승계 과정에서는 유류분(상속인에게 보장된 최소한도의 상속 지분)으로 인해 경영권이 흔들리는 사례가 빈번하다. 이때 경영권 지분을 신탁으로 묶어 놓고 상속인들이 해당 주식에서 나오는 수익이나 배당만 가져가도록 하는 등의 방식으로 해법을 제시하기도 한다.
■ 돋보기
스마트폰으로 쓴 유언, 효력있을까
요즘 누구나 쉽게 사용할 수 있는 스마트폰으로 유언을 남기는 것은 민법상 효력이 있을까. 이에 대한 답은 스마트폰의 어떤 기능을 이용하느냐에 따라 ‘예’가 될 수도 있고 ‘아니오’가 될 수도 있다.
스마트폰 메모장을 통해 타이핑 문서로 남기는 것은 유언장으로서 효력이 없다. 유언자의 말을 본인이나 타인이 컴퓨터로 타이핑한 유언서는 앞서 말한 5가지 유언 방식 중 어느 것에도 해당되지 않기 때문이다.
만약 손글씨가 가능한 스마트폰 애플리케이션을 사용한다면 어떨까. 방효석 하나은행 상속증여센터 변호사는 “필적 감정을 할 수 있다면 충분히 가능할 것으로 보인다”면서도 “다만 스마트폰 자필 유언은 위·변조가 가능하기 때문에 대법원이 어떻게 판결을 내릴지는 두고 봐야 한다”고 말했다.
자필 유언이 손글씨만 인정하는 이유는 위조와 변조를 방지하기 위해서다. 종이에 쓴 자필 글씨는 고치더라도 흔적이 남지만 스마트폰 자필 유언은 ‘흔적 없이’ 위·변조가 가능하다는 점을 무시할 수 없다.
따라서 스마트폰을 이용한 가장 안전한 방법은 ‘동영상 녹화’다. 위 5가지 방법 중 녹음에 의한 유언에 해당되는데, 유언 방식이 간편하고 비용이 들지 않는 것이 장점이다. 녹음으로 유언을 남길 때 가장 큰 분쟁의 소지는 녹음된 음성만으로는 실질적으로 녹음자가 유언자인지 정확하게 알기 어렵다는 점이다. 이를 판단하기에 스마트폰 동영상은 더욱 유용할 수 있다.
이정흔 기자 vivajh@hank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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