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렉시트부터 미국 대선 등 글로벌 대형 이벤트에 금값이 오를 일만 남았다." (올레 한슨 덴마크 삭스 은행 원자재전략부 대표)
금(金)은 혼돈과 공황의 시기에 진가를 발휘하는 대표적 안전자산이다. 최근 불안정한 글로벌 환경 속에서 가장 주목 받는 투자 자산으로 꼽힌다.
자산가 A씨에게 금(金)에 대한 믿음은 각별하다. 과거 1kg짜리 골드바를 4000만 원 초반대에 구입했던 그는 이후 금값이 6000만 원(kg당)을 넘어서자 시장에 되팔았다. 구입 시기로부터 약 5년 만이었다. 매매차익으로 다시 금을 구입한 후 금값이 아직 본전에 이르지 못했지만 전혀 괘념치 않는다. 그는 “(상승을) 기다리면 되니까 괜찮다”며 “주식처럼 불안하지 않다”고 말했다. 고금을 막론하고 자산가들이 이구동성으로 아끼는 상품 중 하나가 금이다. 손에 잡히는 실물자산이면서, 매우 값비싼 대체자산(alternative investment)이기 때문이다.
귀금속 컨설팅 업체 CFMS에 의하면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저성장 시대를 맞아 금 수요(보석용, 산업용, 투자용)는 전반적으로 한풀 꺾였다. 2006~2008년 국내 금의 전체 수요는 110~120톤을 오갔지만, 2009년 이후 지난해까지 80~90톤 수준에 머물고 있다. 그런데 투자 수요는 전혀 딴판이다. 그야말로 비약적인 성장세다. 2006년 만 해도 2.7톤에 불과했던 투자 수요가 2015년에는 20톤을 넘어섰다.
한국거래소(KRX)에 따르면 연초 이후 KRX 금시장의 일평균 거래량(5월 16일 기준)은 13.1kg으로 전년 대비 47%나 증가했다. 지난 2014년 5.5kg에서 2015년 8.9kg으로 크게 늘어난 데 이어 올해는 13kg을 넘어선 것. 일평균 거래대금도 연초 이후 6억1000만 원으로 지난해 평균에 비해 60.5%나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했다. 올 들어 금값 폭등, 아직 ‘가격 매력 있다’
금값이 올해 들어 ‘이름값’을 했다. 국제 금 가격은 올해 1분기 17% 급상승했다. 30년 이래 최대 분기 상승폭이다. 올 초 온스당 1073.18달러로 출발한 금 가격은 5월 3일엔 온스당 1297달러까지 치솟았다. 6월물 금 선물은 뉴욕에서 온스당 1276달러에 거래됐다. 뿐만 아니다. 브렉시트((Brexit: 영국의 EU 탈퇴)가 가결된 지난 6월 24일에는 온스당 1320달러로 급등했다.
하지만 ‘과거의 영광’에는 턱도 없다. 국제 금값은 지난 2011년 9월 온스당 1899달러로 고점을 찍은 이래 고꾸라졌다. 올해 들어 크게 상승했지만 여전히 2011년 고점 대비 30% 가량 빠진 수준이다. 올해 금에 대한 투자 수요가 늘어난 건, 이러한 금값 하락을 투자 기회로 판단한 경우가 많았다는 방증이다.
온스당 1200~1300달러 수준의 금 시세가 금 생산 원가에 가깝다는 분석도 나온다. 김종철 신한은행 투자자산전략부 부부장은 “금의 생산 원가는 지역 및 생산 방식에 따라 다르지만 최근 수년간 온스당 1100달러 선에서 움직임을 보였기 때문에 금값이 추가 하락하기 어렵다고 보는 시각이 우세하다”고 말했다.
에너지 시장조사기관 우드매켄지 등에 따르면 금의 생산원가는 지난 2003년부터 2012년까지 10년간 무려 271%나 상승했다. 이에 대해 황선구 한국거래소(KRX) 금시장 팀장은 “21세기 들어서 상승한 에너지 가격, 인건비, 환경 파괴에 따른 금광 탐색·복구 비용 등의 상승으로 금값은 앞으로도 필연적으로 상승할 수밖에 없는 구조다”라고 말했다.
일반 상품과 달리 금은 수요가 늘어난다고 마구 공급할 수 있는 상품도 아니다. 그런 점에서 향후 20년 내 채굴할 수 있는 금의 양이 줄어들고 있다는 것은 더 치열한 머니 게임을 예고한다. 황선구 팀장은 “금광을 발견하고 채권 허가를 받아 상업 생산의 정점에 도달하는 데 약 20년이 걸리는데, 1995년을 정점으로 새로운 금광의 발굴이 둔화됨에 따라 향후 금의 생산량이 줄어들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종이돈의 신뢰 하락, 금값 상승 예고 새로운 골드러시(gold rush)의 주요 동력은 안전자산에 대한 선호 심리다. 이는 세계적인 장기 불황과 롤러코스터를 타는 변덕스런 금융환경에 기인한다. 중국 등 신흥국 경제에 대한 우려가 지속되고 각국 통화정책에 대한 의구심이 확대되고 있는 탓이다.
역사적으로 종이돈(대표적인 달러)에 대한 신뢰가 추락하면 금값은 올랐다. 오일쇼크와 맞물려 1971년 금태환제 폐지로 금이 달러 가치를 안정시키는 역할을 할 수 없자 되려 금값은 치솟았다. 이후 금융시장이 안정을 찾아가면서 2000년대 초반까지 금값은 내리막 길을 걸었다. 그러나 글로벌 금융위기로 주요국 통화가 남발되자 금값은 다시 무섭게 폭등했다.
“금을 소유하는 것은 정부를 믿지 못하기 때문이다”라는 허버트 후버 전 미국 대통령의 말처럼 정부의 통화정책이 제 기능을 하지 못하고, 금융시장이 요동칠수록 사람들은 금에 구애를 보낸다. 각국 정부도 금융시장과 경기의 안정성을 유지하기 위해 금 확보전에 뛰어든다.
전 세계는 아직도 글로벌 금융위기의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다. 미국, 유럽, 일본 등의 주요 국가는 양적완화라는 산소호흡기를 여전히 떼지 못하고 있다.
선우진 유안타증권 차이나마켓 애널리스트는 “각국의 화폐 발행량이 증가함에 따라 부실채권도 급격히 증가하고 있어 새로운 금융위기가 조만간 도래할 것이라는 우려가 크게 늘었다”며 “금은 유일하게 부채가 될 수 없는 금융자산으로 각 국가는 시장의 불안정성에 대비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금보유량을 증가시키고 있다”고 했다.
가장 대대적으로 금 확보에 나선 곳은 중국이다. 중국은 지난해 7월부터 월별 금보유고를 다시 발표하기 시작했다. 중단한 지 6년 만이다. 2015년 6월 말 기준 중국 금보유고는 1511톤. 2016년 3월에는 1638톤으로 9개월 만에 8.3% 늘어났다.
러시아도 조용히, 그러나 재빠르게 움직이고 있다. 지난해 러시아는 208톤의 금을 사들였고, 2014년엔 172톤의 금을 구입했다. 카자흐스탄 등 유라시아 지역의 중앙은행도 전례 없는 속도로 금 확보 대열에 나섰다.
일각에서는 중국을 필두로 한 이들 국가들이 달러가 아닌, 금과 연동된 국제통화질서로 재편하려는 ‘화폐전쟁’의 차원에서 금 모으기에 나섰다는 분석도 나온다. 계획대로 금이 달러패권을 대체하는 국제통화 시스템의 근간이 되면 금값이 천정부지로 치솟는 것은 뻔한 일이다.
세계금위원회(WGC)에 따르면 중국 중앙은행은 1054톤의 금을 갖고 있지만 외환보유액에서 금이 차지하는 비중은 고작 1.6%(2015년 2월 기준)다. 중앙은행별 순위를 보면 미국과 독일, 국제통화기금(IMF), 이탈리아, 프랑스 등이 1~5위를 기록 중이다. 한국은행의 금 보유량은 104.4톤으로 세계 34위다.
되살아나는 유가, 인플레이션 징후 인플레이션 헤지(hedge) 수요가 늘어나고 있는 것도 근래 금값 상승세를 견인하는 주요 변수다. 한국은행은 소비자물가 상승률이 하반기 1.45%, 내년 2.0%에 이를 것으로 내다봤다. 다시 뛰기 시작한 국제 유가가 물가를 밀어올리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 서부텍사스원유(WTI) 1개월물은 지난 2월 11일 배럴당 26.21달러까지 폭락했다. 지난 5월 17일 배럴당 48.31달러 수준으로 되살아났다. 지난해 10월 이후 최고치다.
이러한 물가 상승은 투자자들에게 희소식만은 아니다. 물가가 오르면 화폐 가치는 그만큼 떨어진다. 특정한 물건을 사기 위해 더 많은 돈을 내야 한다는 것이다. 인플레에 대한 불안이 커지면 금융자산보다 손에 잡히는 실물자산이 귀한 대접을 받게 된다.
김종철 부부장은 “인플레 대비 차원에서 과거에는 대표적인 실물자산인 부동산 투자를 고려하는 경우가 많았지만, 부동산 경기가 예전 같지 않은 상황에서 금은 더 값진 대안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여름은 계절적 비수기이고 그간의 오름폭도 있어 국제 금값의 일시적 하락 양상이 나타날 수 있으나, 3분기에 들어서면 인플레에 대한 우려 등으로 연중 고점인 1300 돌파가 예상된다”고 내다봤다.
저금리·저수익도 금 투자자에게 우호적인 환경이다. 매매차익 외에는 예금처럼 이자를 지급하지 않는 금의 상대적인 매력이 높아지고 있음을 의미한다. 시장에선 ‘금 랠리가 이어진다’는 낙관론이 우세하다.
억만장자 투자자이자 헤지펀드계의 대부인 조지 소로스는 “주가 빠지고 금값 뛴다”고 금에 배팅했다. CNN머니는 최근 소로스펀드가 미국 증권거래위원회(SEC)에 제출한 분기 유가증권보고서를 바탕으로, 지난 1분기에 세계 최대 금광 업체인 배릭골드에 2억6400만 달러(3103억 원)를 투자했고, 이와 함께 SPDR 금 상장지수펀드(ETF) 콜옵션 100만 주를 매수했다고 전했다.
올해 최대 온스당 1400달러까지 급등할 수 있는 전망도 나왔다. 올레 한슨 덴마크 삭스 은행 원자재전략부 대표는 최근 블룸버그 통신과의 인터뷰에서 “올해 다양한 리스크 덕분에 금값은 연말 더 오를 수 있다”고 전망했다. 브렉시트(Brexit: 영국의 EU 탈퇴)부터 미국 대선 등 글로벌 대형 악재가 이어지면서 안전자산인 금값이 오를 일만 남았다는 주장이다. 반대로 금값의 하락을 우려하는 시각도 있다. 금값은 미 기준금리와 역의 상관관계에 있다.
미국 경제 회복에 따른 달러 강세는 금 가격 상승을 견제하는 요인이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2011년 이후처럼 금값이 급락할 위험 또한 낮은 것으로 판단한다. 홍춘욱 키움증권 이코노미스트는 “하반기 한두 차례의 금리 인상이 단행된다면 국제 금값의 상승 탄력이 둔화될 수 있지만 안전자산 선호 심리 등으로 2011년 이후처럼 급락할 위험은 낮은 것으로 판단된다”고 분석했다.
다만 투기 수요 등으로 변질된 금의 ‘안전자산’ 성격도 다시 상기해봐야 할 시점이다. 투자의 귀재 워런 버핏은 “금의 가격 변동은 정크본드(투기등급 채권)만큼이나 변덕스럽다”고 충고했다. 라파포트 보고서에 따르면 금은 지난 10년간 169.9%나 상승했다(2014년 기준). 그러나 2000년대 중반 이후 상승세를 타기까지 1980년 이후 20여 년간 제자리걸음을 했다.
장기 분산투자의 차원에서 진득한 접근이 요구된다. 김인응 우리은행 압구정현대지점장은 “글로벌 경기 개선에 대한 기대가 낮고 환율전쟁의 조짐 등 금 가치를 높일 수 있는 요인이 많아, 3~5년 이상 투자 관점에서 자산의 일부(20% 이내)는 금에 묻어 두는 분산투자가 현명하다”고 말했다.
글 배현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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