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신인맥⑨ KT그룹]
{KTF 합병 후 무선으로 무게 이동…2008년 아이폰 도입해 ‘스마트폰 혁명’ 주도}
1994년 인터넷 시대 연 주역 ‘KT’ 고비마다 과감한 승부수
(사진) 지난해 9월 KT 서울 광화문사옥에서 열린 ‘대한민국 통신 130년’ 기념행사장을 한 가족이 둘러보고 있다. /한국경제신문

단 10분간 모든 전화·이동통신·인터넷이 되지 않는다면 대한민국은 어떨까. 아마도 국가와 국민 전체는 혼란에 빠지고 이로 인한 경제적 손실만 수천억원에 이르게 될 것이다.

현대 사회에서 통신은 없어서는 안 될 존재가 됐다. 대부분의 업무는 이미 전화·e메일·인터넷을 통해 이뤄지고 있다. 주식과 은행거래마저 인터넷과 모바일을 통해 이뤄지는 시대를 맞았다.

KT경제경영연구소가 분석한 자료에 따르면 1980~2013년 유·무선 통화는 약 64조km의 이동 거리를 절감해 약 7847조원의 경제적인 가치를 창출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2014년 국내 명목 국내총생산(GDP) 1485조원의 5배가 넘는 수준이다.


◆ 국내 첫 상용 인터넷 ‘코넷’

‘인터넷 강국’ 대한민국의 시작은 1994년 KT가 ‘코넷(KORNET)’이라는 이름으로 처음 선보인 상용 인터넷 망부터다. 이때 등장한 코넷은 국내 벤처기업의 활성화를 이끈 주역으로도 손꼽힌다.

1998년부터 인터넷 보급이 본격화되면서 같은 해 2042개에 불과했던 벤처기업은 2001년 1만1392개로 5배 이상 급증했다. 당시 등장했던 벤처기업 다수가 인터넷을 기반으로 한 신산업을 선보였을 정도로 코넷은 벤처 산업계의 초석을 다지는 역할을 했다.

현재 거대 기업이 된 네이버·다음(현재 카카오)·엔씨소프트 등도 KT의 인터넷망이 구축되지 않았다면 등장할 수 없었을 기업들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그동안 서면과 팩시밀리(fax)를 통해 이뤄졌던 문서 전달과 편지 발신, 결재 업무 등이 인터넷을 통해 이뤄지기 시작했다. 지금은 60조원대의 시장으로 성장한 온라인 쇼핑몰들이 본격 등장한 것도 이맘때쯤이었다.

KT의 ‘스마트 혁신’도 벤처 경제의 양적 성장을 가져왔다. 금융 위기가 있었던 2008년 벤처기업은 1만5401개로 답보 상태였지만 이듬해 KT에서 도입한 아이폰으로 스마트·모바일 시대가 열리며 창업이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이후 5년간 국내 벤처기업은 2배 가까이 늘어나 2014년 2만9910개를 기록했다.

아이폰으로 촉발된 국내 스마트폰 시장의 급성장은 대한민국 국민 전체의 생활 패턴과 산업 전반을 뒤바꿨다. 유선 인터넷에 머무르던 기업들이 모바일 시장으로 규모를 확대했고 제2의 벤처 창업 붐이 일어나기도 했다. 포털 다음을 인수한 카카오도 아이폰과 함께 등장해 지금은 자산 총액 5조원이 넘는 대기업으로 성장했다.

통신 시장은 아이폰 등장 이전과 이후로 구분되기도 한다. 아이폰의 등장은 이전까지 통신사망을 통해 제한적으로 인터넷에 접속할 수 있던 ‘족쇄’를 사라지게 했고 음성 통신 기반의 산업을 데이터 기반 산업으로 변화시켰다.

KT는 2002년 민영화 이전 유선통신 시장의 90%를 차지하고 있던 거대 공기업이었다. 집 전화는 물론 도로의 공중전화도 KT가 담당했다. 당시 유일한 통신 수단이 유선전화였기에 KT의 수익 구조는 대단히 안정적이었다. 개인 호출기(삐삐)가 울리면 어김없이 공중전화를 찾아야 했다.

KT는 정체기에 접어든 유선전화 시장에 더해 향후 미래 무선통신 시장으로 눈을 돌렸다.

KT는 발 빠르게 1984년 무선통신 서비스를 운영할 자회사 한국이동통신서비스주식회사를 설립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 회사는 1994년 선경(현 SK그룹)에 매각돼 지금의 SK텔레콤으로 성장했다. 대한민국 무선통신 1등 사업자의 밑그림은 사실 KT가 그린 것이나 다름없었다.

KT는 장차 유선보다 무선이 일반화될 것이란 분석과 전망에 따라 1997년 한국통신프리텔(KTF)을 설립하고 무선통신 서비스인 개인 휴대 통신(PCS)과 CT-2(씨티폰) 사업을 시작했다. 하지만 2002년 통신 시장 1위 SK텔레콤과 3위 신세기통신이 합병하면서 힘을 쓰지 못했다. KT는 이에 대응하기 위해 KTF와의 합병을 추진한다.
1994년 인터넷 시대 연 주역 ‘KT’ 고비마다 과감한 승부수
◆ 유·무선 아우르는 통신 강자로

KT는 KTF와의 합병을 위해 80여 명의 직원들을 비밀리에 KT 원주연수원에 보내 합병 보고서 작성을 시작했다. 합병 보고서에는 합병 논리와 재무, 경제적 효과 등 전 방위적인 인수 내용이 포함됐다. 합병 절차는 순탄히 준비돼 갔다.

하지만 문제가 발생했다. 2008년 조영주 KTF 사장의 비리 사건이 터졌고 곧이어 남중수 KT 사장이 구속되면서 두 기업을 지휘할 선장이 모두 부재 상태에 놓인다. 기업의 최고 결정권자가 없는 상황에서 대규모 합병 작업은 속도를 낼 수 없었고 합병은 잠정 중단됐다.

이후 남중수 사장 후임으로 정보통신부 장관 출신인 이석채 사장이 취임하며 KT와 KTF의 합병 작업이 다시 추진됐다. 두 회사의 합병과 관련한 전략은 이미 완료된 상태였기 때문에 큰 걸림돌 없이 진행됐다.

정부 인가만 받으면 유·무선 통신 서비스 시장의 판을 바꿀 기업 등장이 예고된 셈이었다. 공정거래위원회는 KT와 KTF의 합병 건을 심사해 경쟁 제한성이 없다며 이를 허용했다. 남은 것은 방송통신위원회(방통위)였다. 방통위가 두 기업의 합병을 승인할지 여부가 미지수였다.

KT는 방통위를 설득하기 위해 KT와 KTF 합병은 기업뿐만 아니라 국가에도 도움이 될 수 있다는 논리를 만들어 갔다.

KT는 합병 시너지를 통한 해외시장 진출, 규모의 경제를 통한 거대 해외 미디어 자본과의 경쟁, 합병을 통한 투자와 고용 활성화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특히 해외 미디어 그룹의 국내시장 진출 우려는 KT와 KTF 합병에 긍정적 영향을 미쳤고 해외 기업과 맞설 토종 통신 미디어 그룹이 필요하다는 논리는 정부를 설득하기에 충분했다.

당시 합병 작업에 참여했던 KT 관계자는 “해외 자본이 국내로 들어온다는 것에 대한 거부감과 우려가 컸다”며 “KT와 KTF 합병은 글로벌 기업에 대한 대항마 차원에서 이뤄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고 말했다.

이렇게 2009년 유·무선 통합 통신 사업자 KT가 재탄생했다. KT는 이때부터 유선 시장보다 무선 시장에 사업력을 집중한다. 무선통신이 신규 시장 창출에 유리하고 미래 캐시카우라는 판단에서였다.

또 국내 통신 인프라를 확충하기 위해 와이브로(Wibro)와 초고속 인터넷망 구축에도 공을 들였다.

하지만 이미 SK텔레콤이 국내 무선통신 시장의 절반 이상을 차지한데다 SK텔레콤이 가진 ‘011’ 브랜드 역시 막강했다.
1994년 인터넷 시대 연 주역 ‘KT’ 고비마다 과감한 승부수
◆ ‘010 통합 번호’ 도입으로 기회

KT는 때마침 정부 정책으로 2004년부터 모든 이통사 신규 가입자에게 010 번호만 부여되는 ‘010 통합 번호 제도’를 눈여겨봤다. 번호 이동 시에도 사용하던 번호가 바뀌지 않는 ‘번호 이동’ 정책과 011 프리미엄이 사라지는 시점을 활용하자는 전략이었다.

기회가 왔다. 통합 번호 제도 시행 4년 뒤 KT는 통신 시장의 영향력을 높이기 위해 승부수를 던진다. 2008년까지 제대로 된 스마트폰이 없던 국내시장에 애플 ‘아이폰’을 출시하기로 전격 결정한 것이다. 아이폰 도입을 두고 SK텔레콤과 LG유플러스 등이 삼성과 LG 등 국내 대형 단말기 제조사의 ‘눈치’를 살필 때 KT는 과감한 결정을 내렸다.

아이폰의 영향력은 폭발적이었다. 당시 휴대전화를 통한 인터넷은 개별 통신사 망을 통하지 않고는 사용할 수 없었다. 이 때문에 와이파이(Wi-Fi)로 무료 인터넷을 하고 무료 문자(메신저)를 보낼 수 있다는 점은 혁신에 가까웠다.

게다가 삼성과 LG 등 국내 제조사가 독점하다시피 한 휴대전화 단말기 시장에 아이폰을 도입해 제조사들의 경쟁력을 높이는 계기도 마련했다. 아이폰의 등장은 국민 생활은 물론 글로벌 단말기 제조사인 삼성과 LG의 체질을 바꿔 스마트폰 제조사로 바꾸는 역할을 했다.

또 KT는 아날로그 산업이 디지털 산업으로 새롭게 성장하는 발판도 마련했다. IPTV는 영화, 주문형 비디오(VOD) 구매를 통해 드라마·음악·게임과 같은 콘텐츠 소비를 활성화했다.

음반 시장도 1990년대 후반 4000억원 수준에서 하강하는 추세였지만 디지털 음악 서비스의 도입으로 네트워크를 통해 언제 어디서나 음악을 감상하는 방식으로 새로운 성장 동력을 얻게 된다. 2002년 4206억원이었던 국내 음악 산업은 디지털화된 지 10년 만인 2012년 1조427억원으로 2.5배로 규모가 커졌다.

황창규 KT 회장은 “131년 대한민국 통신의 역사는 KT의 역사이고 세계적인 정보통신기술(ICT) 강국이 된 배경에는 KT가 있었다”며 “산업 간 경계도, 국경도 무너지는 혁명적 변화의 시기를 맞아 ICT를 중심으로 대한민국의 미래 131년을 이끌어 가겠다는 강력한 의지를 담고 있다”고 말했다.

KT는 ICT 기업이 해외에 진출하는 데 결정적 역할도 했다. 해외에서 라인·카카오톡과 같은 모바일 메신저 서비스와 리니지·크로스파이어 등 인터넷 게임이 성공을 거두는 데 유·무선 통신 인프라가 탄탄한 밑바탕이 됐다. K팝과 같은 한류 콘텐츠가 손쉽게 글로벌 시장으로 확산하는 데도 결정적 역할을 하고 있다.

이 모든 바탕에는 KT의 유·무선 통신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1998년부터 인터넷 보급이 본격화되면서 같은 해 2042개에 불과했던 벤처기업은 2001년 1만1392개로 5배 이상 급증했다.

kth@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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