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틀린 한국의 음악교육…느낌과 체험보다 교본 연습만} (일러스트 김호식)
[김경집 인문학자(전 가톨릭대 인간학교육원 교수)] 1990년대 중·후반 독특한 광고 카피가 여러 사람들의 입에 회자됐다. “침대는 가구가 아닙니다.”
이게 무슨 자다가 봉창 뜯는 소리야. 처음에는 뜨악했다. 그러나 이어지는 멘트를 듣고는 빙긋 웃음이 나왔다. “침대는 과학입니다.” 아무리 봐도 잘 만든 광고 카피였다.
◆가족의 자랑이던 피아노
그렇다면 “피아노는 악기가 아닙니다. 피아노는 가구입니다.” 이렇게 말하면 사람들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 우리는 이 말을 단호하게 부인하지는 못할 것이다. 물론 음악가들은 이 말에 펄쩍 뛰겠지만 아이들을 키우며 피아노 교습을 경험한 가정에서는 불편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산업화 이후 예전과 달리 먹고살 만해진 이후 세대의 부모들은 어린 자녀들에게 악기 하나쯤은 가르쳐 왔다. 모든 부모가 자기 아들 딸이 반드시 피아니스트가 되길 바라서 자녀들에게 피아노를 가르친 것은 아닐 게다. 그저 내 아이가 좀 더 행복해지기를, 그래서 자기 삶을 즐기면서 살기를 바라서 그랬을 뿐이다.
그렇게 부모들은 자녀에게 피아노를 가르치기 위해 그 비싼 악기를 장만했다. 고사리 같은 손이 건반을 두드리는 게 얼마나 앙증맞고 대견스러운지 손님만 오면 제 아들딸 피아노 솜씨 자랑하느라 부모들은 여념이 없고 마음이 뿌듯했을 것이다.
하지만 아이는 이내 피아노가 지겹고 재미도 없어 별 흥미를 느끼지 못하다가 중학교 진학하기 전쯤 되면 거의 다 피아노를 그만두게 된다. 중학생이 되면서부터 입시에 올인해야 하는 이 나라의 반(反)전인교육 때문이다. 그 이후 피아노는 집 한구석에 처박히는 신세가 되면서 악기로서의 기능을 잃게 된다.
어째서 이렇게 됐을까. 음악이란 자기 마음속에 있는 느낌을 선율과 리듬 등을 통해 표현하고 자기가 그렇게 표현한 걸 다른 이가 느끼는 것이다. 독일에서는 피아노를 가르치기 전에 그런 표현의 욕구를 먼저 확인시키고 그걸 발현하도록 한다고 한다.
예를 들어 선생님이 먼저 고무호스를 휘둘러 소리가 나는 걸 보여준 뒤 아이에게 고무호스를 주고 느낌을 표현해 보라고 한다.
만약 비가 오는 날이라면 그 소리로 비 오는 모습을 표현해 보라고 하는 식이다. 처음에는 쉽지 않지만 아이는 놀랍게도 자신만의 방식으로 자신의 느낌을 표현한다. 그러면 아이는 소리, 즉 음악을 통해 자신의 생각과 느낌을 표현할 수 있다는 걸 경험한다. 그렇게 하면 악기는 그보다 훨씬 더 명확한 표현의 도구라는 걸 깨닫게 된다.
그런데 우리는 다짜고짜 피아노 앞에 앉아 손가락 모양을 어떻게 하라느니, 계명이 어쩌니 하며 곧바로 음악적 기능만 아이에게 가르친다. 아이는 피아노를 왜 배워야 하는지도 모른다. 그저 시키니까 할 뿐이다. 자신을 표현한다는 것은 뒷전이다. 게다가 배우는 교본은 하나같이 별 재미가 없다.
◆재미없고 지루한 바이엘·체르니
바이엘은 19세기 중반 독일 작곡가 페르디난트 바이어가 만든 초보 피아노 교본으로, 일본을 통해 한국에 소개됐다. 피아노를 처음 배우면서 익혀야 할 기본 훈련에 적합한 장점은 있지만 바이엘은 그 내용이 딱딱하고 복음악적(polyphonic) 작품에 초보곡이 하나도 없을 만큼 지루하다.
그러면 체르니는 어떤가. 베토벤에게 음악을 배웠던 카를 체르니는 높은 음악적 완성도가 있는 연습곡을 작곡한 사람이다. 훌륭한 교본인 것은 틀림없지만 피아노를 즐기기에 체르니는 너무 기능적이고 반복적이다.
서양음악의 기본 구성인 대위법과 화성악에 충실한 교본인 것이다. 그런 점에서는 교육적 효과가 상당히 크다. 하지만 피아노 실력이 어느 정도 수준에 오르기 전까지는 체르니를 배우는 게 재미가 없다.
아마도 바이엘과 체르니를 우리만큼 줄기차게 피아노 교본으로 삼아 온 곳도 찾기 어려울 것이다. 음악을 전공한 둘째 형이 미국에서 유학 시절 음대 도서관에 이 두 책이 ‘고문서 특별 열람 대상’에 들어 열람 신청과 허락을 받고 흰 장갑을 끼고서야 열람할 수 있었다는 말을 듣고 깜짝 놀랐다. 우리는 세광출판사에서 출간한 교본이 집에 굴러다니는데….
이들 피아노 교본이 적합하지 않다거나 배우지 말아야 한다는 게 아니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아이들이 음악을 즐겁고 신나게 맛볼 수 있는 마음을 먼저 갖게 해주는 일이라는 것이다.
그게 먼저 충족되지 않으면 여전히 피아노는 우리에게 ‘곧’ 가구로 변해 버릴 비싼 악기일 뿐이다. 목적성이 분명해야 하고 거기에 맞는 방식의 접근로를 탐색하고 수시로 다양한 루트를 찾아보며 나아가야 한다.
획일적이고 타성적인 방식은 그저 경로 의존성을 높일 뿐이고 시간과 돈은 투자하면서 제대로 그 값을 누리지 못하는 헛된 투자가 되지 않으려면 말이다.
다짜고짜 피아노 앞에 앉아 손가락 모양을 어떻게 하라느니, 계명이 어쩌니 하며 곧바로 음악적 기능만 아이에게 가르친다. 아이는 피아노를 왜 배워야 하는지도 모른다. 그저 시키니까 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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