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데몰리션’으로 본 슬픔 치유의 3단계…‘위로자’의 역할 중요 (사진) 영화 ‘데몰리션’의 한 장면. /스틸 이미지
[한경비즈니스=김진국 문화평론가·융합심리학연구소장] 영화 ‘데몰리션’은 주인공 데이비스(제이크 질렌할 분)가 부인을 여의고 난 뒤 방황하는 모습을 진솔하게 그린다.
뉴욕의 한 투자회사에서 일하는 데이비스는 부인 줄리아(헤드 린드 분)가 모는 자동차를 타고 가다가 교통사고를 당한다.
줄리아는 “진작부터 물이 새는 냉장고를 고쳐 달라고 했는데 데이비스가 너무 무심하다!”고 불평을 늘어놓다가 잠깐 한눈을 파는 바람에 목숨을 잃고 만다. 여기서 식생활의 중심 역할을 맡고 있는 냉장고의 ‘물이 샌다’는 말은 데이비스의 가정 생활이 삐걱거린다는 것을 뜻한다.
◆ 무감각, 그다음 찾아오는 혼란
사별(死別)은 3가지 단계를 거친다고 한다. 사랑하는 이의 죽음이 실감나지 않아 그냥 멍해지는 시기(무감각 단계), 죽음을 실감하면서 극심한 상실감·공허감·외로움으로 고통 받는 시기(혼란 단계), 죽은 사람은 죽은 사람이고 산 사람은 살아야지 하면서 다시 삶의 즐거움을 찾기 시작하는 시기(재조정 단계)가 그것이다.
주인공 데이비스는 무감각 단계가 유난히 길고 특이하다. 장례식까지 마쳤지만 데이비스는 아무 감각이 없다. 억지로 우는 흉내를 내보지만 그마저도 여의치 않다.
장례식 바로 다음 날도 출근해 정상 근무를 한다. 그의 무의식은 줄리아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이를 ‘부인(denial)’하는 방어기제를 작동하고 있는 것이다.
심지어 데이비스는 부인의 죽음을 알고 난 후에도 병실 밖 자판기에서 초콜릿을 뽑아 먹으려다가 실패하자 이에 항의하는 장문의 편지를 자판기 회사로 보낸다.
그의 편지에 응대한 사람은 고객서비스팀의 직원 카렌(나오미 왓츠 분)이다. 그녀도 남편과 사별한 상처를 가졌지만 자판기 문제 해결이라는 본연의 임무를 넘어 데이비스의 슬픔을 치유해 주는 ‘위로자(consoler)’ 역할을 자임한다.
융 심리학자인 안셀름 그륀에 따르면 사별의 슬픔을 겪고 있는 사람에게 가장 필요한 사람은 자신을 평가하지 않고 편안하게 자신의 아픔을 들어주는 사람이다. 슬픔의 원인을 분석하거나 이론적으로 해석해 주는 사람이 아니라는 말이다.
카렌을 만나면서 데이비스는 서서히 무감각 단계와 혼란 단계가 뒤섞이면서 한편으로는 위로를 받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극심한 정신적 혼란과 분열을 겪는다.
데이비스는 집 안의 냉장고는 물론이고 회사의 화장실 문이나 컴퓨터까지 샅샅이 분해해 버려 주위 사람을 경악하게 한다.
그의 정신적인 혼란과 분열의 정점은 자신이 살고 있는 집을 불도저까지 동원해 자신의 힘으로 완전히 때려 부수는 것이다.
데이비스의 이런 행동은 일중독에 빠져 자신과 자신의 가정을 돌아보지 못한 채 타인의 미래 투자 분석에만 빠져 있던 현실을 깨부수고 완전히 새로운 삶으로 나아가겠다는 그의 다짐을 상징한다.
부인을 잃은 슬픔에 젖은 데이비스가 지하철 안이나 도로 한복판에서 힙합 바지를 입고 헤드폰을 끼고 춤을 추는 장면은 미하이 칙센트미하이가 말한 일종의 ‘몰입(flow)’으로 설명할 수 있다.
데이비스는 춤추는 일에 미친 듯이 몰입해 자신의 과거와 현실은 물론 자신에 대한 자각마저 잊어버리고 싶은 무의식적 욕망을 표출한다.
위로자로서의 카렌의 역할도 서서히 빛을 발한다. 데이비스는 카렌의 집에서 소파와 소파 사이에 이불을 덮어 만든 텐트 속에서 동심의 세계로 돌아간 듯 그림자놀이를 하면서 허심탄회한 대화를 나눈다.
이것은 일종의 심리 치료 과정을 상징하는 것으로, 텐트는 따뜻한 엄마 품 혹은 자궁을 의미한다. 카렌의 노력에 힘입어 데이비스는 마침내 사별의 눈물을 거두고 다시 새롭게 일상의 삶으로 돌아가기 위한 재조정 단계에 진입한다.
장 마크 발레 감독은 요소요소에 상징들을 숨겨 놓고 자신의 메시지를 강력하게 전달한다. 침팬지의 ‘털 골라주기’는 일상에서의 스킨십의 중요성을, 일부일처제를 고수하는 물고기 해마는 가정의 중요성을 상징한다.
특히 발레 감독은 알에서 부화해 올챙이를 거쳐 개구리로 변신하는 개구리를 여러 번 등장시켜 데이비스가 구태를 벗고 새롭게 변환하는 데 성공할 것이라는 것을 암시한다.
감독은 사랑하는 이를 잃고 난 뒤의 ‘애도는 짧고 강력할수록 좋다’는 말도 하고 싶어 한다.
눈물은 우리의 마음을 정화하고 우리 영혼을 성숙시킨다고 한다. 사별의 3단계를 빨리 통과하려면 데이비스처럼 훌쩍거리며 슬픔을 속으로 삭이지 말고 눈물을 흘리며 대성통곡해야 한다는 것이다.
© 매거진한경,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