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집의 인문학 속으로]
"지주 대리하며 온갖 횡포…‘좋은 마름’은 CEO가 만든다"
경주 최부잣집, 마름 없애고 소작인과 직접 소통
(일러스트 김호식)

[김경집 인문학자(전 가톨릭대 인간학교육원 교수)] 흔히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말할 때 빠지지 않는 모범이 바로 경주 최부잣집일 것이다.

‘최부자’가 아니라 ‘최부잣집’이라고 하는 것은 단순히 한 인물에 그치지 않고 무려 400여 년을 이어 오면서 가문 전체가 그런 모범을 보인 보기 드문 사례이기 때문이다.

최부잣집에서는 애당초부터 마름을 전혀 두지 않았다고 한다. 마름은 멀리 떨어진 대지주를 대신해 농토를 관리하는 대리인이다.

여러 면을 하나로 묶어 마름 한 사람을 설정하는 게 보통이었다니 제법 힘깨나 쓸 수 있는 역할이었다. 지주를 대리해 모든 재산권을 관리했는데, 가장 중요한 역할은 물론 소작료를 징수하고 지세 공과금 처리와 토지 개량까지 도맡는 일이었다.

심지어 다음 농사에 소작을 줄 것인지 말 것인지를 결정하다 보니 소작인들에게는 저승사자와 다를 바 없는, 무소불위(無所不爲)의 횡포를 저지르는 경우가 허다했다고 한다.

지주는 추수 때 소작료만 제대로 들어오면 그뿐이었다. 마름은 그런 점을 교묘하게 이용해 소작인을 바꾸거나 소작지를 멋대로 변경할 수 있고 심지어 소작 계약을 파기할 수도 있었기 때문에 소작인들은 그저 마름의 처사에 명줄을 걸고 따르는 수밖에 없었다.

어느 곳이나 마름의 횡포가 횡행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었다.


◆ 중간 관리자가 조직의 생명이다

경주 최씨 집안은 그런 점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마름을 두지 않았다고 한다. 소작인을 후하게 대접하고 가족처럼 여겼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여러 가지 부역을 피할 수 있게 했다니 소작인들의 최씨 집안에 대한 존경과 충성은 대단했을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최씨 집안을 찾는 것은 어쩌면 당연할 일이었다. 노동력이 풍부해지자 최씨 집안은 그들의 힘을 모아 둑을 쌓아 범람 지역을 옥토로 만들기도 하고 산비탈을 개간해 농사지을 땅으로 개간하게 했다.

그리고 그 여분만큼 병작(竝作)하게 해 생산성도 높이고 자립을 도왔다. 눈앞의 이익만 좇지 않고 멀리 볼 줄 알고 자기 일을 돕는 사람을 챙길 줄 아는 배려가 그의 부를 탄탄하게 했을 뿐만 아니라 존경까지 얻게 했다.

하지만 최부잣집에서 마름을 두지 않은 것을 중간관리자의 배제라고만 좁게 보지 말 일이다.

어설프고 못된 중간관리자는 아예 없는 것보다 못하다. 최부잣집도 그래서 마름을 두지 않았다. 그는 앉아 결과물만 챙기려고 한 게 아니라 직접 소작인들을 만나고 의견을 들었다.

닫힌 소통이 아니라 열린 소통, 간접 소통이 아니라 직접 소통을 택했다. 그러려면 그만큼 부지런하고 사람에 대한 신뢰와 애정이 있어야 한다.

거대한 조직에서 직접 소통은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 하지만 현대문명은 그것도 가능하게 바꿔 놓았다. 얼굴을 맞대야만 직접 소통이 아니다.

전자통신 등을 이용해 만날 수 있다. 모든 조직이 겉으로는 그런 통로를 개설하고 참여하라고 독려하지만 실제로 이뤄지는 것은 드물다. 최고경영자(CEO)가 그걸 일일이 답할 수도 없고 읽는다는 것도 사실 부담스럽다.

그럴 시간 여유가 없다. 하지만 그걸 필터링하는 중간관리자를 통해 들어야 할 것은 가리고 뽑아 회신하거나 의견에 반영할 수 있다. 문제는 그 중간관리자가 ‘좋은 마름’일 수 있게 하는 CEO의 열린 마음과 단호한 태도가 천명돼야 한다.

단순한 조직의 위계 관계로만 지시를 하달하고 수행을 요구할 게 아니다. 중간관리자가 착한 마름의 역할을 아무리 제대로 잘한다고 하더라도 궁극적으로는 최종 업무 수행자에 대한 CEO의 눈과 마음이 머물러야 한다.

그게 소통의 가장 기본적이고 필수적인 전제다. 하지만 그렇게 하는 사람은 드물다. 현실은 그런 사람을 솎아낸다. 바보 아닌 다음에야 섶을 지고 불에 뛰어들 사람이 없다.

현대는 최 부자 식으로 꾸려갈 수 있는 환경이 아니다. 하지만 최부잣집에서 마름을 두지 않았던 걸 역으로 생각하면 어떤 마름을 어떻게 두느냐 하는 것은 최부잣집의 경영관을 현대 기업이나 조직에 유용하게 끌어 쓸 수 있느냐 하는 관건이기도 하다.

소통의 가장 중요한 코어(core)는 바로 마름의 역할이다.

위와 아래의 통로를 차단하는 마름은 조직을 병들게 한다. 밸브 조절을 잘하는 마름은 조직을 활성화시킨다. 그걸 키우는 게 CEO의 몫이다. 그게 그의 능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