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회 "왜 해보지도 않은 사업 손대나"
최 회장 "믿어달라, 하이닉스 성공시킬 자신있다"
최태원 회장의 반도체 기업 인수에 대한 결단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그는 이미 하이닉스를 인수할 때부터 반도체를 통한 글로벌 정상을 꿈꿨다.
에너지와 통신을 중심으로 전통적인 내수 기업이었던 SK는 하이닉스를 인수하며 반도체 수출 기업으로 위상을 높일 수 있었다. SK의 하이닉스 인수는 최 회장의 꿈을 이루는 통로였고 글로벌 기업으로 거듭나는데 큰 역할을 한 초석이었다.
그러고 보니 최 회장은 ‘신의 한 수’를 두 번이나 둔 셈이다.
◆ 거듭된 위기에서 버텨온 하이닉스
1983년 2월 설립된 현대전자산업주식회사는 창립 6년 만인 1989년 세계 반도체 시장점유율 20위권 안에 진입했다. 하지만 1990년대 후반 발생한 국제통화기금(IMF) 관리체제 이후 반도체 업황이 점점 나빠져 유동성 위기를 맞게 됐다.
현대전자는 이를 해결하기 위해 메모리반도체 이외의 사업부를 모두 매각, 현대그룹으로부터 분리하고 2001년 3월 하이닉스반도체로 사명을 변경했다. 이 같은 조치에도 불구하고 같은 해 10월 기업구조조정촉진법에 의해 채권단 공동관리하에 들어가게 된다.
하이닉스는 자구책을 마련했다. 내부적으로는 부족한 투자 여력을 보충하기 위해 구형 장비를 개조해 신형 장비 수준의 제품을 생산하는 ‘블루칩 프로젝트’를 진행해 성공시켰다.
노사가 협력해 임직원 임금 동결과 순환 휴직을 실시했고 다양한 비용 절감 활동을 전개하기도 했다. 대외적으로는 미국의 마이크론테크놀로지와 협력하기 위해 업무협약(MOU)을 체결하려고 했지만 이사회에서 승인이 부결됐다.
하이닉스는 어려운 상황에서도 2003년 ST마이크로와 플래시메모리에 대해 전략적 제휴를 하고 다음 해인 2004년 낸드 플래시메모리 개발에 성공했다. 2003년 3분기부터 2007년 3분기까지 17분기 연속 흑자를 기록했다.
이후 중국 생산 법인 설립, 청주 300mm 전용 공장(M11) 준공 등으로 경쟁력을 높여 갔다. 2005년 7월 하이닉스는 예상된 일정보다 1년 반 정도 앞당겨 채권단 공동관리를 조기 졸업하게 됐다.
그로부터 3년 뒤, 2008년 9월 불어 닥친 세계 금융 위기로 다시금 반도체 업계는 최악의 상황을 맞았다. 하이닉스도 세계적인 위기를 비켜가진 못했다.
하이닉스 매각 결의 안건이 가결됐다. 이미 한 차례 위기를 극복한 경험이 있던 하이닉스는 기술 경쟁력과 연구·개발(R&D)에 대한 투자를 아끼지 않았다.
SK그룹 관계자는 그 당시 회사 매각설이 불거지는 상황에서 세계 최초로 44나노 DDR램 개발에 성공한 점, 매각설이 나오고 몇 년간 버텨 왔다는 점 등을 비춰볼 때 하이닉스는 원래 치열한 DNA를 갖고 있는 회사였다고 분석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이닉스는 언제 다시 경영 위기가 닥칠지 모른다는 불안은 여전히 남아 있는 상태였다.
채권단은 2009년 매각을 추진했다. 2009년 9월에는 효성이 하이닉스 인수전에 뛰어들었다가 불발됐다. 이후 2011년 7월 3차 매각에서 SK텔레콤과 STX가 인수의향서를 제출했고 11월 최종적으로 SK텔레콤이 지분 인수를 계약했다.
STX는 자기자본 없이 중동계 외자를 유치해 인수하려다가 자진 철회한 것으로 알려졌다. ◆ 덩치 비슷한 회사, 반대 무릅쓰고 인수
SK텔레콤이 2012년 2월 14일 하이닉스의 주식 인수 대금 납입을 완료함으로써 하이닉스는 SK그룹의 일원이 됐다. SK그룹은 그룹의 신성장 동력을 확보할 수 있게 됐고 하이닉스는 안정적인 투자 및 일관성 있는 책임 경영을 추진할 수 있게 됐다.
국내 최대 이동통신사인 SK텔레콤과 메모리반도체 세계 2위 기업인 하이닉스의 시너지까지 기대할 수 있는 이상적인 결합이었다. 하지만 인수하기까지 모든 것이 순조롭게 진행된 것은 아니었다. SK그룹 내부에서는 하이닉스 인수를 두고 엄청난 반대가 있었다.
앞서 2010년 최 회장은 고민에 빠졌다. 그는 그룹이 매년 10% 이상씩 발전하기 위해서는 SK텔레콤과 같은 회사를 키워 내야 한다며 또 다른 미래 먹거리를 찾아 다녔다.
그러던 중 그해 1월 스위스 다보스에서 개최된 세계경제포럼(다보스포럼)에서 지인을 만나 반도체 사업의 전망이 밝다는 얘기를 듣게 된다. 최 회장이 반도체에 눈을 뜨게 된 결정적 계기다.
그는 정보기술(IT) 분야가 세상을 바꿀 것이고 반도체는 발전 가능성이 무궁무진한 사업이라고 확신했다. 최 회장은 곧바로 반도체 공부를 시작했다. SK그룹 관계자에 따르면 이때부터 하이닉스 인수를 염두에 두고 각계각층의 반도체 전문가를 모셔 사사하며 열심히 공부했다.
1년 가까이 반도체를 파고든 최 회장은 2010년 말 하이닉스를 인수하겠다는 의중을 그룹 이사진에게 밝혔다.
이사회 내부에서는 대부분이 반대하고 나섰다.
첫째 이유는 인수 금액이 턱없이 높았기 때문이었다. 당시 회사 내부에서는 “우리와 비슷한 덩치의 회사를 먹고 배가 터지면 어쩌려고 저러나. 하이닉스를 인수하고 그룹 전체가 망하는 것 아니냐”는 걱정이 파다했다.
대부분의 경영진은 당시 돈으로 2조원이 넘는 대규모 투자를 감당할 수 없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인수와 동시에 모기업에 악영향을 끼칠 것이라는 의견이 주를 이뤘다.
둘째 반대 이유는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는 반도체 사업을 과연 잘할 수 있을까” 하는 우려였다.
SK텔레콤이 그룹 내 캐시카우 역할을 하고 있고 굳이 신사업을 하지 않더라도 그룹이 안정적으로 성장할 수 있는 발판이 마련됐는데 왜 해보지도 않은 사업에 손을 대느냐는 의견이었다.
셋째 반대 이유는 반도체에 투자한다고 하더라도 과연 하이닉스라는 회사의 가치가 올라갈 수 있을지에 대한 의구심 때문이었다.
최 회장은 성공에 대한 확신에 차 모험을 감행하자고 제안했지만 재무 부서를 포함한 대부분이 ‘가보지 않은 길’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이 컸다.
최 회장의 ‘소통 카리스마’와 ‘협상력’은 여기서 돋보였다. 그는 자신과 뜻이 다르다고 강압적으로 밀어붙이지 않았다.
당시 상황을 꿰고 있는 SK그룹의 한 현직 임원은 “회장이 하겠다고 추진했으면 할 수 없이 따라갔을 텐데 최 회장은 그러지 않았다”며 “토론을 통해 자신의 의견에 동조하도록 설득하는 과정을 꽤 오랜 기간 동안 가졌다”고 회상했다.
애널리스트를 초청해 반도체 관련 사내 세미나를 열었고 투자 시 대규모 리스크에 대한 시뮬레이션을 돌려 반도체 경기가 최악의 상황이 지속될 때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 가상 실험을 하기도 했다.
최종 결론은 ‘SK텔레콤의 재무 상태로 봤을 때 반도체 경기가 최악인 상황을 두 번 더 맞더라도 버틸 수 있을 것’이라고 났다. 여러 번의 돌다리를 두드린 끝에 생각이 달랐던 경영진도 찬성 쪽으로 마음을 바꿨다.
SK는 하이닉스를 인수하기 위해 박정호 당시 SK텔레콤 사업개발실장(현 SK텔레콤 사장)을 필두로 태스크포스(TF)팀을 정식으로 꾸렸다.
자금 조달은 채권단 지분을 일부 인수하고 신주를 발행해 투자 재원을 확보하는 방향으로 정했다. 총 3조3700억원이 투자됐는데 신주 2조3400억원, 구주 1조300억원이었다.
당초 채권단은 썩 반기지 않았지만 최 회장도 물러서지 않았다. 그는 반도체 경기가 좋아지면 주가가 올라갈 것이라는 확신을 심어줬다. 그리고 최 회장의 제안은 현실이 됐다. SK하이닉스의 주가는 인수 당시에 비해 3배 이상 올랐다. ◆ 불투명한 시장 상황에서 투자 늘린 뚝심
“하이닉스가 SK그룹의 식구가 되는 것은 하이닉스뿐만 아니라 SK에도 큰 기회이자 도전이다. 회장으로서 하이닉스를 반드시 성공시켜 향후 그룹의 새로운 성장 축으로 발전시켜 나가는 데 매진하겠다. 또한 하이닉스의 질적 성장을 통해 국가 경제에 기여하고 그룹의 글로벌 경쟁력을 강화할 수 있도록 직접 챙기겠다.”
최 회장이 하이닉스 인수를 사실상 마무리하고 2011년 12월 22일 경기도 이천 공장을 방문해 임직원들 앞에서 한 이야기다.
최 회장은 하이닉스를 최종 인수한 뒤 이천 공장에 상주하다시피 했다. 직접 방진복을 입고 공장 내 반도체 생산 시설을 구석구석 둘러보며 투자 확대를 공언했다. 최 회장은 기존 하이닉스의 기업 문화에 대해 “치열한 생존 DNA를 가졌다”며 극찬도 아끼지 않았다.
인수·합병(M&A) 초기에 인수 측 회사에서 ‘점령군’을 보내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SK는 하이닉스로 5인 미만의 임원만 투입했다. 그리고 하이닉스의 열정적이고 치열한 기업 문화를 오히려 SK그룹 전체에 확산시키는 데 집중했다.
성과는 예상보다 일찍 나타났다. 2012년 2분기에 4분기 만에 영업이익이 흑자로 전환됐고 이후 2013년부터 2015년까지 3년 연속 사상 최대 실적을 경신했다.
SK하이닉스의 선전으로 SK그룹 또한 사상 최대의 수출 실적을 기록하는 등 글로벌 그룹으로서의 입지를 더욱 탄탄히 했다. 적기 투자와 기술 개발, 우수 인력 보강으로 사업 역량을 강화한 결과였다.
2012년 SK그룹 편입 당시 반도체 산업은 업황이 불투명해 업계의 평균 투자 규모가 축소된 상황이었다. 이러한 투자 규모의 역성장 시기에 SK하이닉스는 최 회장의 결단으로 투자 규모를 늘리고 신제품 개발에 집중하는 등 미래를 위한 준비를 우선했다.
2012년 연간 투자 금액은 전년 대비 10% 정도 늘린 3조8500억원을 집행했고 이후에도 매년 3조원대 이상의 대규모 투자를 단행했다. 2017년 투자 예상 금액은 7조원을 웃돈다.
연구·개발비 증가세는 더욱 가파르다. 그룹 편입 이전인 2011년 8000억원 수준에 머무르던 것이 2016년에 2.5배 수준인 2조원 이상으로 확대됐다.
매출액 대비 연구·개발비 비율도 2011년 8%에서 지난해 12.2%로 높아졌다. 지난 3년간 사상 최대 실적을 연이어 달성할 수 있었던 비결이다.
메모리반도체 산업은 원가 및 제품 경쟁력을 강화하기 위해 공정 수가 늘어나고 장비가 대형화되고 있어 생산능력을 추가 확보할 필요성이 지속적으로 증가하는 분위기다.
SK하이닉스는 2015년 준공한 M14를 포함해 이천과 청주에 각 1개 공장을 추가로 구축함으로써 3개 공장에 총 46조원을 투자할 계획이다.
◆ 변화하지 않으면 돌연사, ‘딥체인지’ 주문
최 회장은 꾸준한 실적에도 불구하고 지속적으로 변화하고 성장하라고 종용한다.
최 회장은 지난해 확대경영회의에서 “변화하지 않는 기업은 돌연사(sudden death)한다”고 경고하며 이를 극복하기 위한 대안으로 ‘딥체인지(deep change : 근본적 변화)’를 강조했다. 그는 일하는 방식 개선과 역량 강화를 주장하며 직원들에게 ‘1등 정신’을 주문했다.
최 회장은 직원들을 세계 최고 수준의 반도체 전문가로 육성하기 위해 사내대학 ‘SKHU(SK Hynix University)’를 운영 중이다.
SKHU는 SK하이닉스의 최고경영자(CEO)인 박성욱 부회장이 총장 역할을 맡고 있고 D램·낸드·솔루션·제조기술·마케팅·경영지원 등 총 10개의 단과대학으로 구성됐다. 사내 교수제도와 온라인 강의도 제공한다.
올해 최 회장의 목표는 ‘더불어 성장하는 한국 대표 기업’으로 거듭나는 것이다.
최 회장은 지난 6월 확대경영회의를 통해 ‘사회를 위해 성장하는 딥체인지 2.0’을 주장했다. 대기업으로서 책임감을 가지고 대·중소기업 간 동반 성장을 위해 협력사와 상생 협력 경영을 실천하겠다는 의지다.
SK하이닉스는 2008년 ‘상생협력팀’을 설립했고 2011년부터 협력사의 운영 및 기술 개발 자금을 저리로 지원하는 ‘동반성장펀드’를 운영하고 있다.
또한 동반 성장 생태계를 구축하기 위해 2013년부터 2017년까지 총 35억원을 투입해 2차·3차 협력사에 경영 컨설팅 및 자금 지원 프로그램 등을 시행 중이다.
◆ 30년만에 아버지의 꿈을 이룬 아들
SK그룹이 반도체와 인연을 처음 맺은 것은 5년 전이 아니다. 그보다 훨씬 이전인 1978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최종현 SK그룹 선대 회장은 유공을 인수한 뒤 “앞으로는 반도체와 이동통신 사업을 해야 한다”면서 경북 구미 전자단지 인근에서 ‘선경반도체’를 출범시켰다. 하지만 사업은 오래가지 못했다. 2차 오일쇼크(석유파동)라는 대형 악재가 덮쳐 3년 만에 사업을 접어야만 했다.
그로부터 30여 년 뒤인 2012년 최태원 회장이 하이닉스를 품에 안게 됐다. 그룹의 미래 성장 동력을 키웠다는 의미에 더해 30여 년 만에 선대 회장의 꿈을 이룬 것이다.
한경비즈니스 김서윤 기자 socool@hankyung.com
© 매거진한경,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