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G생활건강(이하 LG생건)이 지난해 영업이익 1조원을 돌파하며 사상 최대 실적을 올렸다. LG생건은 2017년 40여 년간 부동의 1위였던 아모레퍼시픽그룹을 앞질렀고 지난해 2배 가까운 영업이익을 올리며 격차를 벌렸다.
LG생건 실적 견인의 일등 공신은 바로 궁중 화장품 ‘더 히스토리 오브 후(이하 후)’다. ‘후’는 지난해 국내 화장품업계 최초로 연매출 2조원대 단일 브랜드로 성장했다. 내수 침체와 중국 관광객의 급격한 감소에도 불구하고 ‘후’가 성장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전략① 일관된 브랜드 정체성
‘한방’을 넘어 ‘궁중’ DNA 심다 “한방 콘셉트로 승부를 걸지 말고 ‘궁중 브랜드’로 차별화하라.”
2005년 LG생건에 부임한 차석용 부회장의 한마디에서 ‘후’의 신화가 시작됐다. 2003년 출시된 ‘후’는 한방 화장품의 후발 주자였다.
국내 한방 화장품의 역사는 1973년 아모레퍼시픽에서 출시한 ‘진생삼미’에서 시작됐다. 아모레퍼시픽은 1997년 ‘설화수’를 출시하며 한방 화장품 시장을 선점하고 있었다. 차 부회장이 부임하기 전 ‘후’는 ‘설화수’의 한방 콘셉트를 따라하는 ‘미투’ 전략에 불과했다.
차 부회장은 똑같이 ‘한방’ 콘셉트로 승부하면 차별화를 둘 수 없다고 판단했다. 그 대신 ‘한방’을 넘어 새로운 가치인 ‘궁중’ 이미지에 주목하라고 지시했다. 이때부터 ‘후’ 담당자들은 ‘궁중 화장품’ 카테고리에 맞춰 브랜드를 재정립했다. ‘한방 화장품’ 틀에서 벗어나니 새로운 영역이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후’ 담당자들은 왕후와 궁중이라는 이미지를 제품 로고와 패키지에 차용하고 제품 원료와 색깔, 마케팅에 이르기까지 고객 커뮤니케이션의 모든 접점에서 일관된 브랜드 정체성을 느낄 수 있도록 브랜드 경험을 디자인했다. 이를 통해 ‘궁중 화장품’이라는 강력한 브랜드 정체성을 구축했다. 마케팅과 고객 커뮤니케이션 영역에서는 궁중 문화와 후를 결합한 특색 있는 활동을 진행했다. 궁중 음악의 주요 악기이자 후 브랜드 로고의 모티브가 된 해금을 이용한 메세나 활동, 궁중 패션쇼 후원, 루브르박물관 박람회 참가, 왕실 여성 문화 체험전, 헤리티지 미디어 아트 등 소비자들이 브랜드를 떠올렸을 때 왕실의 이미지가 연상될 수 있는 활동을 일관적으로 전개했다. 장소는 창경궁과 경복궁 등 서울 주요 궁궐이었다.
브랜딩은 곧 디자인 역량 강화로 이어졌다. ‘후’는 국보급 문화재나 전통 문양에서 모티브를 얻어 세밀한 디자인 요소를 적용했다. 일례로 최고급 크림인 ‘후 환유고’ 디자인은 턱밑에 여의주를 끼고 날아오르는 봉황의 모습을 국보 제287호인 백제 ‘금동대향로’에서 차용했다. 뚜껑은 금속공예 장식으로 다는 등 제품의 패키지에도 왕실의 이미지를 충실히 반영했다.
배미애 LG생활건강 럭셔리사업부 한방마케팅부문 부문장은 “궁중 마케팅을 위해 브랜드 곳곳에 한국 궁중의 역사와 문화를 고스란히 담았다”며 “궁중 대례복 ‘적의’와 왕실 권위의 상징이자 공예의 정수를 보여주는 ‘금보’ 등 한국의 아름다운 문화유산을 창의적으로 재해석해 제품 디자인에 적용하고 있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한방’ 대신 ‘궁중’을 내세운 전략이 앞으로는 더 큰 효과를 가지고 올 것으로 보고 있다. 지금까지 ‘한방’ 표현은 한국 제품의 주 무기였다. 설화수와 후 모두 한방을 내세우며 한국 고유의 럭셔리 이미지를 심었다.
하지만 올해 1월부터 중국 상하이 국가식품약품감독관리국이 화장품에서 ‘한방(韓方)’ 표기를 금지했다. 중국인들이 의학 처방으로 오해할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손성민 대한화장품산업연구원 주임연구원은 “한방 표기 관련 규정이 상하이에서 시작됐지만 전국적으로 확대될 수 있는 가능성이 매우 높다”며 “한국 제품의 주 무기였던 ‘한방’ 마케팅을 사용하기 어려운 상황이 되면서 그동안 ‘한방’을 내세웠던 다른 제품은 타격을 받을 수 있는 상황이지만 ‘궁중’에 집중한 ‘후’는 이를 피해 갈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전략② 재구매를 부르는 품질
궁중 비방에서 얻은 성분 배합 후의 ‘궁중’ 정체성은 디자인이나 마케팅 활동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후는 화장품 성분이나 원료 배합을 왕실 궁중 스토리나 고대 의학 서적에서 얻고 있다. 후는 수만 건에 달하는 궁중 의학 서적을 연구하는 ‘한방연구소’를 두고 있다.
한방연구소에서는 궁중 왕실의 비방이 적혀 있는 고서를 분석해 궁중 여성들이 아름다움과 건강을 지키기 위해 사용한 독특한 궁중 처방을 제품에 적용하고 있다.
배 부문장은 “옛 궁중에서 왕과 왕후들이 피부 건강을 위해 어떤 약재와 처방을 사용했는지 알아내기 위해 ‘조선왕조실록’이나 ‘승정원일기’ 같은 왕실의 생활상을 담은 기록뿐만 아니라 왕실의 의술을 기록한 한의서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궁중 비방을 찾아내고 현대과학과 접목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를 통해 탄생한 대표 제품이 바로 ‘비첩 자생 에센스’다. 이 제품은 공진비단·경옥비단·청심비단 등 궁중 3대 비방으로 알려진 원료 배합을 통해 베스트셀러로 자리 잡았다. 이 제품의 2017년 한 해 생산 금액만 1558억원에 달한다. 또한 35년이 넘은 산삼이 들어가는 후의 최고급 제품군인 ‘환유’ 라인도 궁중 비법을 따랐다.
◆전략③ 글로벌 현지화 전략
13년간 이영애 내세우고 다이궁 통해 입소문 ‘후’는 브랜드 출범 당시부터 글로벌 시장, 그중에서도 아시아를 주 무대로 삼았다. 한자를 사용하는 아시아권 고객들이 왕후를 떠올리게 하는 한자 ‘후(后)’만 봐도 총체적인 브랜드 콘셉트를 파악할 수 있게 네이밍을 ‘후’로 선택했다.
또 LG생건은 2006년 중국 진출 때부터 후를 통해 중국 화장품 사업에 철저한 ‘고급화 전략’과 ‘VIP 마케팅’ 전략을 내걸었다. ‘후’는 해외 럭셔리 화장품으로서의 입지를 굳히기 위해 현지에서 부유층이 즐겨 찾는 고급 백화점에 집중적으로 입점했다. 상하이의 ‘바바이반(八百伴), ‘주광(久光)’, 베이징의 ‘SKP’ 등 중국 대도시의 최고급 백화점을 중심으로 매장을 확대해 현재는 203개의 ‘후’ 매장을 운영하고 있다.
또한 ‘후’는 중국인들이 선호하는 금색와 붉은색을 활용한 제품 용기를 꾸준히 선보였다. 후는 미백 기능성 라인 등 일부 라인을 제외하고 두 가지 색상을 적절히 사용한 제품 용기를 사용하고 있다.
배 부문장은 “후는 VIP 마케팅 전략의 일환으로 중국 내 상위 5% 고객을 공략하기 위한 다양한 마케팅 활동을 펼치고 있다”며 “해외에서는 궁중에서 외국 사신을 대접하기 위한 연회를 뜻하는 ‘연향’ 의미에 맞춰 행사를 기획하고 최고급 호텔 등에서 제품 소개와 전시, 한국 궁중 문화를 알리는 행사를 진행하고 있다”고 말했다.
‘후’의 또 다른 일등 공신은 브랜드 모델인 배우 이영애 씨다. 이영애 씨는 ‘후’가 인물 모델을 처음으로 내세웠던 2006년부터 지금까지 13년 동안 ‘후’의 얼굴로 활동하고 있다.
한 화장품업계 임원은 “이영애 씨가 주는 고급스럽고 우아한 이미지가 ‘후’가 강조하고자 하는 품격과 잘 맞아떨어졌다”며 “중국뿐만 아니라 동남아 시장에서도 한류 스타 중 이영애 씨의 이미지와 인지도를 대신할 수 있는 인물은 아직까지 없기 때문에 ‘후’가 글로벌 브랜드로 도약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고 말했다.
반면 아모레퍼시픽의 설화수는 그동안 인물 모델 없이 브랜드 가치만으로 마케팅을 진행해 왔다. 하지만 최근 배우 송혜교 씨를 모델로 발탁했다. 이를 두고 업계에서는 후와 브랜드 모델 이영애 씨가 함께 만들어 내는 시너지 효과를 보고 브랜드 모델의 필요성을 느낀 것 같다는 평이 나오고 있다.
2014년에는 박근혜 전 대통령이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의 부인 펑리위안 여사에게 ‘후’를 선물했다는 내용이 중국에 보도됐다. 그러자 ‘후’를 찾는 중국인 관광객들이 늘어났다. 2013년 2037억원이던 후의 매출은 꾸준히 증가해 2016년 1조원을 돌파했다.
후가 중국 시장에서 럭셔리 브랜드로 자리매김하며 2018년 한 해 매출 2조원을 돌파하기까지는 이처럼 일관된 마케팅과 브랜드 이미지에 걸맞은 유명인들의 효과가 있었다. 2017년부터 LG생건의 ‘후’ 면세점 매출이 처음으로 아모레퍼시픽의 ‘설화수’를 역전했다. 이는 면세점 ‘구매 제한’에서 갈렸다. 유커(중국인 관광객)가 감소한 자리를 다이궁(중국인 보따리상)이 채웠지만 아모레퍼시픽은 브랜드 가치 훼손을 우려해 ‘구매 제한’을 내걸었다. 1인당 10개까지 구매할 수 있었던 설화수의 구매 제한 수량을 5개로 줄인 것이다.
반면 ‘후’는 구매 제한 개수 10개를 유지했다. 아모레퍼시픽은 장기적인 브랜드 이미지를 위해 일종의 고육지책을 펼친 것이지만 중간 유통망인 다이궁들이 ‘후’로 몰리면서 중국 현지 시장에서 ‘후’의 인지도가 높아질 수밖에 없었다.
다이궁들이 자신의 소셜 미디어 등 다양한 유통 채널에서 제품을 판매하기 위해 자발적인 마케팅을 실시했기 때문이다.
조경진 키움증권 애널리스트는 “아모레퍼시픽의 구매 제한은 다이궁이 현지에서 제품을 할인 판매해 브랜드 이미지가 훼손되는 것을 막기 위한 방침이었지만 ‘설화수’의 실적 악화로 이어지는 이유가 됐다”며 “약 10개월 만에 구매 제한선을 완화했지만 면세점 매출에서 그 효과가 즉각 나타나기 어려웠다”고 말했다.
◆전략④ 브랜드 선택과 집중
럭셔리 강화하고 유통 채널 재정립
전문가들은 LG생건이 중국 럭셔리 시장을 선점할 수 있었던 이유에 대해 ‘발 빠른 소비 트렌드 대응’을 꼽았다.
전 세계적으로 중소 브랜드 전성시대가 이어지고 있다. 소비자의 구매 형태가 온라인·모바일·헬스&뷰티(H&B) 등 새로운 화장품 판매 채널로 변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오프라인 매장을 기반으로 성장했던 로드숍 브랜드는 빠르게 트렌드에 대응해야 하는 중저가 시장에서 밀리고 있다. 중국에서도 이커머스 플랫폼과 화장품 제조사들의 발달로 중소 브랜드의 중국 진출이 용이해지고 있고 중저가 시장 위주로 중국 현지 브랜드가 무섭게 성장하고 있다. 대표적인 브랜드가 바로 ‘바이췌링’이다. 바이췌링은 2010년 온라인을 통해 판매를 시작해 지난해 티몰에서 화장품 매출 1위를 기록했다.
이처럼 중저가 시장에서는 이미 현지 브랜드가 K 뷰티 자리를 대체하고 있다. 반면 중국 럭셔리 화장품 시장에서는 소비자들이 여전히 글로벌 브랜드를 선호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LG생건은 이런 변화에 선제적으로 대응했다.
LG생건은 2018년 중국 내 더페이스샵 오프라인 매장을 모두 철수했다. 국내에서도 더페이스샵 오프라인 매장보다 화장품 편집숍인 ‘네이처컬렉션’에 집중했다.
또 2014년에는 차앤박화장품으로 유명한 CNP코스메틱스를, 2017년에는 태극제약을 차례로 인수해 빠르게 성장하고 있는 ‘더마코스메틱’ 시장을 선점하며 중저가 시장의 전략을 다시 짰다.
양지혜 메리츠종금증권 애널리스트는 “LG생건은 2013년부터 중국 현지 브랜드의 성장을 예상했다”며 “다양한 인수·합병(M&A)을 통해 중저가 브랜드 전략을 다시 짜고 ‘후’와 ‘숨’에 집중하며 중국 내 럭셔리 시장에서 독보적인 입지를 굳힐 수 있었다”고 말했다.
김영은 기자 kye0218@hankyung.com
[본 기사는 한경비즈니스 제 1213호(2019.02.25 ~ 2019.03.03) 기사입니다.]
© 매거진한경,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