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행 르포
구조조정·매각 여파로 ‘중공업 가족’ 균열
옥포상권 “3년 전보다 매출 70% 급감”

‘중공업 가족의 유토피아’의 저자인 양승훈 경남대 사회학과 교수와 함께 5월 21일 거제도를 찾았다. 양 교수는 5년간 대우조선해양에서 근무한 경험을 바탕으로 거제도의 뿌리라고 할 수 있는 조선소 노동자와 그들 가족들의 관점에서 이 도시의 성공과 위기를 이야기로 풀어냈다. 겉에서만 봐서는 절대로 알 수 없는, 거제도의 진짜 ‘속 이야기’다.
◆‘중공업 가족’의 탄생
바깥세상과 연결이 어려운 섬마을이었던 거제도가 육지와 연결된 건 1971년 구 거제대교가 건설되면서다. ‘다리’가 생기면서 거제도는 더 이상 섬이 아니게 됐지만, 그 후에도 여전히 거제도에서부터 부산이나 서울 등의 대도시를 오가는 건 쉬운 일은 아니었다. 2004년 열린 거가대교가 거제도에 큰 의미를 갖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21일 오전 부산에서 거제도로 연결된 거가대교 해저터널을 지나 섬에 들어서자, 푸른 산과 바다가 어우러진 풍경이 먼저 시선을 사로잡는다. 잘 닦여진 도로 주변에는 고층 아파트와 빌딩들이 정돈된 채 자리 잡고 있다. 그저 잘나가는 도시의 중심가와 크게 다르지 않다.


엄 매물이 나와도 매매가 이뤄지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조선소 인근에 도착하자 통근 차량이 일렬로 조선소 앞 주차장을 빠져나가고 있다. 양 교수는 “아침에는 아빠들이 통근 버스로 작업장에 출근하고 그다음에 는 아이들이 같은 차를 타고 학교를 가고 그 이후에 엄마들이 또 같은 버스를 타고 주부 아카데미로 향한다”고 설명했다.
통근 버스를 시작으로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거제도 시민들의 가족 이야기로 흘러갔다. 조선소에서 일하는 거제도 시민들은 아빠와 아이들의 점심 식사 메뉴가 똑같다. 직장과 학교 등에서 모두 같은 케이터링 업체에서 식사를 받기 때문이다. 저녁에 온 가족이 둘러앉으면 아빠와 딸이 “오늘 점심은 그 반찬이 좀 별로였어”와 같은 대화를 주고받는 게 일상이다. 거제도 시민들에게 조선소는 단순한 ‘직장’이 아니라 온 가족들의 생활에 뿌리 깊게 연결돼 있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다. 오직 조선업을 위한 도시 거제도에 ‘중공업 가족’의 탄생이다.

2014년 무렵까지만 해도 거제도 중공업 가족들은 안정적인 남편의 직장을 기반으로 꽤 여유로운 중산층의 삶을 누렸다. 남편이 조선소에서 일하는 동안 부인들은 주부 아카데미나 혹은 구조라해수욕장 근처의 세련된 카페에서 남편의 직장에 대한 얘기를 나눴다. 직장 내 누가 승진했다는 소식은 남편보다 부인들이 먼저 듣고 남편에게 전해 주었을 정도다.
양 교수는 “산업도시 거제도에서 ‘중공업 가족’의 위기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지표는 출생률”이라며 “3~4년 전까지만 해도 거제도는 출생률이 2.3명일 정도로 다른 지역에 비해 높은 편이었지만 지금은 1.5명 정도로 낮아지는 추세”라고 말했다. 탄탄했던 직장의 앞날이 불투명해지며 자연스럽게 가족계획에도 반영되고 있는 것이다.

대우조선해양 옥포조선소는 서문·남문·정문·동문·북문·N안벽문 등 6개의 출입문이 있다. 그중 북문쪽으로 먼저 향했다. 북문 작업장 안쪽으로 액화천연가스(LNG)선들과 쇄빙선 등 작업 중인 배들의 모습이 한눈에 들어온다. 2011년 이곳에 정규직 사원들을 위한 기숙사가 건립됐는데 그 이후 개발되기 시작한 지역이다. 기숙사 아래에는 중국집·백반집 등의 식당과 3~4층 규모의 빌라들이 듬성듬성 자리하고 있다. 이 빌라들은 조선소에서 근무하는 하청업체 직원들이 잠시 거주하는 방으로, 원룸형 보다 조금 큰 투룸형들이 대다수다.
점심시간이 되자 직원들이 하나둘 출입문을 나선다. 간혹 네팔 음식 등 이국적인 음식점 간판이 눈에 띄는데 이는 조선소에 일하러 온 외국인 노동자들의 영향이다. 하지만 현재는 음식점 중에서도 아예 간판을 내리고 주거 용도로 쓰거나 문을 굳게 걸어 잠그고 빈 공간으로 남아 있는 곳들도 적지 않다. 양 교수는 “점심시간이면 이곳 식당들마다 길게 줄이 늘어서 있고 바글바글했던 곳”이라며 “예전에 비해 일거리가 줄면서 일하는 사람들이 빠지고 식당과 같은 상권에도 그 영향이 나타나고 있다”고 말했다.

양 교수는 “2000년대 이후부터 사내 하청업체의 수가 폭발적으로 증가했는데 일종의 ‘위험의 외주화’, ‘해고의 외주화’가 이뤄진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곳에서 30년 넘게 해양식당을 운영해 온 장미숙 사장은 “12시 점심시간에는 여전히 사람이 많지만 그 외의 시간에는 손님이 없다”며 “재작년 작년만 해도 쉴 틈이 없었는데 해가 갈수록 사람이 줄어드는 게 보인다”고 말했다.
장승포를 떠난 취재 차량이 대우옥림아파트를 지나 거제대로 향했다. 대우옥림아파트는 대우조선해양의 직원들 가운데 가족들이 함께 거제도에 정착한 이들이 주로 거주하는 곳이다. 지어진 지 오래된 아파트이지만 비교적 저렴한 가격에 입주가 가능하기 때문에 신혼부부들이 경제적 기반을 닦으며 정착하기 좋다. 인근에는 사무 보조직에 근무하는 여직원들이 거주하는 기숙사가 들어서 있다.
이렇듯 거제도는 각 거주지나 건물마다 회사 내에서 거주자의 직위나 가족 형태 등을 명확하게 알 수 있는 곳이 꽤 있다. 그러다 보니 거제 내의 커뮤니티를 형성하는 데도 거주지에 따른 ‘낙인효과’가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한다. 양 교수는 “조선업의 위기가 심화되는 만큼 직영 노동자들과 하청 노동자들의 정서적 간극도 심화되는 분위기”라며 “갈등이 심각해지면서 ‘갑질 논란’으로 표출되는 일도 비일비재하다”고 말했다.
◆젊은 엔지니어들은 떠나고 싶다
대우옥림아파트를 지나 도착한 거제대는 조선소의 ‘엔지니어’들을 교육하는 2·3·4년제 사립대학이다. 1990년대 설립돼 한동안 대우조선해양 등에 엔지니어들을 공급하는 주요 교육기관으로 역할 했다. 지금도 거제대를 졸업하고 대우조선해양 등에 입사하는 이들이 많다. 하지만 그 숫자는 현저히 줄었다. 취재진이 학교를 찾은 이날 교내에 붙어 있는 ‘대우조선해양 합격자 축하’ 플래카드에 올라와 있는 이름은 14명이었다.
양 교수는 “예전에는 지역의 공대나 전문대학을 졸업하고 아버지와 아들이 같은 직장에서 근무하길 원하는 이들이 많았다”며 “지금은 정규직으로 취직하기가 점점 더 어려워지는 게 현실”이라고 안타까워했다.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하는 것이 거제도 특유의 ‘하면 된다’ 정신이다. 2000년대 초반 한국의 조선 산업은 대형 컨테이너선과 LNG선 등을 무더기로 수주하며 글로벌 시장에서 독주 체제를 갖춰 가고 있었다.
양 교수는 “컨테이너선만 해도 똑같은 배를 열 몇 척씩 만드는 작업이기 때문에 첫 배에서 경험 부족으로 손실이 나더라도 이를 그다음 배에서 만회하는 게 가능했다”며 “이러한 과정 속에서 거제도 특유의 ‘하면 된다’ 정신이 강하게 자리 잡았다”고 설명했다. 이와 같은 배경 때문에 거제도의 조선소 작업장에서는 엔지니어들 못지않게 현장 생산직들의 전문성을 높이 인정받았고 엔지니어들 역시 ‘현장과의 소통이 중요하다’는 인식이 강했다.
그런데 이 ‘하면 된다’ 정신이 더 이상 통하지 않게 된 것은 2010년 무렵 해양 플랜트 작업이 늘어나면서부터다. 외환위기 이후 2000년대 초반 조선 산업은 단군 이후 최대의 호황을 누렸는데 당시는 중국 경제가 급속도로 성장하며 막대한 물자를 운송할 수단이 필요했던 시기였다. 그런데 2008년 금융 위기를 겪으며 선박 수주가 급감하기 시작했고 이후 10년간 국내 조선업은 ‘해양 플랜트’에 주력하기 시작한 것이다.

양 교수는 “해양 플랜트가 국내 조선업의 위기를 불렀다고는 할 수 없다. 당시에는 해양 플랜트 외에 다른 대안이 없었던 것도 사실이기 때문”이라며 “다만 예전의 작업 방식 그대로 ‘하면 된다’ 정신으로 밀어붙이면서 전환되는 과정이 매끄럽지 않았다”고 진단했다.
거제대에서 옥포항으로 넘어가는 길에 대우조선해양 엔지니어들이 주로 일하는 초고층 빌딩이 자리하고 있다. 양 교수는 “조선업체들이 해양 플랜트를 시작하며 엔지니어들을 대거 채용했다”며 “조선업에 위기가 드리워지기 시작하면서 사무직과 엔지니어들이 대거 이직하기 시작했는데 이 건물에서 일하던 사람들도 많이 그만두고 떠나갔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들의 이직이 단순히 ‘조선업의 위기’ 때문만은 아니라는 게 양 교수의 지적이다. 이들 젊은 직원들이 거제도에 또 다른 ‘중공업 가족’을 꾸리고 정착하도록 회사 측에서도 많은 지원을 했지만 결과는 그리 좋지 않았다.
거제도 내에도 20~30대 젊은 직원들이 주로 어울리는 상권이 없는 것은 아니다. 아주동이 대표적인 장소다. 이곳에는 삼삼오오 둘러앉아 커피를 마시거나 간단히 맥주 한잔 즐길 수 있는 펍들이 주를 이루고 있다. 젊은 신혼부부들을 대상으로 한 키즈 카페도 곧잘 눈에 띈다. 하지만 거제도에서 가정을 꾸리고 정착에 성공한 이들은 극소수다. 거제도 내에서 반려자를 찾는 것이 아니라면 외부에서 만난 반려자와 함께 거제도에 정착하는 이는 더욱 드물다.
이 때문에 미혼인 젊은 직장인들은 네 시간 정도나 걸리는 긴 이동 시간에도 불구하고 주말마다 셔틀 버스에 몸을 싣고 서울을 오가며 기회가 있을 때마다 근거지를 서울로 옮기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거제도의 부활을 위해서는 단순히 ‘조선업’의 부활이 아니라 ‘살고 싶은 도시’로 만드는 것이 전제 조건이라는 것을 다시 한 번 일깨워 주는 대목이다.
◆외국인근로자 2009년 이후 최저
거제도의 메인 상권이라고 할 수 있는 옥포는 조선소 직원들의 회식을 위해 주로 찾는 곳이다. ‘거제도 경기의 바로미터’와 같은 곳이다. 저녁 5시에서 6시가 지나면 조선소 직원들이 하나둘 퇴근을 시작한다. 모두 다 똑같은 작업복을 입은 이들은 회식 자리에서도 같은 회사 식구로서의 동질감을 강조하며 오늘의 피로를 풀고 내일의 희망을 노래한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이곳에서 볼 수 있었던 흔한 풍경이었다. 하지만 요즘은 저녁 6시가 넘어 땅거미가 어둑어둑해질 때까지도 손님이 들지 않아 텅텅 비어 있는 가게들이 대부분이다.

최근 대우조선해양은 매각 이슈로 안팎으로 시끄러운 분위기다. 서문 근처만 하더라도 ‘대우조선 특혜 매각을 반대한다’와 같은 플래카드가 빼곡하게 걸려 있다. 조선소 내의 어수선한 분위기가 거제도의 메인 상권인 옥포에도 그대로 영향을 미치고 있다. 박 사장은 “이곳에서 술 마시는 직원들 대부분이 같은 회사 동료들이기 때문에 술자리에서 회사 얘기를 자주 하는 편은 아니다”며 “3~4년 전만 해도 ‘힘들지만 버텨보자’고 애기하는 분위기였다면 요즘은 아예 술자리를 갖는 횟수 자체가 줄어들고 있다”고 전했다.

이는 거제도 내에 거주하는 외국인들의 통계를 봐도 분명하게 알 수 있다. 2009년 거제도에 거주하는 외국인의 수는 7500명을 조금 넘어선다. 이 숫자는 2015년 1만5000명까지 늘어나지만 이후 급속도로 하락세를 보이기 시작한다. 2018년을 기준으로 거제도에 거주하는 외국인은 7500명으로 2009년 이후 최저치다.

양 교수는 ‘조선 산업 고도화’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그가 예로 든 국가는 노르웨이다. 현재 노르웨이는 글로벌 시장에서 조선해양 기자재 대표 국가다. 양 교수는 “노르웨이가 지금 현재 배라는 제품을 생산하지 않는다고 해서 조선업을 하지 않는 게 아니다”며 “과거의 최종 생산 경험을 기반으로 지금은 뛰어난 엔지니어링과 기자재 회사들이 조선해양 산업의 설계와 기자재 부문을 이끌고 있다”고 지적했다.

거제도=이정흔 한경비즈니스 기자 vivajh@hankyung.com
사진=이승재 기자 fotoleesj@hankyung.com
[본 기사는 한경비즈니스 제 1226호(2019.05.27 ~ 2019.06.02)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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