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년 분단 끝내고 통일의 길로…한마디 말실수가 빚은 세기의 역사
베를린 장벽 붕괴 30주년…기적의 역사를 만든 그날의 기억
[한경비즈니스=베를린(독일) = 박진영 유럽 통신원]지난 11월 9일 베를린 장벽 붕괴 30주년을 맞아 베를린 도시 전체가 들썩였다. 일찍이는 몇 달 전부터 30주년을 기념하기 위한 행사와 전시 등이 열렸고 기념일이 끼어 있는 기념 주간 한 주에는 무려 200여 개의 크고 작은 행사가 열렸다.
당일 저녁에는 동서 베를린의 경계에 있던 브란덴부르크문에서 수많은 시민이 참여한 가운데 장벽 붕괴 30주년 기념 공연이 열리는 등 기념일을 위한 기념일이 아닌 모두의 축제로 치러졌다.
이날 공연 무대 위 상공에 설치된 미국인 예술가 패트릭 숀의 설치 미술품 ‘비전스 인 모션’은 사랑과 평화를 기원하는 시민 3만 명의 자필 메시지가 담긴 리본 3만 개로 이뤄진 작품으로 ‘베를린 장벽 붕괴 30주년’이 독일인들에게 얼마나 특별한 이슈인지를 대표적으로 보여줬다.
기념일 당일 이후에도 베를린에는 장벽 붕괴 30주년에 대한 여운이 아직 남아 있다. 30년 전 장벽이 붕괴된 그날 이후 이듬해 10월 통일이 되는 그날까지 그랬던 것처럼 내년 통일 30주년이라는 또 한 번의 역사적 순간을 맞이할 때까지 이 분위기는 이어질 기세다.
베를린 장벽 붕괴 30주년…기적의 역사를 만든 그날의 기억
◆서베를린으로의 탈출 막기 위해 장벽 건설
슬픔의 역사인 베를린 장벽은 1961년 냉전 시대 공산 정권하에서 자유를 찾아 동베를린 지역에서 서베를린으로 탈출하는 사람들을 막기 위해 건설됐다. 1949년부터 1961년까지 총 1700만 동독 인구 중 무려 260만 명 이상의 동독인들이 탈출했는데 이들의 대부분이 다양한 분야에서 숙련된 전문가라는 점에서 동독 정부는 사실상 큰 손실을 본 셈이었다.
이에 따라 경제적 침체와 함께 사회적 붕괴에 직면하자 동독 정부는 서베를린을 둘러싼 전체 국경을 폐쇄하기로 결정, 서독으로부터 동독인들을 보호하기 위한 ‘반파시스트적 보호 장벽’이라는 이름 아래 장벽 건설에 나섰다. 때는 1961년 8월 13일 일요일로, 이 기습적인 장벽 건설을 위해 많은 이들이 여름휴가를 떠날 날이 일부러 선택됐다. 처음에는 철조망으로 세워진 장벽이 그 후 수직 콘크리트 슬래브로 교체됐는데 서베를린을 둘러싼 장벽의 총 길이는 무려 96마일(약 154km), 벽의 높이는 13피트(약 4m)에 달했다.
장벽 건설을 가로막는 것은 그 어떤 것도 허락되지 않았다. 그것이 비록 누군가의 삶의 터전이라고 해도 예외가 없었다. 동서 베를린 경계 지역, 당시 장벽 건설의 일부 구간이 된 베르나우어 스트라세 같은 거리의 집들에서는 시민들이 동독 쪽에 갇히지 않기 위해 서베를린 쪽으로 난 창문을 향해 뛰어내리기도 했다.
장벽이 세워진 후에도 동베를린 시민들의 탈출 시도는 계속됐다. 약 5000명의 사람들이 탈출에 성공했고 140여 명은 벽을 넘어 도망치다가 목숨을 잃은 것으로 알려졌지만 이 수치에 대해 동독 정부가 축소한 것이라는 논란이 여전히 존재한다.
장벽 붕괴가 일어난 1989년 가을, 동독 정부에 대한 동독 국민의 정치적 항의는 점점 거세졌다. 많은 창작자와 지식인 계층이 민주개혁을 요구했다. 사실 오래전부터 공산주의 국가인 동독에서는 변화가 불가피하다는 소문이 떠돌았다.
당시 시민들은 떼를 지어 정치·경제적으로 파산한 국가에 등을 돌리고 있었다. 라이프치히에서는 매주 수천 명이 모여 제한 없이 자유롭게 여행할 권리를 요구하는 등 목소리를 높였다. 한때 동독에서 최고 권력자였던 에리히 호네커조차 국민의 분노를 가라앉히기 위해 1989년 10월 공산당 당수직을 포기할 정도였다.
◆장벽 붕괴 재촉한 대규모 민중 시위
마침내 11월 4일, 보다 대담해진 대중이 동독 수도인 동베를린의 중심지 알렉산더 플라츠에서 시위를 조직했다. 이날 열린 시위에 무려 100만 명이 모이면서 역사상 가장 큰 시위가 됐고 그로부터 불과 며칠 후 베를린 장벽이 붕괴되는 기적을 낳았다. 그날 거대한 역사의 서막이 될 현장에 있었던 이들이 장벽이 붕괴된 11월 9일보다 11월 4일을 더 중요한 날로 꼽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며칠 뒤 장벽이 붕괴되던 순간은 그야말로 극적이었다. 어마어마한 반정부 시위가 있은 후 정부는 국민을 진정시키기 위한 조치가 필요했고 서독으로의 여행 완화 조치에 대해 발표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국경을 개방할 의도는 전혀 없었다. 장벽 붕괴는 어디까지나 정부 당국자의 순간적 말실수가 낳은 결과였다.
11월 9일 밤, 동독의 사회주의통일당 고위 당국자인 귄터 샤보프스키 정부 대변인은 그날 오전 열린 각료 회의의 결정 사항을 발표하는 기자 회견을 열었다. 전날까지 휴가를 갔다가 기자 회견 당일 복귀해 급히 기자 회견장에 나온 샤보프스키 대변인은 기자 회견 중 그에게 전달된 메모를 읽기 시작했는데 내용인 즉, “이제 해외여행은 전제 조건 없이 신청할 수 있게 됐다”는 것이었다.
당시 동독에서 서독으로 가기 위해서는 여권 등 서류를 지참하고 여행 허가 신청을 받아야만 가능한 일이었다. 여행을 할 수 있는 대상과 사유가 제한적이었다. 따라서 ‘전제 조건 없는 여행’은 엄청난 자유화 조치임에는 틀림없었다.
기자 회견장은 순간 아수라장이 됐고 더 자세한 정보를 요구하는 기자들의 질문이 빗발치는 가운데 언제부터 효력이 발생하는지 묻는 질문에 당황한 샤보프스키 대변인이 “즉시”라고 답했다. 하지만 여행 자유화 조치 발표 예정일은 기자 회견 다음 날이었고 구체적인 내용 또한 여행 허가 범위를 확대하는 것일 뿐 완전한 자유화는 아니었다. 메모 내용을 제대로 숙지하지 못한 샤보프스키 대변인의 실언이었던 것이다.
그의 한마디 발언과 함께 ‘베를린 장벽이 열렸다’는 보도가 TV 뉴스 등을 통해 퍼져 나가자 엄청난 수의 동베를린 시민들이 한꺼번에 베를린 장벽으로 몰려들었다. 당시 해당 기자 회견을 혼란스럽게 지켜본 한 초소의 국경수비대장은 당국의 어떤 지침도 받지 못한 상황에서 비극적 사태를 막기 위해 국경을 열 것을 지시했다.
이 소식을 들은 다른 초소들도 하나둘 국경을 개방하면서 베를린 장벽은 붕괴됐다. 그 어떤 무력 진압이나 충돌 사태 없이 그렇게 45년 분단의 역사는 통일이라는 새로운 문을 향하게 됐다.
그날 이후 동서독이 국경 검문소를 통과해 자유롭게 여행을 하는 등 교류가 가능해졌고 이듬해 3월 동독에서 역사적인 첫 자유선거가 치러져 통일을 공약으로 내세운 독일연맹이 승리, 장벽이 붕괴된 지 약 1년 뒤인 1990년 10월 3일 독일은 마침내 통일의 순간을 맞이했다.

[본 기사는 한경비즈니스 제 1252호(2019.11.25 ~ 2019.12.01)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