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레스덴 이어 베를린에서도 발생, 최근 몇 년 새 연이은 강탈로 보안에 의문 제기
'독일 박물관 수난시대'... 1조3000억대 보물 도난 사건
[베를린(독일) = 박진영 유럽 통신원]지난 12월 초 방문한 베를린 박물관 섬(Berlin Museum Island) 내의 구 내셔널 갤러리에는 긴장감이 감도는 듯했다. 보통 각 방마다 1명씩 배치돼 한쪽 구석에 자리를 차지한 채 ‘역할’을 수행하던 예전과 달리 이날은 관람객 사이를 분주히 돌아다니며 각별히 신경을 쓰는 눈치였다.
유명 작품들이 대거 전시된 룸에는 일시적으로 많게는 3명의 경비원들이 머무르기도 했다. 대개 나이 지긋한 경비원들이 상주하고 있었지만 이날은 상당히 젊은 남자 경비원들도 더러 눈에 띄었다.
“박물관 보안 강화에 대한 지침이 있었느냐”는 질문에 해당 박물관은 “평소대로 하고 있다”고 답했지만 여러 차례 같은 곳을 방문했던 기억을 되살리면 분명히 달라진 모습이었다. 최근 연이어 발생한 박물관 도난 사건과 무관하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최악의 예술품 도난 사건
1주일 사이 독일에서는 두 건의 박물관 도난 사건이 발생해 독일 사회를 충격에 빠뜨렸다. 첫째 사건은 독일 작센 주 드레스덴에서 발생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최악의 예술품 도난 사건이라고 불리는 이 사건은 지난 11월 25일 월요일 현지시간 새벽 5시 직전, 드레스덴 왕궁 내 박물관인 그뤼네 게뵐레에서 일어났다.
인근 전기 배급소에 화재가 발생, 박물관의 조명과 경보를 해제하고 일대를 어둠으로 몰아넣은 시각, 2명의 남자가 그뤼네 게뵐레에 침입하는 장면이 감시 카메라에 찍혔다. 그들은 1층 창문을 부수고 들어간 뒤 8개의 전시실 중 보물의 방을 목표로 돌진, 진열장을 도끼 등으로 수차례 내리쳐 깨부순 뒤 보물을 들고 달아났다. 화재에도 불구하고 경보는 울렸고 경찰이 몇 분 만에 현장에 출동했지만 불과 4~5분 만에 범행을 마친 용의자들은 이미 도주한 뒤였다.
이날 새벽 드레스덴에서 용의 차량으로 보이는 불타고 있던 승용차를 발견한 경찰은 2명이 해당 차량에서 대기 중이었을 것으로 보고 용의자를 4명으로 추정하고 있다.

도난당한 공예품은 모두 18세기를 대표하는 보석 3세트로, 그중 2세트는 각각 37개의 장신구로 구성돼 있고 나머지 한 개는 20여 개로 모두 100점에 가까운 보물들이 강탈당했다. 경찰이 공개한 도난 품목 중에는 박물관에서 가장 가치가 큰 49캐럿의 다이아몬드가 포함된 것으로 알려졌다.
이는 1728년 작센왕국의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1세가 구입한 것으로, 전문가들은 1200만 달러(약 141억원)의 가치가 있는 것으로 평가하고 있다. 그 외 도난당한 보석 공예품에도 상당한 다이아몬드 장식이 포함돼 있다. 9개의 대형 다이아몬드와 770개의 소형 다이아몬드가 사용된 검 공예품도 도난 품목에 포함돼 있는 등 전체 규모가 무려 1조3000억원에 이를 것으로 추산된다.
하지만 일명 ‘드레스덴 그린’으로 불리는, 무려 40.7캐럿짜리 녹색 다이아몬드 펜던트는 미국 뉴욕 메트로폴리탄박물관에서 열리는 전시를 위해 대여 중이어서 다행히 화를 면했다.
◆49캐럿 다이아몬드 등 100여 점의 보물 사라져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박물관 중 하나인 그뤼네 게뵐레는 드레스덴 주립 미술품들을 구성하고 있는 12개 박물관 중 하나다. 강건왕(The Strong)이라고 불리며 프랑스 루이 14세의 라이벌이었던 작센의 선제후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1세(폴란드 왕명 아우구스트 2세)가 1723년 드레스덴을 대표하는 건축물인 츠빙거 궁전을 짓고 서관 1층에 마련한 전시 공간이 바로 이곳이다.
그뤼네 게뵐레(영어명 그린 볼트)라는 명칭은 몇몇 개의 방들이 말라카이트 녹색(그린) 페인트로 된 둥근 천장으로 돼 있어 지어진 이름으로, 제2차 세계대전 동안 큰 피해를 봤지만 성공적 복원을 거쳐 2006년 재개장했다. 복원 후 2010년 앙겔라 메르켈 총리가 처음 국빈 방문한 버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을 위해 사용하기도 했다.
그뤼네 게뵐레에는 이번에 도난당한 보석의 방 외에도 7개의 다른 전시실과 아우구스트 1세를 비롯한 작센의 선제후들이 수집한 3000여 개의 보석과 걸작들이 있는 9개의 방으로 돼 있고 에메랄드가 박혀 있는 63cm 크기의 흑인(무어) 조각상과 러시아 피터 1세가 아우구스트 1세에게 준 547.71캐럿짜리 사파이어 등을 소장하고 있다.
드레스덴 국립미술관의 마리온 아커만 관장은 사건 발생 후 나머지 7개의 전시관이 안전하다는 사실을 확인한 후 “당초 우려했던 것보다 훨씬 적은 양의 물건을 훔쳐갔다”고 말했다. 그러면서도 도난품의 규모에 대해서는 “물질적 가치는 역사적 의미를 반영하지 못한다”며 그 가치를 추정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또한 그는 절도범들에게 보석들을 산산조각내지 말라고 호소하기도 했다. 절도범들이 공예품에서 보석들을 분리해 판매할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드레스덴이 속한 작센의 총리인 미카엘 크레취머는 “미술관은 물론 작센이 강탈당했다”며 “그뤼네 게뵐레와 작센의 국가 미술 소장품 없이는 독일의 역사를 이해할 수 없다”며 망연자실했다.
아직까지 용의자들의 흔적을 찾지 못한 가운데 독일 경찰은 이번 박물관 도난 사건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는 사람에게 50만 유로(약 6억6000만원)의 보상금을 제공하겠다고 밝혔다.
희대의 도난 사건이 발생한 지 불과 6일 뒤인 12월 1일, 베를린 슈타지 박물관에서도 비슷한 도난 사건이 발생해 또 한 번 독일 사회가 발칵 뒤집혔다. 슈타지 박물관은 옛 동독 비밀경찰인 슈타지 관련 자료를 전시하는 박물관으로, 사라진 소장품 목록에는 금으로 된 동독의 애국훈장, 동독 최고의 영예였던 카를 마르크스 훈장, 구소련의 레닌 훈장 등을 포함해 슈타지가 1950년대부터 1990년 국가가 멸망할 때까지 시민에게서 몰수한 반지와 시계 등이 포함돼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 물건들은 통일 이후 주인을 찾지 못해 전시돼 있던 것들이다. 도둑들은 1층 창문을 깨고 박물관에 들어가 범죄를 저질렀다.
불과 2년 전인 2017년에도 베를린에서는 박물관 도난 사건이 발생했다. 보데 박물관에서 100kg에 달하는, 세계에서 가장 큰 금화를 4명의 남성이 탈취했다. 이후 경찰에 붙잡힌 이들의 재판이 올 초 진행돼 또 한 번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킨 바 있다.
당시 사다리를 이용해 3층 유리창을 뚫고 박물관에 침입한 이들은 금화가 전시된 방탄 진열장을 부순 후 금화를 손수레에 싣고 가까운 공원으로 이동, 차량에 실어 나르는 대담하고 단순한 수법으로 화제가 됐고 범행 당시 박물관 경보 시스템이 울리지 않았다는 점에서 더욱 충격적이었다. 4명의 범인 중 1명은 박물관 보안 요원으로, 박물관의 결정적 정보를 제공한 혐의를 받고 있다. 범인 검거에도 불구하고 이미 금화는 산산조각이 나 일부가 팔린 상태로 원상 복구가 불가능한 상태다.
몇 년 새 이처럼 박물관 도난 사건이 잇따르자 독일 내부에서는 박물관 보안 조치에 문제가 있는 것 아니냐는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특히 이번 드레스덴 도난 사건은 경보가 울릴 당시 경비원들이 박물관 내에 있었지만 상해를 우려해 범행을 막지 않고 경찰이 오기를 기다린 것으로 알려져 논란이 일기도 했다. 유럽 전역의 박물관들과 마찬가지로 그뤼네 게뵐레 경비원들 역시 무장하지 않은 상태이고 독립적으로 개입하지 말라는 지시를 받았던 상태다. 드레스덴 그뤼네 게뵐레 박물관은 보안에만 연간 약 800만 유로(약 106억원) 정도로 사용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본 기사는 한경비즈니스 제 1255호(2019.12.16 ~ 2019.12.22)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