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미국)=김현석 한국경제 특파원]미·중 무역 전쟁의 포성이 1단계 합의로 잦아든 지금, 2020년 월스트리트의 가장 큰 걱정거리는 2020년 11월 3일 치러지는 미국 대통령 선거다.
급진적 정책을 부르짖는 엘리자베스 워런 상원의원이나 버니 샌더스 상원의원이 민주당의 대선 후보가 되고 혹시라도 공화당의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을 물리쳐 당선된다면 뉴욕 증시가 폭락할 수 있기 때문이다. 레온 쿠퍼맨, 폴 튜더 존스, 스티브 코헨 등 월가의 전설적 투자자들은 이들 좌파 정치인들이 당선되면 뉴욕 증시가 최대 50%까지 떨어질 수 있다고 우려를 표하고 있다.
◆당적 바꿔도 3선 성공한 ‘자수성가 억만장자’
걱정에 휩싸인 뉴욕 증시에 2019년 11월 말 희소식이 전해졌다. 미디어그룹 블룸버그LP의 창립자이자 마이클 블룸버그 전 뉴욕시장이 민주당 대선 경쟁에 뛰어든 것이다. 블룸버그 전 시장은 현재 경선에 출마한 후보들로선 최종 대선에서 트럼프 대통령을 이길 승산이 없다며 출마를 선언했다.
블룸버그 전 시장은 트럼프 대통령과 비슷하게 뉴욕에서 성공한 억만장자다. 게다가 모든 측면에서 객관적으로 트럼프 대통령보다 나은 것으로 평가된다. 포브스에 따르면(2019년 9월 기준) 블룸버그 전 시장의 자산은 555억 달러(약 64조5000억원)로 세계 아홉째 부자다. 트럼프 대통령의 31억 달러(약 3조6000억원)보다 18배나 많다.
또 ‘금수저’인 트럼프 대통령과 달리 블룸버그 전 시장은 자수성가로 부를 일궜다. 1942년 보스턴 인근에서 유대인 부모에게서 태어난 그는 존스홉킨스대·하버드대 경영대학원을 나왔다.
1966년 월가 4대 투자은행이었던 살로먼브러더스에 입사해 주식 거래 일을 하며 실력을 인정받았다. 하지만 1981년 회사가 팔리는 과정에서 사내 정치에 희생당해 해고당한다.
그는 이를 기회로 ‘이노베이티브 마켓 시스템스’라는 작은 기업을 세운다. 살로먼에서 일할 때 수작업을 해야 했던 각종 금융 분석 자료를 컴퓨터로 일괄 처리해 전용 단말기로 제공하는 사업이었다. 사업은 급성장했고 그는 사명을 블룸버그로 바꿨다. 블룸버그는 지금 세계 180여 개국, 임직원 1만9000명을 거느린 종합 미디어그룹으로 성장했다. 블룸버그 전 시장은 이 회사의 지분 89%를 갖고 있다.
블룸버그 전 시장은 사업이 성공하자 정치에 눈을 돌려 2002년 뉴욕시장에 당선됐다. 당시 뉴욕은 2001년 9·11 테러의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던 때였다. 그는 취임식에서 “뉴욕을 재건해 자유세계의 수도로 만들겠다”고 선언했다. 그는 금융·패션·미디어의 도시 뉴욕에 코넬공대를 유치하고 실리콘밸리를 본뜬 실리콘앨리를 조성해 기술 산업을 육성했다.
또 디즈니의 마케팅 전문가를 영입해 뉴욕 브랜드를 널리 알려 관광 산업을 키웠다. 뉴욕의 한 해 관광객은 6000만 명이 넘는다. 이를 통해 막대한 적자를 내던 시 재정은 흑자로 돌아섰다. 치안을 강화해 악명 높던 범죄의 도시 뉴욕을 안전한 도시로 바꿨고 특수목적고 확대 등 공교육 개혁, 빈곤 퇴치에도 힘을 쏟았다. 그러면서도 연봉으로 1달러만 받았고 지하철을 타고 출퇴근했다.
그는 당적(공화→민주→무소속)을 여러 번 바꾸면서도 내리 3선을 했다. 지난 100년간 3선을 한 넷째 시장이다. 그리고 그가 시장을 맡았던 12년 동안 뉴욕은 명실상부한 세계 최고의 도시가 됐다.
◆“유대인 블룸버그, 당선 확률은 낮아”
이런 블룸버그 전 시장은 미국 대통령이 될 가능성이 있을까. 월가의 전반적인 시각은 확률을 낮게 보고 있다. 월가의 한 관계자는 “블룸버그 전 시장은 유대인이어서 대통령 당선 가능성은 낮다고 본다”고 말했다. 이는 객관적 분석에 기반을 둔 것이다.
뉴욕은 유대인의 도시다. 유대인은 세계에 1400만 명쯤 되는 데 그중 절반가량인 600만 명이 미국에 산다. 그리고 미국에서도 150만 명이 뉴욕 지역(뉴저지·코네티컷 포함)에, 50만 명이 로스앤젤레스 인근에 모여 산다. 블룸버그 전 시장이 뉴욕시장을 3선이나 할 수 있었던 배경엔 이런 거대한 유대인 커뮤니티가 자리 잡고 있다.
하지만 뉴욕과 로스앤젤레스를 벗어난 다른 지역에서의 인기는 높지 않다. 또 미국에선 가끔씩 유대교 밀집 지역에서 총격 사건이 발생하는 등 안티세미티즘(anti-Semitism)이 살아있다. 실제 블룸버그 전 시장이 경선 참여를 발표한 뒤 민주당의 무슬림 의원인 일한 오마르 하원의원은 2019년 12월 9일 의미심장한 트윗을 띄웠다. 억만장자 레온 쿠퍼맨(유대인)이 블룸버그 전 시장을 지지했다는 트윗을 리트윗하면서 “나는 궁금하다”고 한 것이다. 블룸버그 전 시장이 미국보다 유대인과 이스라엘을 위해 대선에 나오려는 것이란 의심을 제기한 것으로 여겨졌다.
미국의 유대인들이 블룸버그 전 시장을 전폭적으로 도울지도 의문이다. 유대계에 정통한 한 인사는 “유대인들은 뒤에 숨어 영향력을 발휘하는 게 현명하지 앞에서 설치다가 주류 사회의 미움을 받게 되면 박해로 이어질 것이란 것을 잘 알고 있다”고 설명했다. 머릿수도 적고 미움을 받는 유대인이 정치권력까지 휘두르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는 것이다. 독일에서 발생한 나치의 아우슈비츠 학살 같은 사태가 일어날 수 있다는 얘기다.
블룸버그 전 시장은 또 뉴욕시 행정은 잘했다는 평가를 받지만 인기는 그다지 높지 않다. 완벽주의자답게 온갖 일에 심하게 간섭하고 규제했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게 공중 보건 정책이다. 그는 식당의 위생 규제를 강화하고 시민 건강을 위해 탄산음료 소비를 억제했다. 사무실 내 흡연도 전면 금지했다.
특히 비난을 받는 게 치안 강화를 위해 실시한 ‘불심 검문(stop and frisk)’ 정책이다. 블룸버그 전 시장은 경찰이 우범자로 여겨지는 시민을 동의 없이 검문하고 조사할 수 있도록 했다. 2011년 불심 검문을 당한 사람만 68만여 명이다.
이는 범죄율을 낮추는 데 큰 공을 세웠다. 하지만 인권을 침해하고 인종 차별적이란 비난을 받았다. 불심 검문 대상자가 흑인과 히스패닉에 치우쳐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뉴욕 지방법원은 2013년 8월 “미국 헌법에 위배된다”고 평결했고 2014년 블룸버그 전 시장의 뒤를 이은 빌 드블라지오 시장이 이를 폐지했다.
중국 이슈도 문제가 될 수 있다. 본인이 89% 지분을 가진 블룸버그통신의 중국 시장 의존도가 크기 때문이다. 중국에 대한 반감이 커진 상황에서 중국 문제를 강경하게 다루기 어렵다는 지적이 나온다. 77세란 고령도 문제도 될 수 있다.
이 때문인지 블룸버그 전 시장의 인기는 생각보다 낮다. 출마를 선언하던 2019년 11월 각종 여론 조사에서 블룸버그 전 시장에 대한 지지율은 2~4%에 그쳤다. 30% 수준인 1위 조 바이든 전 부통령과의 격차가 매우 크다. 2019년 12월 나온 조사(12월 19일, CNN)에서는 처음으로 5%를 넘겼다. 이는 출마 첫 주에 미국 대선 경쟁 사상 기록인 3000만 달러(약 348억원)를 집행하는 등 2019년 11월 16일부터 한 달간 7200만 달러(약 836억원)를 정치 광고에 퍼부은 효과로 분석된다.
워싱턴포스트는 블룸버그 전 시장의 출마에 대해 “트럼프 대통령이 갖지 못한 모든 것을 가지고 있는 블룸버그 전 시장은 훌륭한 대통령이 될 수는 있겠지만 아무래도 민주당 후보가 되기는 힘들 것으로 보인다”고 평가했다.
[본 기사는 한경비즈니스 제 1257호(2019.12.30 ~ 2020.01.05)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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